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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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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알
열상 19, 18
"내가 이스라엘 백성 가운데서 바알에게 무릎을 꿇지도, 입맞추지도 않았던 칠천 명을 남겨두리라."
 
1. 갈등 구조

역사는 투쟁으로 발전 또는 후퇴하면서 목표를 향해 진행된다. 그러므로 이 역사상에 싸움이 있다는 것은 숙명적인 것이다. 우리는 물론 평화를 목표로 하나 성서에서 말하는 궁극적 평화는, 히브리인이 말하는 샬롬은 역사가 끝날 때 온다고 믿고 있다. 그러니 역사가 계속하는 한 싸움은 있게 마련이고, 따라서 우리의 삶은 싸움인 것은 다윈의 적자생존이론을 빌리지 않더라도 확실하다.

그런데 무엇과 무엇이 싸우느냐? 마르크시즘은 계급과 계급 사이의 싸움이라고 본다. 이것은 물론 역사적으로 보아 과녁을 찌른 것이다. 그러나 그것을 그렇게 드러내서 철칙처럼 함으로써 그 싸움을 격화시켰다.

나는 역사에 대한 성서의 입장을 한마디로 표현한다면, 역사는 정착하려는 힘과 진취하려는 힘과의 싸움이라고 본다. 그것은 구체적으로 현재의 상태에 만족해서 안주하려는 세력과 '이대로는 안돼! 빨리 목표를 향해야 나아가야 한다!'는 세력과의 싸움이다. 역사에서 안주하려는 세력은 기득권자요, 앞으로 나아가야 한다는 세력은 안가진 자들이다. 기득권자는 그것을 지키기 위한 체제 등을 사수하려고 하고, 앞에 목표를 둔 자는 그런데서 탈출하거나 탈출시키기 위해서 그것에서 저항한다. 이런 현상은 언제나 있는 것이다.

가인과 아벨 이야기는 수수께끼다. 그런데 한 가지 흥미있는 것은 아벨은 유목민으로서 동적(動的) 생의 상징이요 가인은 농경민으로 정착의 상징이라는 사실이다. 이 정착하려는 가인이 동적인 아벨을 죽였다. 또 노아에 이르기까지의 인간상은 보수, 안전의 인간인데 대해서 아브라함은 새 인간상으로 유목적, 진취적 인간상이다.

탈애굽하여 계속 목표를 향하는 이스라엘은 진취적 상징이요, 가나안에 정착한 이스라엘은 벌써 안전, 자기확보를 위한 이기적 군상으로 둔갑했다. 이러한 두 타입 사이에는 언제나 긴장과 투쟁이 있는데, 그것이 구약에서 야훼와 바알의 싸움으로 나타난다. 야훼와 바알의 싸움!

야훼! 성서의 하느님은 역사의 하느님이다. 그래서 진취적이며 역사를 한 목표에로 이끌고 가기 위해 그의 백성들에게 계속 탈향(脫向)의 존재이기를 명한다. 이에 대해서 바알신이란 공간의 신으로 언제나 정착의 자리에 있다. 구약에서는 '바알' 또는 '아스다홋'이라고도 하는데(판관 2, 13. 10, 6; 사무엘상 7, 4), 이것은 소유와 대지를 비옥하게 하고 열매를 맺히게 하는 신, 즉 대지에 정착하게 하는 신이다. 바알의 여성명사 '바알랏'(Baalat, 열왕하 17, 17)는 역시 생산의 신 자연의 신으로 그 성격대로 정치-사회기능과는 전혀 무관하다.

우리의 싸움은 바로 바알신과의 싸움이다. 기득권자를 중심한 체제를 갖추고 안전, 안보만을 계속 내세우며 그것을 해칠 가능성이 있다고 보이는 것은 가차없이 억제, 제거하거나 원수시한다. 그래서 언론을 통제하고 종교의 분계선을 제정한다. 신성불가침의 성역을 제멋대로 확대하고, 제정된 법에 대해서 왈가불가도 허용하지 않는다. 만일 그러면 곧 박해와 투옥을 한다. 이게 모두 바알적 현상이다.

이에 대해서 우리는 하느님 외에는 절대란 있을 수 없으며, "여기가 좋사오니"라는 중간 정착이란 허락되지 않기 때문에 결국 바알 신과 충돌되고 있는 것이다. 바알신! 그 앞에 우리 국민이 제물이 되는 걸 우리는 하느님의 이름으로 심판하는 것이다.

이 정부의 철학은 오랫동안 1천 불의 GNP, 1백만 불 수출이었다. 그런데 곧 그렇게 된다는데 자유는 고사하고 날로 더 조여들어간다. 10년 전보다 10배 또 그 이상의 국민생산을 자랑하는데 도대체 그것은 다 어디로 가며, 누가 먹어치우는가?

1977년 1/ 4분기 도시근로자의 월 평균 가계지출이 최저수요액 이 94,580원이라고 기획원이 발표했다. 그런데 1977년 1월 현재 도시노동자 중 월 3만원 이하 수입자가 60.6%, 5만원 이하가 80%라고 한다(노동청 발표). 그러면 노동자 중 70%가 필요한 생활비의 1/3으로, 80%가 반밖에 수입이 없다. 그러면 어떻게 살라는 거며, 도대체 그 자랑스러운 경제부흥은 누구를 위한 것인가? 더우기 제조업 부분에서 총매출액 중 선진국에서는 노무비가 30%를 넘는데 우리는 겨우 2.3%밖에 안되니 결국 국민의 고혈로 얻은 부는 바알신 제단에 바쳐지고 있다는 결론이 된다. 즉 어느 일부계층의 안전, 안착을 위해서 바쳐지고 있다.

2. 거인의 대 바알 투쟁

이스라엘 오무리 왕조 때 신흥세력 앗시리아의 침공을 계기로 군비와 군사력을 길러 국가안보에 성공한 왕이 아합 왕이다. 일반 역사에서는 그를 높이 평가하는데 성서는 전혀 다른 관점에서 그를 판단한다.

성서는 "오무리의 아들 아합이 그 전의 왕들보다 야훼 보시기에 악을 더욱 행하였다"고 하는데, 그 이유는 '두로'의 여인 이세벨을 아내로 삼고 바알을 섬겼기 때문이라고 한다. 즉 아무리 군사적으로, 경제적으로 부강해도 율법적, 종교적 타락이 있는 한 그는 악한 자라는 결론이다.

아합은 이세벨의 유혹대로 곳곳에 바알신전을 세우고, 궁성 안에도 그 여인을 위해 바알신전을 세웠다. 이것은 벌써 안전, 자기 기득권의 확보를 위해 둥지를 트는 과정에 들어선 것을 뜻한다. 이에 야훼의 예언자들이 저항했다. 그러나 그럴 때마다 그는 저들을 사정없이 학살하면서 자기 위치를 유지했다.

여기 엘리아라는 거인적(巨人的) 예언자가 있었다. 그도 아합 왕의 정책에 대항하여 단신으로 싸우다가 숨었다고 한다. 그는 "여러분은 언제까지 양다리를 걸치고 있을 작정입니까? 만일 야훼가 하느님이면 그를, 바알이 신이면 그를 따르라!"고 결단을 촉구한다. 아합왕은 우국의 이 예언자를 "그대가 이스라엘을 망치는 장본인"이라고 한다.

한편 엘리아가 단신으로 한 칼에 450명의 바알사제들을 도말하는 드라마틱한 승리를 거둔 전설적인 이야기가 있다. 그런데 그렇던 그가 뜻밖에 왕의 여자인 이세벨의 복수의 선언을 듣고 혼비백산하여 호렙산으로 향하는 광야를 주야로 달음질치다가 기진하여 쓰러지면서 "날 차라리 죽여달라"고 야훼께 애원하는 초라한 존재로 급추락한다.

3. 패잔병이 된 거인

무엇이 그를 이렇게 만들었나? 차라리 죽기를 원하는 것은 체념인데, 체념은 정착인데 그것은 바알에게 굴복함인데, 무엇이 그를 이렇게 만들었나?

여기서 한 가지 중요한 것은 그는 그 싸움이 '홀로'의 싸움인 줄 알았다는 것이다. 한 때 그는 하느님의 종임을 저들에게 과시하게 해 달라고 기도했다. 그런데 이젠 나만 홀로 남았다고 거듭 말한다. 그는 그 싸움을 제 홀로의 어깨에 메어진 것으로, 해도 안 해도 되는 것으로 착각했다. 그러나 그 싸움은 바로 바알과의 싸움이지, 그의 개인의 승부를 겨루어보는 싸움이 아니다. 그렇기에 홀로의 싸움이 아니다. 하느님의 싸움, 역사의 방향이다. 이런 신앙, 이런 역사의식을 잃으면 언제나 좌절한다.

4. 일어서는 거인

다음에 주목할 것은 엘리아는 가르멜 산에서처럼 언제나 대소동 속에서 산이 흔들리고, 바위가 산산조각이 나고, 큰 바람이 불고, 지진이 이는 등 어떤 격동적인 운동, 이변 속에서만 하느님이 일한다고 생각한 점이다. 그러나 바로 그럴 때 위험이 있다. '운동'을 하고, 소동을 일으키고, 데모를 하고, 격돌을 하는 동안 사람은 쉽게 자기, 자기 목표, 즉 하느님마저 부재한 현장에 서게 되는 것이다.

엘리아는 그런 소용돌이 속에서 신을 못만났다. 오히려 그런 것들이 다 지난 다음 "조용하고 여린 소리"가 들려왔다. 그는 보이는 세계의 힘의 대결, 격돌 속에서 명멸하는 그 따위 신앙이 아니라 조용히 누룩같이 퍼지는 야훼의 싸움, 그의 계획, 그의 계획대로의 승리를 경험했다. 그것은 한마디로 "내가 이스라엘 백성 가운데서 바알에게 무릎을 꿇지도, 입맞추지도 않았던 7천 명을 남겨두리라"라는 것이다.

결국 엘리아는 혼자가 아니다. 아니 하느님이 함께한다. 하느님은 엘리아를 홀로 두지 않는다. 아니 7천 명, 즉 목표를 완성할 완전권을 확보해 두시리라는 것이다.

5. 바알과의 투쟁전선

우리는 때로 지친다. 때로 이기적인 데 사로잡혀서 복수심에 불타고, 크리스천이라는 의식도 없어진다. 그러나 그러면 꼭 태만해진다. 절망이 온다.

아니, 우리는 바알에 향한 하느님의 투쟁의 대열에 섰다. 이것은 순간도 잊지 말아야 한다.

우리는 무슨 기적적인 것을 기대하여 기다리다가는 지친다. 그래, 그런 돌연변이적인 기적은 언제나 가능하다. 그러나 우리는 조용히 누룩같이 퍼져가는 정의와 평화의 하느님의 발길 소리를 들을 귀를 가져야 한다.

우리는 때로 외롭다. 정말 스스로 몰지각한 소수인가 회의한다. 그러나 걱정말라! 우리 혹은 나는 결코 혼자가 아니다! 나 모르게 우리 곁에, 우리 뒤에, 우리 말고, 뒤를 이을 7천 명 완전권을 하느님께서 준비하고 계시다는 것을 잊지 말자!

요는 우리 싸움은 하느님의 싸움이어야 한다. 그러니 인간의 잔꾀 따위에 의존하거나 전략적 재주에 의존말고 하느님 앞에 선 존재로 엄숙하고 진실하자!

그 때 이세벨이 사형대에 오른 것처럼 바알 신이 항복할 때가 오리라.


List of Articles
바알 (열상 19, 18)
남은 칠천 명 (19, 7-18)
민중의 손으로 통일되는 날 (아모 9, 11-15)
겨울은 가고 (에제 37장)
에제키엘이 무등산에서 절규한다 (에제 24, 6-8)
포로에서의 탈출 (이사 66, 1-8)
위정자와의 대결 (이사 7, 10-14)
   
제5부 새로운 존재
일상성과 비일상성 (루가 10, 38-42)
그래도 다시 낙원에로 환원시키지 않았다 (창세 3, 1-10)
새로운 인간상 (창세 12, 1-9)
믿음의 조상 (창세 22, 17-18)
두 사이 에 손을 얹을 판결자 (욥기 9, 25-35)
하느님으로부터의 도피 (시편 139편)
하느님의 웃음 (시편 2편)
잠과 신앙 (시편 127편)
교회란 무엇인가 (로마 8, 9-30)
인간을 말한다 (마르 12, 28-34)
존재 근거 (시편 42편)
우주의 품으로 (시편 8,3 이하)
   
판권
표지
예수의 민중사건 : 『민중과 성서』를 내면서
   
제1부 복음서와 민중
   
예수와 민중 : 마르코복음을 중심으로
    1. 전제
    2. 마르코복음 안의 오클로스
    3. 마르코복음에 나타난 오클로스의 성격
        1) 오클로스의 성격
        2) 오클로스에 대한 예수의 행태
        3) 종합
    4. 예수를 따른 자들
    5. 마르코복음 안에 있는 어록
    6. 오클로스의 언어학적 의미
        1) 라오스와 오클로스
        2) 오클로스와 암 하 아레츠
    7. 종합
마르코복음에서 본 역사의 주체
    1. 전제
    2. 마르코의 삶의 자리
    3. 마르코의 민중신학의 기조
        1) 세례자 요한이 잡힌 후(14a절)
        2) 갈릴래아로 가다
        3) 하느님 나라의 도래 선포
    4. 민중의 행태
예수사건의 전승 모체
    1. 문제 제기
    2. 케리그마의 성격
        1) 고린토전서 15장 3~8절
        2) 필립비서 2장 6~11절
        3) 사도행전에 나타난 케리그마
    3. 민중언어의 성격
    4. 수난사
    5. 예수의 행태 일반
        1) 기적 이야기와 예수의 행태
        2) 아포프테그마와 예수의 행태
        3) 로기온(Logion, 어록)과 예수의 행태
    6. 결론
가난한 자 : 루가의 민중 이해
    1. 가난한 자
        1) 통계적 고찰
        2) 루가의 특수자료
        3) 예수의 탄생설화와 나자렛 선언
        4) 마르코와 Q자료
    2. 루가복음서의 청중
    3. 결론
마태오의 민중적 민족주의
    1. 문제 제기
        1) 마태오의 신학적 주제에 대한 논의들
        2) 문제 제기
    2. 마태오가 처한 현실
        1) 마태오와 그의 시기
        2) 민족적 와해 위기
    3. 마태오의 현실인식
        1) 이스라엘 : 길 잃은 양들
        2) 길 잃은 양이 놓여 있는 현실
    4. 민족동일성 재확립
        1) 뿌리 찾기
        2) 바리사이파가 주도하는 라삐 유다교와의 대결
    5. 마태오의 민중 이해
        1) 언어적 성격
        2) 의식화된 민중
    6. 맺는 말
민중신학의 성서적 근거 : 마르코복음을 중심으로
    1. 예수사건의 재발견
    2. 마르코복음과 민중
    3. 민중은 수단이 아니다
    4. 민중은 객체일 수 없다
    5. 십자가는 민중수난의 극치다
민중신학의 어제와 오늘
    1. 독재와 대항하므로
    2. 민중을 만나므로
    3. 민중과 더불어
   
제2부 민중운동사
   
민중사건과 언어사건
    1. 성서에서 본 말의 성격
        1) 그 말의 현장은 어떤 것이었나
        2) 예수의 경우
        3) 예수사건에 관한 전승
        4) 오순절의 말 사건
    2. 무엇으로 말하는 것인가
    3. 해야 할 말은 무엇인가
    4. 우리가 해야 할 말
미래는 가난한 자의 것 : 루가 6장 20~26절
    1. 축복과 저주
    2. 가난한 자와 부요한 자
    3. ‘지금’과 ‘장차’
    4. 우리의 선택
나라가 임하옵소서
    1. 예수의 기도
    2. 그의 기도를 전달받은 자들
    3. 하느님의 나라
고향 잃은 민중
    1. 피난민
    2. 성서에서 본 피난민문제
    3. 게르(GER) 문제 해결의 시도
    4. 이방인에 대한 관용의 한계
    5. 당면한 과제
        1 ) 새로운 인식을 위한 운동
        2) 실천에 대한 몇 가지 제언
이스라엘 민중사
    1. 머리말
    2. 출애굽
    3. 고대 이스라엘 종족동맹
    4. 민중을 배반하고 세워진 왕권
    5. 분단시대의 고난
    6. 민중운동의 여러 계열
    7. 예수의 민중운동
    8. 맺는 말
   
제3부 민중과 체제
   
민중사실의 증언
    1. 민중신학의 전제들
    2. 민중사실의 증언
고난과 고백
    1. 수난자와의 일치
    2. 마르코의 민중
    3. 수난사와 고난
    4. 더불어의 고난
    5. 맺는 말
갈릴래아 민중에 항복한 바울로
    1. 바울로의 위치
    2. 사울은 어떤 사람인가
    3. 그리스도교 박해
    4. 예수를 만남
    5. 전향
    6. 맺는 말
소명(召命)
    1. 바울로의 소명
    2. 사도 됨과 소명
    3. 이방인에게로
바울로와 역사의 예수 I
    1. 머리말
    2. 예수에 대한 바울로의 말
    3. 예수냐 바울로냐
    4. 왜 예수가 아니고 케리그마인가
선택받은 민중: 고린토전서 1장 26~31절
    1. 고린토교회 구성원의 사회계층
    2. 공동체원의 가치 판단 기준
    3. 민중을 보는 눈
    4. 택함을 받은 민중
   
제4부 예수의 희망
   
하늘도 땅도 공(公)이다
    1. 낙원 이야기
    2. 아담一인간
    3. 실락원은 공을 사유화함으로
갈릴래아에서 만나자: 마르코 16장 1~8절
    1. 제3의 자리
    2. 갈릴래아
    3. 갈릴래아에서 만나자
예수의 희망
    1. 새 세계에의 희망
    2. 희망과 세계혁명
    3. 바른 인간공동체의 희망
    4. 맺는 말
   
판권
표지
예수는 논하지 않았다
   
제1부 민중의 언어, 이야기
   
1. 성서라는 책의 성격
2. 성서의 서술양식
    1) 구약성서
    2) 신약성서
    3) 민중언어
   
제2부 예수의 이야기(비유)
   
1. 만성병에 걸린 세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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