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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은 칠천 명
열상 19, 7-18
 
1. 인간의 연대성

십계명에 "나를 싫어하는 자에게는 아비의 죄를 그 후손 삼 대에까지 갚는다. 그러나 나를 사랑하여 나의 명령을 지키는 자에게는 그 후손 수천 대에 이르기까지 한결같은 사랑을 베푼다"(출애 20, 6)라는 약속이 있다. 이것은 인간의 연대성을 말하는 것이다. 사람은 역사 안에 사는 한, 이 연대성에서 빠져 나올 수 없다. 나 개인의 어떠한 잘못에 의한 것이 아니고, 단지 어떤 지역, 어떤 시대, 어떤 민족의 일원으로 태어났기 때문에 그때 거기서 벌어지는 참변을 당하기도 하고, 반대로 내 공이 아닌데 그 시대 그 장소에 있는 덕분으로 거기서 생긴 열매를 따먹는다.

나는 젊은 날 한국에 있을 때에는 세계인이 될 수 있다는 환상을 안고 있었다. 그러나 외국에서의 삶에서 뼈저리게 경험한 것은 나는 한국인 수준을 절대로 넘어설 수 없다는 것이었다. 싫든 좋든 나는 한국사람이어야 하며, 한국이 당하는 영광과 수모를 함께 받아야 한다는 것을 숙명으로 알게 되었다.

또 우리는 시대적인 제약에서 해방될 수 없다. 19세기가 아닌 20세기, 20세기에 있어서도 막바지에 이른 이 때이 시기의 사상적, 정치적, 군사적 그리고 무엇보다도 경제적 조건에 예속되어 있다. 우리는 이 시대에서 일어나는 문제를 회피할 수 없다. 서구사회는 개인주의를 구가하고 있으나 그것은 허구다. 개인이 운신할 폭은 극히 제한되어 있다. 내가하는 일, 내가 당하는 일은 결코 내게서 그치지 않는다. 그것은 나를 넘어 네게로 파급된다. 마찬가지로 네가 하는 일, 네가 저지른 일에 나는 원하든 원치 않든 연루될 수밖에 없다. 이것은 인간의 연대성을 말하는 것이다.

일찌기 이런 문제를 제기한 것이 창세기의 소돔과 고모라에 관한 이야기다. 소돔과 고모라가 멸망하기 전날에 아브라함이 야훼신과 대화대결한 것이 그것이다. 소돔, 고모라에 관한 전설과 사해를 원인론적으로 결부시킨 것은 오래 전부터 있었던 일이다. 사해는 염분이 너무 많아 생물이 하나도 없고 주변의 산악은 험상할 정도로 앙상하다. 고고학자들의 연구에 의하면 이 지대가 본래는 비옥했었다고 한다. 그런데 그 언젠가 이곳이 이처럼 불모지대가 되어 버렸다.

왜 소돔과 고모라가 망했나?

'죄가 많아서'라는 대답으로 안착한 것이 주전 7세기경이다. 그러나 소돔과 고모라에 대한 질문은 여기서 끝나지 않는다. 질문은 이어진다. "그런데, 왜 악한 사람과 의로운 사람이 똑같은 운명에 처하는가?" 죄가 많아서라는 대답만으로는 이런 물음을 해결할 수 없다.

아브라함은 "주께서 악인과 함께 의인을 멸하려 하시나이까?" 저 도시 안에 의인 오십 명이 있을지라도 주께서 그곳을 멸하시렵니까. 그 오십 명 의인 때문에 이곳을 용서하시지 않으시렵니까?" 이것은 연대성을 말하는 것이다. 50명의 의인의 공로가 그 전체를 살릴 수도 있다는 것이다. 아니 40, 30, 20, 아니 의인 10명만 있어도 이 도시는 멸망되지 않을 것이라는 대답이다. 즉 의인 열 명의 존재가 소돔과 고모라 도시 전체의 운명을 좌우한다는 것이다. 바로 이 의인 열 명이 없어서 통째로 망했다는 것이 소돔고모라의 운명에 대한 그 시대의 결론이다.

구약의 역사는 이스라엘민의 선민신념이 시련을 받은 역사라고 하겠다. 이스라엘 민족이 온 인류 중에서 선택받아 하느님과 계약을 맺은 민족이라는 신념은 계속 흔들리게 되었다. 그것은 그들의 죄악의 역사가 이런 자부심과 계속 갈등을 빚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저들은 선민사상을 끝까지 버리지 않았다. 이사야는 이스라엘의 혈통 전부를 통해서가 아니라, 외모로는 도저히 가려낼 수 없이 숨어서 잔류하는 남은 이스라엘을 통해 하느님은 세계사를 그의 뜻대로 펴 나갈 것이라고 믿었다. "그날에 이스라엘의 남은 자와 야곱족속의 생존자들이 돌아오며" 저들을 통해 하느님은 "이미 정하신 뜻을 온 땅에 이루시리라"(이사 10, 20-23).

남은 자! 이 남은 자가 어디에 있나? 예언자 예레미야는 한걸음 더 나가서 그것이 단 한 사람일 수도 있다고 보고 그 한 사람을 갈구해 마지않는다.

예루살렘 거리를 돌아다니며
너희 눈으로 찾아보아라.
장 마당마다 찾아 다녀 보아라
바르게 살며 신용을 지키는 사람이
하나라도 있으면
나는 용서하리라.(예레 5, 1)

에제키엘도 같은 신념에서 한 사람을 갈구하는데, 그 한 사람은 무위(無爲)의 의인이 아니라 행동하는 사람이다.

지주라는 것들은 깡패나 강도떼가 되어 비천한 자나 가난한 자들을 괴롭히고 떠돌아 다니는 머슴들을 이유도 없이 학대한다. 행여나 이 가운데 이 나라를 위하는 사람이 있어 담을 고치고 틈을 막으며 이 나라를 멸망시키려는 나의 앞을 막아서는 자를 찾아 보았지만 그런 사람도 없었다. 그러므로 나는 이제 나의 분노를 퍼부으리라(에제 22, 29-31).

이 나라를 멸망시키려는 이의 앞을 막아서는 자, 결국 한 사람으로 압축되었다. 전체의 운명을 등에 지고 대결하는 한 사람! 그것은 영웅일 수도 있고 속죄양일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여기서는 영웅을 말하지 않고 희생의 제물이 될 각오를 가진 사람을 말한다. 그런데 중요한 사실은 그같은 한 사람이 하느님의 분노마저 무마 또는 저지할 수 있다는 확신이다.

2. 나 홀로?

바알의 사제 450명을 단칼에 처치한 거인 엘리야는, 이 소식을 전해 들은 이세벨이 반드시 앙갚음을 하겠다는 전갈을 받자마자 돌변해 버린다. 그렇게 용감하던 이 거인은 순식간에 비겁한 자로 둔갑한다. 그는 광야로 광야로 줄행랑쳤다. 유다 브엘세바에 이르러서는 자기 시종마저 버리고 계속 달리다가 기진한 그는 싸리나무 덤불 밀에 쓰러진 채, 하느님께 차라리 자기를 죽여 달라고 호소한다.

그는 왜 이렇게 갑자기 변했을까? 이스라엘의 많은 민중이 그를 지켜 볼 때에는 그처럼 용감했었는데, 어느 순간 그는 홀로라는 생각에 미쳤을 때 갑자기 무력해진 것이다.

홀로! 이것은 연대성을 망각한 그릇된 자기인식이다. 그는 하느님께 이렇게 호소한다.

저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당신과 맺은 계약을 저버린 것을 보고 만군의 하느님 야훼를 생각하여 가슴에 불이 붙고 있습니다. 이 백성은 당신의 제단을 헐었을 뿐 아니라 당신의 예언자들을 칼로 쳐죽였습니다. 이제 당신 예언자라고는 저 하나 남았는데 그들이 저마저 죽이려고 찾고 있습니다(열상 19, 10).

이 호소에는 중요한 몇 가지 사실들이 반영되어 있다. 첫째는 야훼의 예언자들을 죽인 자들이 이세벨과 그 일당이라고 한정하지 않고 이스라엘 백성이라고 한 점이다. 비록 이세벨과 그 일당이 한 일이나, 그 결과는 이스라엘 전체에게 미친다는 연대의식이다. 바알 사제들과의 대결현장에서 거기 모인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바알이냐 야훼냐의 결단을 촉구했을 때, 그 백성들은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았다. 저들은 중립을 지킨 셈이다. 악과 선을 분명히 판별하면서도 선에 적극 가담하지 않는 것은 악에 동조하는 것이다. 야훼의 예언자를 죽인 것은 이세벨 일당이지만, 이런 엄청난 사실을 방관한 모든 이스라엘 백성은 그 살해에 직접 가담한 것과 같다는 것이다. 이것은 연대성에 대한 분명한 인식이다.

둘째, 그러나 그러한 인식을 가졌던 엘리야 자신은 지금 홀로라고 생각하고 있다. 이것은 이스라엘 온 백성과 그와의 연대가 끊어졌다고 생각한 탓이다. 이러한 생각은 그의 사명의식을 뺏아 버렸다. 바알신과 대결할 때, 엘리야는 내가 온 이스라엘을 대신해서 죽음을 각오하고 싸우겠다는 연대의식으로 인해 그처럼 강할 수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지금의 그는 차라리 죽여 달라고 한다. 왜 비록 홀로라도 이스라엘 전체를 위해 싸우려고 하지 않는가? 그것은 바로 연대의식을 잃어버렸기 때문이다. 나 하나가 서는 것이 곧 이스라엘 전체가 서는 일이 될 수 있고, 나 하나의 체념이 이스라엘 전체의 절망을 가져 올 수 있으며, 희생의 제물이 되겠다는 나 하나가 각오가 이스라엘 전체에 승리를 가져올 수 있다는 이 연대의식이 없어진 것이다. 이런 연대 의식의 결여는 하느님을 믿는 기반의 상실을 의미한다. 사실상 엘리야는 이 때에 야훼의 능력에 아무런 기대를 두고 있지 않다.

셋째, 엘리야는 온 이스라엘 백성의 배반의 내용은 바로 하느님과의 계약을 저버린 것이라고 보았다. 이스라엘은 계약의 백성이다. 고대 이스라엘 공동체는 야훼와의 계약공동체였다. 그런데 이스라엘이 군주국이 됨으로 계약공동체의 기반이 흔들린 것이다. 그러므로 역대의 예언자들이 지향했던 것은 언제나 이 계약공동체를 회복하자는 것이었다. 엘리야도 예외가 아니다. 그의 바알과의 투쟁은 계약공동체의 수호라는 맥락에서 보아야 한다. 가나안 군주들과의 투쟁은 바로 바알과의 투쟁과 일치된 것이다. 엘리야는 이 싸움을 계승했던 것이다. 그런데 혼자뿐이라는 생각에 빠져 들어 더 이상 살고 싶지 않다는 것은 바알에게 항복하고 계약공동체의 회복을 포기했다는 뜻이다.

나 홀로라는 생각에서 절망하는 엘리야의 모습을 일제말엽의 한국 상황에서도 찾을 수 있다.

일제가 식민정책을 강화하여 한국 사람의 언어를 탈취하고 이름 마저도 뺏아 버렸다. 러시아와 싸워 이기고 청나라를 굴복하게 한 전력을 가진 일본이 만주를 식민지화하고 중국 땅을 승승장구 진격해 들어갈 뿐 아니라, 세계대국인 미국과의 전쟁에서마저 승리를 거듭하는 시점에 이르렀다. 이 때 한국은 모두 일본화된 분위기였다. 일본의 바알신당인 신사가 곳곳에 세워지고 심지어 가정에까지 침투되어도 어느 하나 저항하는 단체가 없었으며, 우상배격을 제1계명처럼 고수하던 그리스도교마저 다소곳이 항복해 버리고 말았다. 바로 그때 한국의 엘리트로 자타가 공인하고 있던 소수의 지도층은 어떻게 되었나? 외지로 망명한 사람들말고는 국내에 있던 사람들 중 거의 전부가 친일전선에 선 것이다. 그들은 거의 예외 없이 애국애족의 열정으로 불붙었던 사람들이었다.

이런 마당에 엘리야가 섰다면 어떻게 되었을까? 온 한국 백성이 일본의 천황 앞에서 침묵하고, 일본의 칼은 이 백성의 선각자들을 쳐 죽였고 이제는 다만 홀로 남아서 죽음의 기로에서 있다고 생각되는 상황에 섰다면, 그가 선택할 수 있는 길은 두 가지 중 하나밖에 없을 것이다. 자살을 해버리거나 아니면 항복해 버리는 일 중의 하나.

우리가 아까워하는 인사들이 친일인사로 둔갑한 계기는 바로 나 홀로라는 생각에서 비롯된 엘리야의 체념과 비견될 수 있지 않을까? 이러한 체념은 민족공동체에 대한 기대를 포기한 것이며, 그 연대성을 폐기하는 것이다. 그때 민족개조론 따위가 등장한 것은 자기 민족에 대한 불신임의 표시며, 일본사람이 되자라는 망발은 바로 민족공동체의 포기를 의미하는 것이다.

3. 바알에 무릎을 꿇지 않은 칠천 명

하느님은 차라리 죽기를 원하는 엘리야에게 그 다음 할 일을 지시할 뿐이다. 절망 가운데 있는 그에게 행동하라고 명령한다. 행동하는 일, 구체적인 일에 투신하는 일, 그것은 절망의 늪에서 헤쳐 나오는 지름길이다. 그러나 행동하라는 이 지시 자체가 어떻게 절망의 구렁텅이에서 일어서게할 수 있을까? 단순한 명령이 탈진상태에 있는 그에게 어떻게 힘이 될 수 있나? 구체적인 행위를 지시하는 하느님은 중요한 사실 하나를 알려 준다.

그 내용은 "내가 이스라엘 백성 가운데서 바알에게 무릎을 꿇지도 입을 맞추지도 않았던 칠천 명을 남겨 두리라"(열상 19,18)이다. 혼자밖에 없다고 절망하는 그에게 바알에게 무릎을 꿇지도 입맞추지도 않았던 사람이 칠천 명이나 있음을 알려 준다. 저들은 현시점까지 바알과 대결함으로 자신을 지켰을 뿐 아니라, '남은 자'로서 이스라엘을 지키리라는 것이다. 칠천이란 완전수다. 이것은 바알을 추방하고 지파 동맹을 가능케 하며 야훼 주권을 확립할 만한 충분한 저력이 확보되어 있다는 뜻이다. 이러한 인식이 엘리야를 재기하게 한 것이다.

칠천 명에 대한 인식. 이것은 동지의식이다. 투쟁은 홀로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동지와의 결속으로 할 수 있는 것이다. 이것은 바로 민족의식이요 공동운명체의식이다. 나와 너가 우리가 될 때 투쟁은 가능하다.

그런데 바알과 야훼의 싸움의 내용은 무엇인가? 바꿔 말하면 이것은 엘리야에게서 문제가 된 동지란 어떤 것으로 연대된 동지인가라는 질문이다. 바알은 가진 자의 신이다. 엘리야의 입장에서는 지배자의 신이며 외세다. 이에 반해 야훼신은 하비루의 신이다. 제왕의 신 호루스와 대결하여 기층민중인 하비루를 해방시킨 신, 가나안의 여러 군주들과 대결하여 부족동맹공동체를 결성한 농노들의 신인 것이다. 그러므로 바알과 야훼의 싸움. 이것은 계급투쟁이다. 가진 자와 못 가진 자의 투쟁이며, 누르는 자와 눌리는 자의 투쟁이다. 지배자와 피지배자의 투쟁이다. 제국주의와 피식민민족의 투쟁이다. 엘리야는 바로 기층민중의 편에 선 투사였던 것이다. 그러기에 그의 삶 전체가 권력집단과의 대결로 점철되어 있다. 바알과의 싸움은 바로 이런 투쟁의 일환이다.

그렇다면 바알에게 무릎을 꿇지 않은 칠천 명이란 바알에게 굴복하지 않는 민중을 말하는 것이다. 군주제도에 의해서 파괴된 부족 동맹에서 잔존한 자들이다. 저들은 부패와 타락에 대한 저항세력이며 민중적 민주주의자라할 수 있겠다. 피압박자에게 있어서 가장 중요한 무기는 병기도 재력도 아니다. 그런 것은 손에 있지도 않거니와 그런 것으로는 가진 자와 대결할 수도 없다. 이들의 힘의 원천은 바로 연대의식이다. 너와 나는 운명공동체라는 그런 의식 말이다. 이 연대의식은 같은 정치적경제적 조건 밑에서 수난당함으로 형성된 것이다. 그것은 개인주의적으로 나(나 홀로) 의식에서가 아니라, 같은 조건 밑에서 수난하는 우리의식 즉 집단의식에서 형성된다. 가진 자를 결속시키는 것은 권력과 재력이다. 따라서 저들에게 권력과 재력이 없어질 때에는 저들의 결속은 동시에 와해되고 만다. 그러므로 바로 이 권력과 재력의 수호는 저들의 생존권을 위한 투쟁인 것이다. 그러므로 저들에게는 바알종교가 필연적이다.

이에 대해 바알에게 무릎을 꿇지 않은 자들의 무기는 오직 "야훼만"이라는 신앙이다. "야훼만"은 소유의 내용이 아니다. 아니 그것은 저항의 거점이다. 지구 위에 있는 사람이 지구를 움직일 수 없다. 그것을 움직이려면 지구 밖에 어떤 거점이 있어야 가능하다. 그러므로 한 수학자는 "나에게 지구 밖의 거점을 다오. 그러면 나는 지구를 움직일 것이다"라고 했다. "밖의 거점"(Punktauberhalf), 이것이 바로 야훼만의 신앙이다. 이 신앙은 밖의 거점이 되어 지구를 움직일 수 있을 때만이 의미가 있다. 야훼만이 하비루를 움직여 이집트를 탈출하게 했으며, 야훼만이 가나안의 군주 밑에서 신음하면서도 체념 속에 살고 있던 농노들을 움직여 결속하고 저항함으로 해방될 수 있게 했으며, 야훼만이 어떤 인간적인 주권도 거부하고 독점세력을 저지하면서 평등한 민주사회를 건설하여 200여 년 동안을 주변의 군주제국과 싸울 수 있는 힘이 된 것이다. 이처럼 "야훼만"은 사람이 사유할 수 있는 재산도 권력도 아니면서 바로 그런 것들을 독점한 세력과 싸워 이기는 힘인 것이다.

"야훼만"은 못 가진 자들이 결속함으로 투쟁할 수 있는 힘의 원천이다. 엘리야에게 "야훼만"은 결속된 민중의 힘에 대한 인식과 불가분의 관계에 있었다. 그 힘과 연대해 있을 때 그는 바알을 쳐 물리칠 수 있었다. 그러나 그가 홀로라고 인식하는 순간 그의 힘은 모두 빠져버렸다. 그것은 결속된 민중의 힘을 회의했다는 뜻이다. 그러한 그는 야훼를 부르짖으면서도 그렇게 무능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바알에게 입맞추지 않고 무릎을 꿇지 않은 칠천 명이 건재하다고 하는 인식은 그를 다시 살려 일으켰는데, 그것은 바로 결속된 민중의 힘을 재발견했다는 뜻이다. 부와 권력에 타협하지 않는 민중, 많은 사람들이 그런 것 앞에 무릎을 꿇음으로써 부패와 타락으로 줄달음칠 때에도 그런 것은 아랑곳 없이 "야훼만"을 고수하는 민중, 이런 민중이 엄존하는 한 이세벨의 횡포도 아합의 부패도 극복되고야 말 것이다.

우리는 군사독재 정권에 대항하여 오랜 싸움을 계속했다. 이 싸움과정에서 우리의 투쟁의지가 명멸하는 고비를 수없이 넘겼다. 그런 과정에서 얼마나 수없이 하느님을 불렀던가. 하느님께 매달릴 수밖에 없었던 것은 자신들의 힘의 한계를 절감했기 때문이다. 그러면 남은 것은 하느님뿐이고, 그래서 그의 힘에 매달릴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그렇게 함으로써 우리에게 곧 힘이 주어졌던 것은 아니다. "하느님만"이 우리에게 재기할 수 있는 힘을 주는 것은 모든 것을 하느님께 내맡기고 자신은 체념 속에 후퇴해 버리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이 군사독재체제에 입맞추지도 무릎을 꿇지도 않는 칠천 명을 확보하고 있다는 인식에 도달했을 때만 가능하다.

현실에 대한 인식이 확대되어 감에 따라, 그리고 현실이 변해 감에 따라 우리의 싸움은 확대심화된다. 독재만이 아니라 분단과 외세에 대한 싸움으로, 인권만이 아니라 생존권을 확보하는 싸움으로.

이 길은 결코 순탄한 길이 아니다. 이 길에서 우리는 여러 번 좌절했었고 또 앞으로도 그럴 것이다. 나만 혹은 한줌밖에 안 되는 이 사람들만 남았다. 동지인 줄 알고 철석같이 믿고 있던 사람들이 속속 변절되어 간다. 우리끼리라는 동지의식으로 어떤 합의를 보고 계획한 것이 밖으로 새어 나간다. 정권의 횡포 밑에 양심세력이어야 할 부류들이 죽은 듯이 잠잠해 버린다. 이런 측면만을 생각할 때만큼 나약해지는 경우는 없다.

바알에게 무릎꿇지 않은 칠천 명의 대열에 가담하라!

그 칠천 명은 바로, 외세가 이 땅을 자기 문턱처럼 넘나들 때마다 언제나 말을 바꿔 타고 옷을 갈아 입은 상류층과는 달리 끝내 한국이라는 명맥을 지킨 그들이다. 그게 누군가? 이름 없이 빛도 없이 제 일을 해낸 실질적인 주인인 민중이 아닌가. 민중이란 바로 바알에게 무릎꿇지 않은 칠천 명, 위에 군림하면서 대표성을 주장하지 않으나 뿌리처럼 밑바닥에서 보이지 않는 주인의 일을 하는 이들이다. 그들이 바로 민중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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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ist of Articles
바알 (열상 19, 18)
남은 칠천 명 (19, 7-18)
민중의 손으로 통일되는 날 (아모 9, 11-15)
겨울은 가고 (에제 37장)
에제키엘이 무등산에서 절규한다 (에제 24, 6-8)
포로에서의 탈출 (이사 66, 1-8)
위정자와의 대결 (이사 7, 10-14)
   
제5부 새로운 존재
일상성과 비일상성 (루가 10, 38-42)
그래도 다시 낙원에로 환원시키지 않았다 (창세 3, 1-10)
새로운 인간상 (창세 12, 1-9)
믿음의 조상 (창세 22, 17-18)
두 사이 에 손을 얹을 판결자 (욥기 9, 25-35)
하느님으로부터의 도피 (시편 139편)
하느님의 웃음 (시편 2편)
잠과 신앙 (시편 127편)
교회란 무엇인가 (로마 8, 9-30)
인간을 말한다 (마르 12, 28-34)
존재 근거 (시편 42편)
우주의 품으로 (시편 8,3 이하)
   
판권
표지
예수의 민중사건 : 『민중과 성서』를 내면서
   
제1부 복음서와 민중
   
예수와 민중 : 마르코복음을 중심으로
    1. 전제
    2. 마르코복음 안의 오클로스
    3. 마르코복음에 나타난 오클로스의 성격
        1) 오클로스의 성격
        2) 오클로스에 대한 예수의 행태
        3) 종합
    4. 예수를 따른 자들
    5. 마르코복음 안에 있는 어록
    6. 오클로스의 언어학적 의미
        1) 라오스와 오클로스
        2) 오클로스와 암 하 아레츠
    7. 종합
마르코복음에서 본 역사의 주체
    1. 전제
    2. 마르코의 삶의 자리
    3. 마르코의 민중신학의 기조
        1) 세례자 요한이 잡힌 후(14a절)
        2) 갈릴래아로 가다
        3) 하느님 나라의 도래 선포
    4. 민중의 행태
예수사건의 전승 모체
    1. 문제 제기
    2. 케리그마의 성격
        1) 고린토전서 15장 3~8절
        2) 필립비서 2장 6~11절
        3) 사도행전에 나타난 케리그마
    3. 민중언어의 성격
    4. 수난사
    5. 예수의 행태 일반
        1) 기적 이야기와 예수의 행태
        2) 아포프테그마와 예수의 행태
        3) 로기온(Logion, 어록)과 예수의 행태
    6. 결론
가난한 자 : 루가의 민중 이해
    1. 가난한 자
        1) 통계적 고찰
        2) 루가의 특수자료
        3) 예수의 탄생설화와 나자렛 선언
        4) 마르코와 Q자료
    2. 루가복음서의 청중
    3. 결론
마태오의 민중적 민족주의
    1. 문제 제기
        1) 마태오의 신학적 주제에 대한 논의들
        2) 문제 제기
    2. 마태오가 처한 현실
        1) 마태오와 그의 시기
        2) 민족적 와해 위기
    3. 마태오의 현실인식
        1) 이스라엘 : 길 잃은 양들
        2) 길 잃은 양이 놓여 있는 현실
    4. 민족동일성 재확립
        1) 뿌리 찾기
        2) 바리사이파가 주도하는 라삐 유다교와의 대결
    5. 마태오의 민중 이해
        1) 언어적 성격
        2) 의식화된 민중
    6. 맺는 말
민중신학의 성서적 근거 : 마르코복음을 중심으로
    1. 예수사건의 재발견
    2. 마르코복음과 민중
    3. 민중은 수단이 아니다
    4. 민중은 객체일 수 없다
    5. 십자가는 민중수난의 극치다
민중신학의 어제와 오늘
    1. 독재와 대항하므로
    2. 민중을 만나므로
    3. 민중과 더불어
   
제2부 민중운동사
   
민중사건과 언어사건
    1. 성서에서 본 말의 성격
        1) 그 말의 현장은 어떤 것이었나
        2) 예수의 경우
        3) 예수사건에 관한 전승
        4) 오순절의 말 사건
    2. 무엇으로 말하는 것인가
    3. 해야 할 말은 무엇인가
    4. 우리가 해야 할 말
미래는 가난한 자의 것 : 루가 6장 20~26절
    1. 축복과 저주
    2. 가난한 자와 부요한 자
    3. ‘지금’과 ‘장차’
    4. 우리의 선택
나라가 임하옵소서
    1. 예수의 기도
    2. 그의 기도를 전달받은 자들
    3. 하느님의 나라
고향 잃은 민중
    1. 피난민
    2. 성서에서 본 피난민문제
    3. 게르(GER) 문제 해결의 시도
    4. 이방인에 대한 관용의 한계
    5. 당면한 과제
        1 ) 새로운 인식을 위한 운동
        2) 실천에 대한 몇 가지 제언
이스라엘 민중사
    1. 머리말
    2. 출애굽
    3. 고대 이스라엘 종족동맹
    4. 민중을 배반하고 세워진 왕권
    5. 분단시대의 고난
    6. 민중운동의 여러 계열
    7. 예수의 민중운동
    8. 맺는 말
   
제3부 민중과 체제
   
민중사실의 증언
    1. 민중신학의 전제들
    2. 민중사실의 증언
고난과 고백
    1. 수난자와의 일치
    2. 마르코의 민중
    3. 수난사와 고난
    4. 더불어의 고난
    5. 맺는 말
갈릴래아 민중에 항복한 바울로
    1. 바울로의 위치
    2. 사울은 어떤 사람인가
    3. 그리스도교 박해
    4. 예수를 만남
    5. 전향
    6. 맺는 말
소명(召命)
    1. 바울로의 소명
    2. 사도 됨과 소명
    3. 이방인에게로
바울로와 역사의 예수 I
    1. 머리말
    2. 예수에 대한 바울로의 말
    3. 예수냐 바울로냐
    4. 왜 예수가 아니고 케리그마인가
선택받은 민중: 고린토전서 1장 26~31절
    1. 고린토교회 구성원의 사회계층
    2. 공동체원의 가치 판단 기준
    3. 민중을 보는 눈
    4. 택함을 받은 민중
   
제4부 예수의 희망
   
하늘도 땅도 공(公)이다
    1. 낙원 이야기
    2. 아담一인간
    3. 실락원은 공을 사유화함으로
갈릴래아에서 만나자: 마르코 16장 1~8절
    1. 제3의 자리
    2. 갈릴래아
    3. 갈릴래아에서 만나자
예수의 희망
    1. 새 세계에의 희망
    2. 희망과 세계혁명
    3. 바른 인간공동체의 희망
    4. 맺는 말
   
판권
표지
예수는 논하지 않았다
   
제1부 민중의 언어, 이야기
   
1. 성서라는 책의 성격
2. 성서의 서술양식
    1) 구약성서
    2) 신약성서
    3) 민중언어
   
제2부 예수의 이야기(비유)
   
1. 만성병에 걸린 세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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