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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중의 손으로 통일되는 날
—아모스
아모 9, 11-15

분할과 통치(Divide and Rule)라는 지배논리가 있다. 통치하기 위해 휘하의 세력들을 의도적으로 분할시키고 양쪽을 적당히 자극하여 둘 사이를 격리시키므로 두 가지를 노리는 것이다. 그 하나는 둘이 서로 싸우게 하므로 지배자의 비리에 대한 저항을 무디게 하는 것이고 또 하나는 둘을 대립시키고 적당히 힘의 균형을 조종하므로 번갈아 가면서 의존하게 하여 예속시키려는 것이다. 그러므로 분단은 원칙적으로 힘센 자들에 의해 저질러지거니와 그것을 유지함으로 자신의 이익을 추구하려는 체제이다. 한마디로 하면 집권자들이 분단으로 어부지리를 노리는 것이다.

한국의 경우가 바로 그러한 전형적 예이다. 도대체 한국의 분단부터가 강대국의 이해 관계에서 설정된 것이다. 그런데 그것은 잠깐 동안의 일이 아니고 지금 영구분단을 희망하며 그것을 획책하고 있다. 그것은 강대국들의 이해 관계와 직결되어 있다. 한국은 두 세력의 직접 충돌의 완충 지대 역할도 하지만 무장화의 구실도 되며 동시에 분단된 한쪽 정부를 종속시키기에 좋은 여건이 되는 것이다.

그런데 그런 분단 상태를 유지하기 위해서 내부분열을 조장하는 것이다. 그것은 분단상태를 지지하는 큰 세력과 밀착되어 이루어진다. 계급 지방감정 등을 조장하며 분단된다른 쪽을 공포의 대상으로 과장하므로 국민을 억압할 권리의 근거를 마련하는 것이다.

이런 상황에서 통일을 지배층에 기대하는 것은 언어도단이다. 통일의 주체는 분단 상황에서 희생되고 있는 민중만이 할 수 있는 일이다.

1. 이스라엘 통일의 장애물들

주전 8세기 중엽의 이스라엘이 그런 상태에 있었다. 그 때는 남북이 분단된 상태였다. 집권자는 분단을 볼모로 횡포했다. 그 횡포는 계급 사이의 갈등을 극대화함으로 이루어졌다. 그들은 분단 상태의 평화와 번영을 구가했다. 그것이 바로 부패의 위장이며 그 온상이 되는 것이다.

북이스라엘은 이미 유목 시대에서 농경 시대로 돌입했을 뿐 아니라 한 걸음 나아가서 상업 시대로 집어든 것이다. 이것은 자본 독점충을 형성하는 조건이다. 한마디로 '근대화'의 물결이 일어난 것이다. 그것은 극소수에게 자본의 대부분이 축적되는 과정이었다. 그런데 집권층은 바로 그것을 가리켜 평화요 번영이라고 외쳐댄 것이다. 이 길은 비록 잘못된, 아니 어쩌면 전 민족의 위기를 초래하는 길임을 인식한다고 해도 이미 그 안에서 특권을 누리는 자들은 그런 사실을 알려고도 하지 않으며 안다고 해도 어쩔 수 없는 궤도를 탄 것이다. 저들은 그런 조건에 의해 얻은 재산을 안고 죽는 한이 있어도 제 손으로 그런 체제를 유지하려고 한 것이다.

2. 썩은 지배층

아모스는 저들 지배층의 작태를 신랄하게 파헤친다.

상이 침상에서 뒹굴고
보료 위에서 기지개를 켜며
양 떼 가운데서 양 새끼를 골라 잡아먹고
외양간에서 송아지를 잡아먹는 것들
제가 마치 다윗이나 된 듯 악기를 새로 만든다.
거문고를 뜯으며 제 멋에 겨워 홍얼거리는 것들
몸에는 값비싼 향유를 바르고
물은 대접으로 퍼 마시고
요셉 가문이 망하는 것쯤
아랑곳도 하지 않는 것들(아모 6, 4-6).

철저한 향락에 빠진 군상의 모습이다. 저들은 기득권에 자만하고 이미 거둔 것이 영원히 계속되리라고 믿고 있는 자들이다. 그러나 저들은 그것으로 만족하지 못한다. 이미 탐욕의 노예가 되었으며 바로 저들의 독점으로 가난하게 된 자들에 대한 횡포와 잔혹성을 최대한 발휘하는 것이다.

은을 받고 죄없는 자를 팔아먹으며
신 한 켤레를 받고 가난한 자를 팔며
가난한 자의 머리에 있는 티끌을 탐내며
겸손한 자의 길을 굽게 하며
모든 단 옆에서 저당잡은 옷 위에 누우며
저희 신전에 벌금으로 얻은 포도주를 마신다(아모 2, 6-8).

가난한 자를 짓밟고(아모 8, 4).

흙에 묻혀 사는 천더기의 숨통을 끊고(아모 8, 4).

힘없는 자를 빚돈에 종으로 삼고(아모 8, 6).

미투리 한 켤레 값에 가난한 자를 종으로 부린다(아모 8, 6).

3. 썩은 종교

그렇다면 이러한 불륜의 사회를 무엇으로 유지하려고 하나? 폭력과 병행하는 중요한 무기가 바로 '종교'인 것이다. 종교는 신성한 것이다. 그것이 썩으면 가장 추악한 것이 되고 만다. 그런데 그것이 썩는 과정은 그것이 기득권자와 유착하는 경우이다. 그러므로 자신의 설 자리를 잃어버리는 것이다. 집권자들은 예외없이 종교를 정권 유지의 수단으로 이용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그 종교로 민의 정신을 흐리게 하는 것이다. 그 길은 그 종교를 재물욕이나 성적인 것과 유착시켜 욕심에 의한 환상에 빠지게 하거나, 아니면 피안화함으로 현장에서 체념하게 하는 것이다. 이렇게 신비적 환상에 파묻히거나 피안적 체념에 나약해지면 현실을 보는 눈이 흐려진다. 아모스 시대의 종교는, 사회는 타락했는데 그 제의는 화려하고 융숭했다. 그러므로 아모스는 모든 종교행사를 신의 이름으로 거부한다.

너희의 순례절이 싫어 나는 얼굴을 돌린다.
축제 때마다 바치는 분향제 냄새가 역겹구나.
너희가 바치는 번제물과 곡식 제물이 나는 조금도 달갑지 않다.
친교 제물로 바치는 살진 제물은 보기도 싫다.
거들떠 보기도 싫다.
그 시끄러운 노랫소리를 집어치워라
거문고 가락 귀찮다(아모 5, 21- 23).

주목할 것은 위에서 보여준 저들의 타락한 삶과 이같은 종교 행위 사이에 아무런 모순 없이 진행된다는 사실이다. 이것은 피안과 차 안 일상생활과 종교 행위를 분리시키고 종교는 통치 수단으로 이용 되고 있다는 사실이다. 이것은 정교 분리를 주장하므로 삶을 이차원으로 갈라놓는 것과 같다. 그것은 정치(권력)가 종교에서 자유하자는 것이요. 종교는 정치권력에 관여하지 말라는 것이다. 바로 이러한 주장을 앞세우는 것이 정교를 밀착시킨 상부층이 쓰는 상투수단이다. 당시의 왕 여로보암과 당시의 사제 아마지야가 일치되어 아모스를 대항한 것은 바로 그러한 정-교 밀착을 폭로 하는 것이다. 그런 사제(종교인)는 신보다 권력자를 섬기는 것이 그 본직이다.

4. 민중 아모스

그런데 아모스는 누군가? 그는 어떻게 그 시대의 아들로서 그것에 물들거나 체념하지 않고 전혀 다른 인식을 하며 생명을 내걸고 투쟁할 수 있었는가? 그는 "성문 앞에서 시비를 올바로 가리는 사람을 미워하고 바른 말하는 사람들을 싫어하는" 풍토를 잘 알며 생명의 위협을 모르는 바가 아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가 분연히 일어설 수 있었던 것은 바로 그가 민중의 대표이기 때문이다.

아모스의 비판과 저항에 대해 권력편에서 대변자 역할을 하는 사제 아마지야가 추방명령을 내리면서 다른 지역에(유대 지방) 가서 직업적 예언자 노릇이나 하면서 밥이나 얻어먹으라고 했을 때 아모스는 자신의 위치를 밝힌다. 그는 예언자가 아니다. 예언자란 본래 직업일 수 없다. 그런데 이스라엘 사회에 예언자를 직업적으로 양성하는 제도가 있었다. 이런 경우에는 종교귀족이나 왕권에 의해 인정된 자들이다. 그런데 아모스는 그 어느 경우도 아니다. 그렇다고 예언자 군에 의해 인정받은 자도 아니다. 그는 어떤 자격을 밖으로부터 인정 받았거나 받으려고도 하지 않는 자이다. 그는 한 농민일 따름이다. 한편 양을 치는 목동이요 한편 무화과 나무를 가꾸는 농부였다. 그렇다면 아모스의 이같은 행위는 기존체제에서 설 자리가 없는 것이다.

세상의 지배자는 질서를 강조한다. 질서는 의무와 권리를 분리시키는 것이다. 그것이 기능화의 길이다. 모두 자기 분야에만 몰두하고 다른 데 시선을 돌리지 못하게 하는 것이다. 그런 상태는 지배자가 통치하기에 편하게 한다. 까닭은 그렇게 하므로 국민 각자가 자루에 담긴 모래알처럼 되어 힘을 못쓰게 되기 때문이다. 농민은 농사에만 종교인은 그것에 알맞는 자격을 갖고 그것에만… 그런데 아모스는 일개 농부이면서 정치나 사회 문제에 간여하는데 그것 자체가 사회질서를 문란하게 하는 것이기 때문에 위정자는 그를 용인해서는 안 되는 것이다.

아모스는 기존 체제에서 주는 어떤 자격도 없음을 고백한다. 그는 일개 농민 즉 기층 민중에 불과하다. 그는 피해자다. 바로 그렇기 때문에 그 사회를 보는 눈이 그렇게 밝고 불굴의 투지로 돌격할 수 있는 것이다. 그렇다고 피해자면 다 용감한 것은 아니다. 아모스는 그가 간직한 중요한 비밀을 말한다: "나는 양떼를 몰고 다니다가 야훼께 잡힌 사람이다. 주님은 나에게 명하셨다. 가라! 내 백성 이스라엘에게 '선포'하라!"(아모 7.14-15)

하느님에게 사로잡힌 이! 제 갈길을 급선회해야 한 아모스! 한 농부에게 어떻게 이런 일이 일어날 수 있을까? 그는 직업적 예언자도 아니며 사제계층도 아닌데, 누가 그의 위상에 반하는 행동을 명하는가? 이것은 기존 체제에서 주어질 수는 없는 것이다. 이것은 그 자신에게 반하는 일이며 그러므로 혁명적 전환이다. 신이 그랬다고 하는가? 그러나 그 신은 왕 여로보암도 그리고 어용사제 아마지야도 섬기는 신이다. 아니, 그들의 지휘 밑에 그 땅의 상류층이 풍성한 제물로 섬기는 신이다. 그런데 어떻게 아모스가 마치 그 신을 독점이라도 한 듯이 그렇게 대담하게 바로 그 신의 이름으로 자신들의 자리와 체제를 정당화하는 자신들에게 정면 대결할 수 있나? 그것은 그가 민중이며 민중의 편에 섰기 때문이다. 세상이야 어떻게 되든 그런 일에 종사하는 이들에게 맡기고 양이나 치면 되는 그의 길을 급전환시킨 것은 바로 그 민중의 아우성. 그 원한의 소리다.

그런 경우는 그의 이전 선구자들에게도 있었다. 모세라는 목동이 초야에 조용히 묻혀 살 때 느닷없이 벼락이 그에게 떨어진 것이다. 나무에 불붙는 환상을 보았다는 것은 어쩌면 그의 가슴에 점화된 불인지 모른다 망각했던 이집트 안의 자기 민족의 비명 소리가 들린 것이다. 그 비명소리와 하느님의 가라는 명령은 동시적인 것이었다. 바로 이런 일이 그에게 일어난 것이다. 그것은 해도 안해도 되는 그런 일이 아니었다. 내일이나 모레로 미뤄도 되는 그런 일이 아니었다.

성안에서 비상 나팔이 울리는데
놀라지 않는 자 있겠느냐?
사자가 으르렁거리는데
겁내지 않는 자 있겠느냐?
주 야훼께서 말씀하시는데
그 말씀 전하지 않는 자 있겠느냐?

그는 민중의 함성에 놀란 것이다. 그것은 사자후 그것이었다. 그 뜻에 순응하지 않으면 그 자신이 그 이빨에 찢겨 죽을 수 있는 그런 절박한 것이다. 그러므로 그는 기존 체제 내에서 그가 설 자리인지 아닌지를 물을 겨를도 없었다.

민중봉기란 바로 이런 것이 아니겠는가? 그것은 여유있는, 재보면서, 자격을 갖추고 전략을 짜서 일어나는 것이 아니지. 그러니까 그것이 바로 혁명에로 이르거나 아니면 참패로 끝나게 되지. 아모스의 거동은 바로 그런 것이다. 그는 행동만을 앞에 둔 자, 그런 뜻에서 사로잡힌 자이다.

5. 그의 전략

이 마당에 그는 물질적 번영과 외적 평온을 거부하는 데서 그의 일을 출발했다. 그러므로 그는 저들이 담보로 삼는 것을 모두 부정한다. 부강해서 고래등같은 집을 지어 그것이 영원히 계속될 듯 안심하고 성벽을 쌓고 궁궐을 중심한 권력을 믿고 베델 성전 등의 보호를 믿으나 그런 것이 모두 파괴되어야 한다. 아니 그들이 선택받은 이스라엘이라는 특권의식을 박탈해야 한다.

그것이 바로 심판이다. 자기 삶의 보장으로 삼는 모든 것이 분쇄되어야 한다. 그러므로 아모스는 위정자에게 나라를 망치는 역적으로 치부된 것이다.

그러나 그의 입장은 분명하다. 그것은 거짓 평화. 거짓 종교보다 앞서야하는 것은 바로 정의를 날카롭게 수립하는 일이다. "정의가 강같이 흐르게 해라!"(아모 5, 24) 이것이 없는 평화는 기만인 것이다. 정의가 무엇인가? 아모스는 바로 풍성한 제물로 화려하게 거행하는 모든 제사를 거부하면서 바로 정의를 강같이 흐르게 하라고 한다. 그것은 바로 위장된 평화를 유지하기 위한 허위이기 때문이다. 정의란 "서로 위하는 미읍이 넘쳐 흐르는 것이다"(아모 5, 24). 그러므로 그는 상류 계급의 작태를 그토록 성토하는 것이다. 부의 편중이 반정의다. 그로 인해 계급 사이에 담장이 높아지고 분열이 온다.

마침내 아모스는 극단의 선언을 한다. 그것은 이런 세상은 아주 없어져야 한다는 것이다. 어떤 미봉책도 안되며 연명할 길. 살아남을 돌출구를 제공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구원의 길은 차단되야 한다. 희망의 줄은 단절되어야 한다. 그러므로 그는 '불구원'(Unheil)의 예언자 반열에 끼게 된 것이다. 이것은 그의 나라 사랑이 절망과 분노로 둔갑했기 때문이다.

6. 정의 수립은 통일에의 길

그런데 우리가 주목해야 할 큰 대목이 있다. 그것은 그가 유대지방(나라) 사람이면서 왜 북국 이스라엘에 와서 이같은 피나는 활동을 했나 하는 사실이다.

3장 2절에 이스라엘에 대한 중대한 전제가 있다. 하느님이 "세상 많은 민족 가운데 이스라엘만을 골라냈다"는 사실이다. 그런데 그는 분열된 이스라엘이 아니라 분열 이전의 이스라엘을 말한다. 1) 이스라엘을 야곱의 후예로 본다든지 2) 이집트에서 탈출한 이스라엘이라는 것을 밝히며 3) 광야 40년을 언급하는 것이 그렇다. 모두 분단 이전의 이야기이다.

모든 예언자들이 그랬듯이 아모스도 모든 불의의 원흉을 분단 상황으로 판단했을 것이다. 북이스라엘이 통일 이스라엘의 정통성을 갖고 있다. 그것이 하삐루(기층 민중)에 의해 세워진 종족 공동체의 본산이며 적어도 200년 동안 "오직 야훼만"이라는 기치를 들어 밖으로 군주제국과 대결하며 안으로 군주국(군국주의)을 만들려는 유혹과 싸웠다. 그것은 민에 의해 이룩된 진정한 민주사회였던 것이다. 그런데 다윗이 유대지방을 거점으로 이스라엘을 공략해서 이스라엘 군주국을 세운 것이다. 통일 이스라엘국이 형성된 것은 강대국을 이루 는데 큰 전진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다윗 왕조는 통치 정책으로 분열 정책을 쓴 것이다. 그것은 솔로몬에 와서 극에 달했다. 그는 점차 종교할 것 없이 모든 고급관료는 유대지방 사람들만 채용하고 북이스라엘 전통을 철저히 봉쇄한 것이다. 이렇게 해서 마침내 남북은 분단국의 비운에 빠지고 만 것이다. 분단 200여 년 남과 북의 어느 하나도 독립국의 구실을 못하고 계속되는 외세의 침범 아래서 반 식민지 생활을 해야 했는데도 지배층은 오히려 그 분단 아래서 얻은 부귀영화에 도취하고 있는 것이다. 놀랍게도 지배층에게는 통일에의 노력도 없었다. 아모스가 유대지방 사람이면서 북이스라엘 중심에 가서 정의를 주장하며 왕후장상들 앞에서 최후심판을 경고하면서 예언자 활동을 맹렬하게 편 것이 이러한 시각에서 볼 때 의미심장하다. 사실상 그같은 잔인할 정도의 저주를 퍼붓고 어떤 몸부림을 쳐도 멸망을 피할 길이 없으리라는 그의 마지막 말은 다음과 같다.

그날이 오면
내가 부서진 다윗의 초막을 일으키리라
틈이 벌어진 성벽을 수축하고
허물어진 터를 다시 세워
옛 모습을 되찾아 주리라
에돔에 남은 백성뿐 아니라
내 백성이라는 칭호를 받을 모든 민족 위에
군림하게 하리라
……
산에서는 햇 포도주가 흘러내리고
언덕마다 무르익은 곡식이 물결치리라
내 백성 이스라엘의 국운을 이렇게 회복시켜주면
저들은 쑥밭이 된 성읍들을 다시 일으켜 그 안에 살며
제 손으로 심은 포도에서 술을 짜 마시고
제 손으로 가꾼 과수원에서 과일을 따먹게 되리라
……
너희의 하느님 야훼의 말씀이시다(아모 9.11-15).

그는 통일된 내일을 예고한다. 그것은 다 무너진 다음에 세워질 나라 왕후장상이 허물어진 궁전을 짓거나 종교귀족들이 성전을 짓는 것이 아니라 "제손으로 심은 포도에서 술을 짜마시고 제 손으로 가꾼 과수원에서 과일을 따먹게 될" 그런 새 날 즉 민중의 날을 내다본다.


List of Articles
바알 (열상 19, 18)
남은 칠천 명 (19, 7-18)
민중의 손으로 통일되는 날 (아모 9, 11-15)
겨울은 가고 (에제 37장)
에제키엘이 무등산에서 절규한다 (에제 24, 6-8)
포로에서의 탈출 (이사 66, 1-8)
위정자와의 대결 (이사 7, 10-14)
   
제5부 새로운 존재
일상성과 비일상성 (루가 10, 38-42)
그래도 다시 낙원에로 환원시키지 않았다 (창세 3, 1-10)
새로운 인간상 (창세 12, 1-9)
믿음의 조상 (창세 22, 17-18)
두 사이 에 손을 얹을 판결자 (욥기 9, 25-35)
하느님으로부터의 도피 (시편 139편)
하느님의 웃음 (시편 2편)
잠과 신앙 (시편 127편)
교회란 무엇인가 (로마 8, 9-30)
인간을 말한다 (마르 12, 28-34)
존재 근거 (시편 42편)
우주의 품으로 (시편 8,3 이하)
   
판권
표지
예수의 민중사건 : 『민중과 성서』를 내면서
   
제1부 복음서와 민중
   
예수와 민중 : 마르코복음을 중심으로
    1. 전제
    2. 마르코복음 안의 오클로스
    3. 마르코복음에 나타난 오클로스의 성격
        1) 오클로스의 성격
        2) 오클로스에 대한 예수의 행태
        3) 종합
    4. 예수를 따른 자들
    5. 마르코복음 안에 있는 어록
    6. 오클로스의 언어학적 의미
        1) 라오스와 오클로스
        2) 오클로스와 암 하 아레츠
    7. 종합
마르코복음에서 본 역사의 주체
    1. 전제
    2. 마르코의 삶의 자리
    3. 마르코의 민중신학의 기조
        1) 세례자 요한이 잡힌 후(14a절)
        2) 갈릴래아로 가다
        3) 하느님 나라의 도래 선포
    4. 민중의 행태
예수사건의 전승 모체
    1. 문제 제기
    2. 케리그마의 성격
        1) 고린토전서 15장 3~8절
        2) 필립비서 2장 6~11절
        3) 사도행전에 나타난 케리그마
    3. 민중언어의 성격
    4. 수난사
    5. 예수의 행태 일반
        1) 기적 이야기와 예수의 행태
        2) 아포프테그마와 예수의 행태
        3) 로기온(Logion, 어록)과 예수의 행태
    6. 결론
가난한 자 : 루가의 민중 이해
    1. 가난한 자
        1) 통계적 고찰
        2) 루가의 특수자료
        3) 예수의 탄생설화와 나자렛 선언
        4) 마르코와 Q자료
    2. 루가복음서의 청중
    3. 결론
마태오의 민중적 민족주의
    1. 문제 제기
        1) 마태오의 신학적 주제에 대한 논의들
        2) 문제 제기
    2. 마태오가 처한 현실
        1) 마태오와 그의 시기
        2) 민족적 와해 위기
    3. 마태오의 현실인식
        1) 이스라엘 : 길 잃은 양들
        2) 길 잃은 양이 놓여 있는 현실
    4. 민족동일성 재확립
        1) 뿌리 찾기
        2) 바리사이파가 주도하는 라삐 유다교와의 대결
    5. 마태오의 민중 이해
        1) 언어적 성격
        2) 의식화된 민중
    6. 맺는 말
민중신학의 성서적 근거 : 마르코복음을 중심으로
    1. 예수사건의 재발견
    2. 마르코복음과 민중
    3. 민중은 수단이 아니다
    4. 민중은 객체일 수 없다
    5. 십자가는 민중수난의 극치다
민중신학의 어제와 오늘
    1. 독재와 대항하므로
    2. 민중을 만나므로
    3. 민중과 더불어
   
제2부 민중운동사
   
민중사건과 언어사건
    1. 성서에서 본 말의 성격
        1) 그 말의 현장은 어떤 것이었나
        2) 예수의 경우
        3) 예수사건에 관한 전승
        4) 오순절의 말 사건
    2. 무엇으로 말하는 것인가
    3. 해야 할 말은 무엇인가
    4. 우리가 해야 할 말
미래는 가난한 자의 것 : 루가 6장 20~26절
    1. 축복과 저주
    2. 가난한 자와 부요한 자
    3. ‘지금’과 ‘장차’
    4. 우리의 선택
나라가 임하옵소서
    1. 예수의 기도
    2. 그의 기도를 전달받은 자들
    3. 하느님의 나라
고향 잃은 민중
    1. 피난민
    2. 성서에서 본 피난민문제
    3. 게르(GER) 문제 해결의 시도
    4. 이방인에 대한 관용의 한계
    5. 당면한 과제
        1 ) 새로운 인식을 위한 운동
        2) 실천에 대한 몇 가지 제언
이스라엘 민중사
    1. 머리말
    2. 출애굽
    3. 고대 이스라엘 종족동맹
    4. 민중을 배반하고 세워진 왕권
    5. 분단시대의 고난
    6. 민중운동의 여러 계열
    7. 예수의 민중운동
    8. 맺는 말
   
제3부 민중과 체제
   
민중사실의 증언
    1. 민중신학의 전제들
    2. 민중사실의 증언
고난과 고백
    1. 수난자와의 일치
    2. 마르코의 민중
    3. 수난사와 고난
    4. 더불어의 고난
    5. 맺는 말
갈릴래아 민중에 항복한 바울로
    1. 바울로의 위치
    2. 사울은 어떤 사람인가
    3. 그리스도교 박해
    4. 예수를 만남
    5. 전향
    6. 맺는 말
소명(召命)
    1. 바울로의 소명
    2. 사도 됨과 소명
    3. 이방인에게로
바울로와 역사의 예수 I
    1. 머리말
    2. 예수에 대한 바울로의 말
    3. 예수냐 바울로냐
    4. 왜 예수가 아니고 케리그마인가
선택받은 민중: 고린토전서 1장 26~31절
    1. 고린토교회 구성원의 사회계층
    2. 공동체원의 가치 판단 기준
    3. 민중을 보는 눈
    4. 택함을 받은 민중
   
제4부 예수의 희망
   
하늘도 땅도 공(公)이다
    1. 낙원 이야기
    2. 아담一인간
    3. 실락원은 공을 사유화함으로
갈릴래아에서 만나자: 마르코 16장 1~8절
    1. 제3의 자리
    2. 갈릴래아
    3. 갈릴래아에서 만나자
예수의 희망
    1. 새 세계에의 희망
    2. 희망과 세계혁명
    3. 바른 인간공동체의 희망
    4. 맺는 말
   
판권
표지
예수는 논하지 않았다
   
제1부 민중의 언어, 이야기
   
1. 성서라는 책의 성격
2. 성서의 서술양식
    1) 구약성서
    2) 신약성서
    3) 민중언어
   
제2부 예수의 이야기(비유)
   
1. 만성병에 걸린 세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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