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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제키엘이 무등산에서 절규한다
—광주학살사건 10주년에 부쳐
에제 24, 6-8
 
1

카알라일은 그의 마호메트 평전에서 마호메트의 위대한 면의 하나는 그가 참으로 분노할 줄 아는 사람이었다고 말했다. 우리 민족은 이러한 카알라일의 시선에 어떻게 보일까? 이 민족이 분노할 줄 아는 민족인가? 정말 분노할 줄 아는 민족이라면 어떻게 이같이 오랜 치욕의 역사를 거듭해 왔으며, 특별히 광주의 그 처참한 사건을 묻어 둔 채 10년이란 세월을 흘려 보냈을까! 중학생 이상이면 현실로서 체험한 그 끔찍한 사건, 그 사건에 직접 휘말려 희생당한 비명과 같은 호소가 글로 육성으로 화보로 계속 절규되었지만, 이 민족은 분노할 줄을 모른다.

광주학살의 원흉은 지금도 살아 백담사에서 수백 명 호위병의 보호를 받으며 급조된 불자(佛子)의 연극으로 국민을 희롱하고 있어도 그를 끌어내어 민의 분노 앞에서 무릎을 꿇고 자기의 죄를 토로하게 하려는 결의도 보이지 않고 있다. 광주특위를 통해서 광주사건이 정말 지난 일이 아니며 오늘 우리가 사는 현장에서 일어났을 뿐 아니라 그토록 잔인무도하게 감행된 것을 계속 듣고 목도했는데도 낭만적인 눈물방울은 볼 수 있었어도 민족적 분노는 나타나지 않았다. 더욱이 바로 그 현장에서 총칼을 휘두른 민족을 향한 강도떼들이 사실을 그대로 드러낸 고발 앞에서도 천연스럽게 거짓말을 연속하고, 마침내는 그 현장에서 일어난 사건을 책임지려는 놈은 하나도 없는 이런 어처구니없는, 너무도 어처구니없는 현실을 목도했는데도 왜 이 민족은 분노할 줄 모르는가!

바로 그 살인마와 그 집단이 8년 동안을 권좌에 앉아 온갖 잔악한 짓과 추행을 저질렀으며, 그 하수인들이 뒤를 이어 꼭 같은 이름으로 민에 군림하면서 역사의 진실을 폭력으로 짓밟는데도 이 민족은 그들에게 재집권의 길을 열어 주었는가 하면, 바로 그 현장 지휘자를 압도적인 지지표로 국회에 진출시키고 …

말이 안 된다. 말이 안돼. 오죽 그가 민을 깔보았으면 일부 민의 증오심을 희석시키기 위해 공직에서 후퇴시켰는데 또다시 그 자리를 되찾기 위해 국회보궐선거에 재선될 것을 자신하고 덤벼들었을까! 광주의 비극은 전라도에서 일어났으니 대구 사람은 이것과 무관하다는 발상인가? 적어도 그 장본인은 자신이 출마하는 지역의 사람들에게 의분 따위는 없다고 확신했음이 틀림없다.

큰일났다. 정말 이 민족에게 큰일이 났다. 그 꼴이 그 전부라면 그 미래는 암담하지 않나! 수천 년 밖으로, 안으로 너무도 계속 억눌려 살았기 때문에 체념이라는 죽음에 이르는 중병에 걸린 것이다. 역사소설로 기록된 한국의 저항사 따위를 읽으면 턱없는 과장으로밖에 생각되지 않는다. 30년 이래로의 군국주의가 참으로 저주스럽다. 이렇게도 문약(文弱)한 민족으로 만들어 버린 이조의 죄과에 대해서도 참을 수가 없다.

만일 우리가 방금 일어난 광주의 처참한 학살사건을 이런 식으로 흐지부지 넘겨 버린다면, 민이 과거에 연속적으로 패배한 역사의 이유를 딴 데서 구할 아무 이유도 없고, 또 앞으로 계속될 꼭 같은 강도때들에 의한 봉변을 피할 수 있다는 보장도 전혀 받을 수 없다.

"오늘은 꽃잎으로 누울지라도"를 쓴 김희수는 광주를 "대대로 역사 밖으로 따돌려 누천년 버려진 노여움의 땅"이라고 했다.

노여움의 땅 광주!

분노의 땅 광주!

그 분노가 광주를 넘어서 이 민족 전체의 분노가 되지 않는 한 … 우리에게는 새 세상 만들 가능성이 없다.

2

김준태는 "하느님도 새떼들도 / 떠나가 버린 광주에"라고 애도한다. 예수가 죽을 때 하느님은 없었지. 새떼들도 다 날아가 버렸는지 몰라. 죽음이 있는 곳에는 까마귀가 모인다는데 예수의 죽음의 현장에 까마귀가 모여들었다는 서술은 없어. 어쩌면 광주도 그랬는지 모르지.

엘리 위젤의 소설 『캄캄한 밤』에는 나치의 강제수용소에서 죽음을 기다리던 유태인들 몇이 나무틀에 매달린 채 찔리고 매맞아 죽어 가는 순간, 그 장면을 보도록 강요당한 동료 중 한 사람이 "하느님은 어디 갔어, 하느님은?"라고 귓속말처럼 주절거릴 때 바로 그 곁에 선 사람이 "하느님은 저렇게 매달려 찔리고 맞으며 비명을 지르면서 죽어가고 있잖아"라고 대답하는 이야기가 있다. 예수가 십자가에 매달려 피를 흘리며 죽어 갈 때 구경꾼 중의 일부가 "하느님이 내려와 저를 구해 주나 보자"고 했는데, 그런 하느님은 영영 나타나지 않았다. 하느님은 그를 떠나 저 멀고 먼 피안으로 가버렸나? 아니면 저 유태인의 고백처럼 피흘리며 패배의 죽음을 감수하는 바로 그 사람으로 둔갑했었나? 만약 이런 생각을 광주학살 현장에 편다면 하느님은 새들과 더불어 떠난 것이 아니라, 바로 저 군화에 짓밟히고 총칼에 찔리고 죽은 개처럼 한 다리를 아스팔트 위로 끌고 가는 곳, 아니 돌아오지 않는 남편을 기다리기 위해 문 밖에 나갔다가 끌려가 만삭된 아기와 더불어 총검에 찔려 쓰러진 바로 거기 있었겠지.

광주학살 현장에는 "해는 잠시 빛났다가 부끄러워 제풀에 겨워 힘없이 굴러떨어지고, 가로수 은행잎도 창백하게 놀라 떨어졌다"고 하는데 예수의 사건에서 분노는 고사하고 두려움 속에서 체념에 빠져든 그의 제자들이 태양도 빛을 잃어 온 땅에 어두움이 덮인 것을 경험했고, 예수의 운명의 절규와 더불어 절대권력의 뒷받침으로 가리워진 성전 휘장이 위에서 아래까지 두 폭으로 짝 찢어지는 것을 보았다고 한다

예수를 죽음으로 넘긴 하수인은 로마제국의 앞잡이들이고, 그를 죽음에까지 몰고 간 것은 로마제국주의자들이었듯이 광주학살은 미제국주의자들의 꼭둑각시에 의해서 저질러진 사건이다. 로마제국과 그 꼭둑각시들이 저지르는 억압과 착취에 분노한 많은 집단들이 갈릴래아를 중심으로 하여 끊임없는 도전을 시도할 때, 손에 창끝 하나 들지 않고 민중운동을 일으킨 예수를 골라서 희생의 제물을 삼았듯이, 전 민족을 도적질하는 강도떼에 분노하여 수많은 군중이 서울을 위시해서 궐기했는데도 광주시민을 학살의 대상으로 선정한 것도 예수의 경우와 같고, 명분도 정당한 재판과정도 없이 예수를 십자가에 정치범으로 처형했는데 광주시민 역시 예수와 꼭 같은 대우를 받아 빨갱이라는 이름을 쓰고 피를 쏟았다. 나는 여기서 광주의 수난사와 예수의 수난사를 잇는 맥을 본다

해방 이후만 해도 얼마나 비참한 학살의 역사가 계속되었던가. 남자의 씨를 말렸다는 제주도의 학살에서부터 시작하여 거창, 여수, 순천, 지리산, 태백산, 419, 광주의 학살사건도 바로 이런 역사에 연계되어 있는 것이다. 죄목으로 빨갱이라는 페인트 칠한 내부에 면면히 흐르고 있는 이 민족의 분노가 섞인 염원, 그것이 이루어지지 않아 궐기하며 또 그것을 막기 위하여 학살을 한 역사.

어찌 해방 후에 점철된 이 수난사가 이 민족사에 국한되리오. 예수의 수난이 한 개인의 수난이 아니었듯이 이 민족의 수난, 그중에서도 광주의 비극이 세계사에서 유리된 우리만의 문제라고는 결코 생각할 수 없다. 예수의 죽음이 그 당시에 이름 없이 죽어 간 수많은 민중의 죽음을 죽은 것이며, 그 가해자는 언제나 권력과 종교가 야합한 집단들이었던 것처럼, 서구의 역사에서 권력이 바로 그렇게 죽은 예수의 이름을 등에 업고 그 민중의 학살을 계속하더니, 마침내는 삽시간에 6백만이라는 민중을 학살하는 광기를 부렸다. 누가 이토록 민중을 학살하는가? 누가 그렇게 많은 유태인들을 단숨에 죽여 버렸나. 히틀러 개인이? 천만에, 독일 민족이?

아니다. 아니다! 기독교의 이름을 훔친 백인이라는 강도떼들이 함께 학살한 것이다. 히틀러는 저 백인들의 반셈주의를 잘 알았고 그것을 최대한으로 이용한 것이다. 백인들은 그 혹심을 드러내어 독일 영역을 떠난 유태인들의 입국을 모두 거부한 것이다. 이처럼 백인들의 증오 속에 죽어간 저 유태인들의 죽음과 광주시민의 죽음은 결코 무관하지 않다.

유태인을 그렇게 학살한 후예들이 그 학살지시 총사령부가 있던 베를린에서 교회의 날(Kirchentag)을 찾아 수십만의 젊은이들이 모인 1989년 4월 어느 날 밤, 모든 젊은 그룹들이 구석구석에서 축제로 광란하는 한가운데 십여 개의 촛불을 비치는 몇 사람들이 말없이 무엇인가 호소하는 듯해 접근했더니 베를린에 유학 온 몇 사람 안 되는 중국 유학생들이 한문으로 독어로 천안문 학살 사건을 애도하며 그 만행을 호소하고 있었다. 누가 누구에게 이 민중들의 한을 호소하고 있나! 나는 거기 둘러선 사람 중에 학살당한 유태인 후예들이 서 있으리라는 예감으로 그 유태인, 천안문에서 학살당한 중국인과 더불어 광주의 한풀이도 못한 넋들과 연계시키고 있었다.

3

이스라엘 민족사에서 특이한 것은 예언자군이다. 그중에서도 특별히 자기 민족이 구원을 받을 수 없다는 주장을 반복했기 때문에 "불구원의 예언자"라는 낙인까지 찍힌 예언자들이 이채롭다. 에제키엘이라는 예언자는 그중에서도 가장 이채롭다. 많은 수난을 당하면서도 박해하는 자보다 오히려 피해를 받는 자기 민족의 죄를 심판하고, 이방인에 의해서 학살당한 사건을 저들의 죄에 대한 하느님의 응징이라고 외침으로 자기 민족의 분노를 산 대표적인 예언자다. 그는 결코 추상적인 예언을 한 것이 아니다. 주전 592-570년, 22년간에 걸쳐 예언활동을 했는데 사건들의 연수는 물론 날짜까지 명기할 정도로 구체적인 사건과 그의 예언이 결부되어 있다.

팔레스틴은 바빌론의 잔악한 침략을 당하고 많은 전리품을 노략당하고 사람들은 포로로 잡혀 갔다. 그때의 광경을 에제키엘은 이렇게 묘사한다.

무죄한 피를 흘린 이 망할 도성,
뻘갛게 녹이 슨 솥.
닦아 낼 수 없이 녹이 슬었으니,
그 안에 들어 있는 고기를
한 점 남기지 말고 꺼내어라.
주사위를 던져 골라 낼 것도 없다.
맨바위 위에 뿌려졌다.
흙으로 덮어 버릴 수 있도록 땅에 흘리지도 않았다.
진노하여 그 원수를 갚을 셈으로 내가
덮어 버릴 수 없도록 바위 위에 뿌리게 하였다(에제 24, 6-8).

그때 에제키엘도 포로 중의 한 사람이었다. 그런데 이같은 비참한 사건을 당한 예루살렘, 특히 그중에 남아 있는 지배층은 회개의 결단을 보이지 않고 옛 타락상을 되풀이하고 있었다. 저들은 바빌론의 침략을 받은 책임을 자신들의 잘못으로 돌리지 않고 그들이 믿는 신의 무능의 소치라고 보았다. 그러므로 팔레스틴의 패배는 자기들의 패배이기 전에 야훼신의 패배라는 엉뚱한 발상과 더불어 그 패배의 신을 버리고 저들을 정복한 침략자들이 믿는 자연신인 마르둑이 참신이라는 생각이 유포됐을 뿐만 아니라 그 신을 섬기기에 이른 것이다.

이것은 단순히 폭력에 의한 군사적 패배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정신적 패배를 의미한다. 그것은 단순히 종교를 바꿨다는 해석에 머물 수 있는 것이 아니라, 팔레스틴을 바빌론화함으로 자기를 포기해 버리는 반민족적 변절이다. 에제키엘은 바로 이런 예루살렘을 중심으로 한 팔레스틴은 이미 한없는 고통으로 수난을 당했는데, 그 같은 수난을 통해서 자신들을 유린한 제국주의 세력에 대한 분노는 고사하고 오히려 그 세력에 의존하려는 자세 자체를 결코 용서할 수 없는 것이라고 본 것이다. 바빌론은 다시 팔레스틴을 침략하기 위한 만반의 준비를 갖추고 있었다. 이 사실을 알고 있는 에제키엘은 또다시 피바다가 될 운명 앞에 놓인 예루살렘이 아무런 준비도, 회개도 없는 것을 한탄하면서 바빌론에 의해서 처음보다 더 잔인한 침략과 학살을 당할 것을 예견하고, 그것은 침략자 바빌론 자체의 죄를 추궁하기 이전에 이스라엘 자체의 죄의 결과로서 당연히 와야 할 그 운명적인 심판이라고 단정하고 있다.

그러면 에제키엘은 이렇게 닥칠 운명을 방관하면서 이같은 독설을 일삼는 예언자인가? 만일 그가 하나의 방관자에 그쳤다면 에제키엘서 전체에 흐르고 있는 그의 분노는 생각할 수 없는 것이다. 그는 이런 수난 중에 자기의 사랑하는 아내를 잃었는데 그가 당한 슬픔을 이스라엘이 당한 아픔에 연계한 것은 그가 얼마나 이스라엘이 당할 피할 수 없는 수난에 참여하고 있었나 하는 것을 말하고 있다.

이런 상황에서 에제키엘은 어떤 허구적인 위로를 하거나 새로운 희망을 말하지 않았다. 아니 그는 이스라엘 전체가 자기 죄에 대해 철저히 회개할 것을 칼을 들이대듯 촉구했다. 번제물을 바치되 그것에 묻은 죄악의 때를 영원히 없애기 위해서 "큰 가마에 생물의 사지 전체를 집어넣어 끓이고 또 끓이되 그것을 끓이는 가마에 묻은 더러운 것들이 전부 타버리고 녹이 다 말끔히 가셔지도록 해라. 너는 살같이 사랑하는 자가 네 앞에서 죽어도 가슴을 치면서 눈물 흘리거나 곡할 권리도 없으며 슬퍼할 권리도 없다. 이 말을 하는 나는 내 아내를 순식간에 잃었다. 그러나 나는 내 아내의 죽음을 슬퍼할 권리가 없다는 것을 알고 나와 이 민족의 죄값 때문에 치른 심판으로 감수해야만 했다."

침략을 당해 한없는 피를 흘린 자기 백성의 죄만을 탓하고 침략자 자체에 대해서 침묵하는 그의 말에 이스라엘 민족이 얼마나 분노했을까 언제 자성하여 자기의 죄를 논할 새가 있나. 학살당한 자의 죄를 논하는 것은 거꾸로 보면 침략자의 편에서 그 정당성을 찬양하는 것이 되지 않겠나! 그러나 에제키엘은 옳았다. 자기가 당하는 모든 고통과 비극의 책임을 남에게만 돌리는 한 영원히 외세에 의존할 수밖에 없다.

에제키엘의 눈에서 보면 광주는 큰 죄를 범했다. 긴 역사의 피해자면서도 공동운명체로서 책임을 분담하는 것은 고사하고 한가하게 암투를 계속했고, 한국 안에서 일어나는 모순구조와 광주사건을 배태한 악당들이 도도히 민족의 무대 위에 나섰는데도 그것을 뿌리부터 뽑아 버리려는 투쟁전선에 얼마나 자신을 투신했는가?

무등산을 아무리 노래하면 뭘하나! 영원히 젊은 광주를 말하면 뭘하나! 무등산이 썩어빠진 민족의 기를 누르고 있는 악당들을 소탕할 온 민족의 힘이 되고, 오랜 억눌림 속에서 찌들은 한국의 체념한 넋을 되살려 외세와 한국 안에 기어든 그 앞잡이들을 몰아낼 힘이 됐어야지!

광주, 아니 호남은 이 민족을 위해서 고난의 제물로 선택된 땅인가? 고난은 메시아를 낳는 요람 아닌가? 그렇다면 호남에서 이 민족 전체를 구원하는 새로운 생명의 운동이 일어나야지! 내가 진정으로 다시 나서 내가 흘릴 피가 헛되지 않게 하며, 다시는 이 땅에 광주에서 일어난 사건 같은 것이 일어나지 못하도록 하기 위해서는 에제키엘의 절규를 그 가슴 속으로 받아들여야 한다. 특별한 죄도 없이 남달리 고난의 멍에를 짊어진 것은 전체를 위해서 선택된 증거라는 확신을 가질 것을 요구하는 예언자들의 말을 자기에게 하는 것으로 받아들임으로 광주에서는 이 땅에 퍼질 새로운 생명 운동이 일어나도록 되어야 한다.

마른 땅 겹겹이 스민 피
여기저기 아직도 허공에 떠도는
젊은 넋들 모조리 부활하라.
이제는 어둠의 손 아래 무단히 죽어 가는 것이 아니라
끝까지 빛의 이름으로 정정당당하게 살기 위하여
그대들.
하늘에서 땅에서 물결처럼 어울려 북을 치며
한순간에 부활하라.
드디어 눈에는 눈 이에는 이
발을 구르며
살아생전 매맞고 굶주린 이들
눈을 뜨고 모조리 부활하자.
부활하자.
피의 넋이여!

양성우의 "오월제의 노래"이다.

그렇다! 억울하게 죽은 젊은 넋들이 허공을 떠도는 것이 분명하다. 원한을 풀지 못한 넋들이 정착할 데 없어 한국 땅을 헤메는 한 결코 한국의 평화는 오지 않을 것이다. 이런 사실을 알아챈 한국 민중은 일찍부터 무당이 사제가 되어 그 넋의 한을 풀어 주려고 했으며, 서양에도 교회에서 정기적으로 웅장한 진혼제가 있으며, 위대하다는 많은 예술가들이 배가 고파 보채는 어린애에게 젖을 주어 잠재우 듯 많은 진혼곡을 만들어 억울한 넋을 달래 왔다. 그런데 10년이 지난 오늘까지 광주에서 억울하게 죽어 간 이름도 모르는 사람까지 합하면 그 수를 헤아릴 수 없는 넋이 바로 그 원수들의 지배에서 해방되지 못하고 권력연장에 흥정의 대상이 되고 있으니, 이 민족에게 어떻게 편안한 날이 있으랴!

그러나 양성우의 이 시에서나 내가 접한 오월을 노래한 시들에서 에제키엘이 받은 그 강렬한 체험의 흔적은 보이지 않는다. 그것은 바로 광주에서 흘린 피가 이 민족의 죄악을 대신해 드려진 제물, 그러니까 심판의 사건이라는 철저한 자성과 둘째는 바로 그렇게 고난의 제물로 선택된 것은 이 민족 전체를 살려 내기 위한 생명의 원천이 되기 위함이라는 사고와 그런 신념 말이다.

"이는 이로 눈은 눈으로"만 가지고는 안돼! 그런 정도의 인식을 갖고 부활한다면 이 강산은 복수의 피바다 이상 될 것이 없어. 왜 부활해야 하나, 무엇으로 부활해야 하나. 이 민족 안에 숨어든 모든 악령들을 몰아내고 평화로운 민족공동체를 다시 소생시켜 이 막다른 골목에 선 역사의 지평에서 새로운 빛으로 소생하기 위해서여야지!

김희수의 시집 『오늘은 꽃잎으로 누울지라도』에서 이런 한 구절을 발견할 수 있다.

아아, 남녘은 슬픈 곳
달나라 정복 후의 20세기말
최현대, 그것도 뻘건 대낮의
계획적인 동족 학살이여!
내일은 태양도 곤두박질치며 발광하리라
모든 아집의 산맥은 일시에 무너지리라
그리하여 우리는
나아가자 조국에게 심장 하나 덤쑥 빼주자!
나아가자 조국에게 목숨 하나 불쑥 던지자!

그래 수동적으로 겁탈당한 여인처럼 책임을 남에게만 전가시키거나 주저앉아 울지만 말고 조국에게 심장 하나를 덤쑥 빼주며, 목숨 하나를 불쑥 던지자! 여기에서 우리는 선민의식의 맹아를 찾아볼 수 있다.

4

주전 586년부터 50년 가까이 바빌론 포로생활에 이스라엘 민족은 지칠 대로 지쳐 있었을 것이다. 우리가 그만큼 오랫동안 일제의 압제 밑에서 경험했듯이 식민세력이 민족혼을 없애기 위해 이름을 바꾸고 말을 없애는 등으로 넋없는 민족을 만들려고 한 것처럼, 저들은 바빌론 대제국 밑에서 체념을 하고 거기에 적응해 살기 위해서 자진하여 자기를 포기하려는 사람도 많았을 것이고, 민족혼을 위해 발버둥을 쳐 보나 너무나 큰 힘의 격차 때문에 그 비현실성을 울고 있는 사람도 많았으리라. 하여간 그들과 더불어 사는 에제키엘의 눈에는 그 민족이 모두 시체가 된 지 오래고, 그 시체는 이미 부패할 대로 부패해 앙상한 뼈로 보였던 것 같다.

생존이라도 하려고 자기를 포기한 결과는 결국 성 밖 어떤 광야의 골짜기에 내던져진 뼈들이 되어 완전히 버림받은 상태로 보였던 것 같다. 이런 비애 속에서 에제키엘은 극적인 영감을 받는다. 저들의 생명의 근원인 신이 그를 말라빠진 뼈들이 산재해 있는 죽음의 골짜기로 이끌어 갔다. 그 신은 에제키엘에게 낱낱이 흩어졌던 뼈들에게 힘줄이 이어졌고 살이 붙었으며 그 위에 가죽이 씌워지는 '환상'을 보여 주었다. 무생물이 생물이 된 셈이다. 그러면 그것은 도로 살아난 것인가?

그렇지 않았다. 비록 생물이 되었지만 그것은 움직일 줄 몰랐다. 육체가 형성되어 피가 돌면 산 건가? 에제키엘은 그렇지 않다고 본 것이다. 거기에 루하아(氣), 생기가 주입되어야 비로소 산 것이 된다. 포로로 잡혀가기 전에 이스라엘은 생물이긴 했지만 이런 생명이 없었다. 그러므로 이른바 '죽은' 생물체가 그 모습을 찾는 것이 아니라 새로운 기가 주입된 생명체로 돌아와야만 한다.

루하아. 기(氣). 그것은 생명의 근원이다. 온 우주를 연결시켜 생동하게 하는 생명의 근원이다. 이러한 생기를 받은 그 해골들은 갑자기 서로 연결되면서 살아 움직이기 시작했고, 먹을 것이나 입을 것만 있으면 생존하는 그런 실체가 아니라 뚜렷한 목표를 가진 실체로 부활한 것이다. 저들은 어떤 목표를 향해서 행진하는 군대같은 한 대열을 이루었다.

뚜렷한 목표를 가진 생명체, 한 지역이나 한 민족에게만 국한된 그런 생명체가 아니라 온 우주를 덮은 기운을 가진 생명체, 개체개체가 잃어버린 권리를 되찾는 것으로 만족하는 그런 부활이 아니라, 나 너가 우리가 되어 하나의 뚜렷한 목표를 향해서 행진하는 그런 생명체, 이 집단적 생명체는 일차적으로 잃어버린 본토를 되찾기 위해서 행군하는 그런 생명체였다. 이 때에 에제키엘은 이방세력에 의해서 허물어진 가시적인 민족 혼의 중심인 성전을 중심한 새로운 민족공동체 형성의 환상을 보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이 공동체는 우주를 연결하는 기에 의해서 연결되는 것이기 때문에 잃어버린 권리를 되찾음으로 옛 상태로 복귀하는 것을 목표로 하는 데 그치는 것이 아니라 세계의 구원을 위해서 진출하는 그런 공동체인 것이다.

10년 전에 광주에서 억울하게 죽어 간 수많은 넋들의 뼈는 이미 땅에 묻혀 말라 버렸는가? 그러나 10년 동안 이른바 살아 있다는 광주의 시민들은 살아 있는가? 아니면 기 없는 뼈가 모아지고 핏줄이 생기고 살이 붙은 일종의 생물로 잔존하고 있는가? 그렇지 않다면 지난 10년 동안 그 분노는 어디로 갔나. 총칼에 눌려 억울하게 죽은 넋의 한도 풀어 주지 못하고 겁에 질려 비밀을 지켜 왔다고 치더라도 광주의 학살사건이 국회를 통해 생생하게 고발되고 그 처참한 악마성과 그것이 난도질해서 흘린 피냄새를 재현시킬 때 광주야! 너는 뭘했는가?

더욱이나 학살의 장본인들이 모두 발뺌을 하면서 거짓말을 연발하는 데도 광주시민의 분노는 그 정도밖에 안 됐나. 일부 노래꾼들이 애가나 부르고 1년에 한번씩 오는 5월을 연중행사처럼 기억하는 것으로 살았다고 말할 수 있겠는가! 아니면 호남영역을 별로 못 벗어나는 분노를 넋두리하는 것으로 안위받는 것을 산 증거라고 할 것인가!

아니다, 아니다. 우리는 너희가 생물로 살아나는 것으로 만족하지 않는다. 너희가 해골 골짜기에 흩어진 메마른 뼈들처럼 벌떡 일어나 목적을 가지고 이 민족의 방향을 제시하는 행군사건을 일으키기를 기대한다. 이는 이로 눈은 눈으로 갚는 싸움을 해서 복수의 칼을 뽑아 당시의 악당들을 처단하기 위해서? 아니다. 우리는 잃어버린 광주의 명예회복을 위해서거나 죽은 넋을 위로하기 위한 정도가 아니라 마른 뼈같이 날로 쇠잔해 가고, 자루에 담은 모래알같이 이기주의에 의해서 공동체성을 잃어버려 가고 원수와 불의한 것을 분명히 보면서도 아직 기운을 받지 못해 움직이지 못하는 이 민족에게 너희들 자신이 바로 그 기, 루아하, 그 생명이 되어 이 민족 전체에 기운이 뻗는 부활의 사건을 일으켜 주기를 바라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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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회란 무엇인가 (로마 8, 9-30)
인간을 말한다 (마르 12, 28-34)
존재 근거 (시편 42편)
우주의 품으로 (시편 8,3 이하)
   
판권
표지
예수의 민중사건 : 『민중과 성서』를 내면서
   
제1부 복음서와 민중
   
예수와 민중 : 마르코복음을 중심으로
    1. 전제
    2. 마르코복음 안의 오클로스
    3. 마르코복음에 나타난 오클로스의 성격
        1) 오클로스의 성격
        2) 오클로스에 대한 예수의 행태
        3) 종합
    4. 예수를 따른 자들
    5. 마르코복음 안에 있는 어록
    6. 오클로스의 언어학적 의미
        1) 라오스와 오클로스
        2) 오클로스와 암 하 아레츠
    7. 종합
마르코복음에서 본 역사의 주체
    1. 전제
    2. 마르코의 삶의 자리
    3. 마르코의 민중신학의 기조
        1) 세례자 요한이 잡힌 후(14a절)
        2) 갈릴래아로 가다
        3) 하느님 나라의 도래 선포
    4. 민중의 행태
예수사건의 전승 모체
    1. 문제 제기
    2. 케리그마의 성격
        1) 고린토전서 15장 3~8절
        2) 필립비서 2장 6~11절
        3) 사도행전에 나타난 케리그마
    3. 민중언어의 성격
    4. 수난사
    5. 예수의 행태 일반
        1) 기적 이야기와 예수의 행태
        2) 아포프테그마와 예수의 행태
        3) 로기온(Logion, 어록)과 예수의 행태
    6. 결론
가난한 자 : 루가의 민중 이해
    1. 가난한 자
        1) 통계적 고찰
        2) 루가의 특수자료
        3) 예수의 탄생설화와 나자렛 선언
        4) 마르코와 Q자료
    2. 루가복음서의 청중
    3. 결론
마태오의 민중적 민족주의
    1. 문제 제기
        1) 마태오의 신학적 주제에 대한 논의들
        2) 문제 제기
    2. 마태오가 처한 현실
        1) 마태오와 그의 시기
        2) 민족적 와해 위기
    3. 마태오의 현실인식
        1) 이스라엘 : 길 잃은 양들
        2) 길 잃은 양이 놓여 있는 현실
    4. 민족동일성 재확립
        1) 뿌리 찾기
        2) 바리사이파가 주도하는 라삐 유다교와의 대결
    5. 마태오의 민중 이해
        1) 언어적 성격
        2) 의식화된 민중
    6. 맺는 말
민중신학의 성서적 근거 : 마르코복음을 중심으로
    1. 예수사건의 재발견
    2. 마르코복음과 민중
    3. 민중은 수단이 아니다
    4. 민중은 객체일 수 없다
    5. 십자가는 민중수난의 극치다
민중신학의 어제와 오늘
    1. 독재와 대항하므로
    2. 민중을 만나므로
    3. 민중과 더불어
   
제2부 민중운동사
   
민중사건과 언어사건
    1. 성서에서 본 말의 성격
        1) 그 말의 현장은 어떤 것이었나
        2) 예수의 경우
        3) 예수사건에 관한 전승
        4) 오순절의 말 사건
    2. 무엇으로 말하는 것인가
    3. 해야 할 말은 무엇인가
    4. 우리가 해야 할 말
미래는 가난한 자의 것 : 루가 6장 20~26절
    1. 축복과 저주
    2. 가난한 자와 부요한 자
    3. ‘지금’과 ‘장차’
    4. 우리의 선택
나라가 임하옵소서
    1. 예수의 기도
    2. 그의 기도를 전달받은 자들
    3. 하느님의 나라
고향 잃은 민중
    1. 피난민
    2. 성서에서 본 피난민문제
    3. 게르(GER) 문제 해결의 시도
    4. 이방인에 대한 관용의 한계
    5. 당면한 과제
        1 ) 새로운 인식을 위한 운동
        2) 실천에 대한 몇 가지 제언
이스라엘 민중사
    1. 머리말
    2. 출애굽
    3. 고대 이스라엘 종족동맹
    4. 민중을 배반하고 세워진 왕권
    5. 분단시대의 고난
    6. 민중운동의 여러 계열
    7. 예수의 민중운동
    8. 맺는 말
   
제3부 민중과 체제
   
민중사실의 증언
    1. 민중신학의 전제들
    2. 민중사실의 증언
고난과 고백
    1. 수난자와의 일치
    2. 마르코의 민중
    3. 수난사와 고난
    4. 더불어의 고난
    5. 맺는 말
갈릴래아 민중에 항복한 바울로
    1. 바울로의 위치
    2. 사울은 어떤 사람인가
    3. 그리스도교 박해
    4. 예수를 만남
    5. 전향
    6. 맺는 말
소명(召命)
    1. 바울로의 소명
    2. 사도 됨과 소명
    3. 이방인에게로
바울로와 역사의 예수 I
    1. 머리말
    2. 예수에 대한 바울로의 말
    3. 예수냐 바울로냐
    4. 왜 예수가 아니고 케리그마인가
선택받은 민중: 고린토전서 1장 26~31절
    1. 고린토교회 구성원의 사회계층
    2. 공동체원의 가치 판단 기준
    3. 민중을 보는 눈
    4. 택함을 받은 민중
   
제4부 예수의 희망
   
하늘도 땅도 공(公)이다
    1. 낙원 이야기
    2. 아담一인간
    3. 실락원은 공을 사유화함으로
갈릴래아에서 만나자: 마르코 16장 1~8절
    1. 제3의 자리
    2. 갈릴래아
    3. 갈릴래아에서 만나자
예수의 희망
    1. 새 세계에의 희망
    2. 희망과 세계혁명
    3. 바른 인간공동체의 희망
    4. 맺는 말
   
판권
표지
예수는 논하지 않았다
   
제1부 민중의 언어, 이야기
   
1. 성서라는 책의 성격
2. 성서의 서술양식
    1) 구약성서
    2) 신약성서
    3) 민중언어
   
제2부 예수의 이야기(비유)
   
1. 만성병에 걸린 세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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