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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5부
새로운 존재
일상성과 비일상성
루가 10, 38-42
 
1. 마르타와 마리아

마르타와 마리아, 이 둘은 예수를 생각할 때 잊을 수 없는, 친숙해진 이름이다. 그러나 유다 여인의 이름으로서는 우리에게 '복순이'라는 이름 만큼이나 흔한 것이다. 마리아는 더욱 그러하다.

루가의 특수자료로서 마리아와 마르타의 이야기가 등장한다. 예수가 이 두 여인이 사는 집을 방문한다. 마르타는 주인 역할을 하는 것을 보아 마리아의 언니이다. 그녀는 이른바 활동형이다. 그녀는 예수를 대접하려고 분주하게 일하고 있다. 이에 반해서 그녀의 동생 마리아는 예수의 발치에 앉아 그의 말씀에 도취하고 있다. 그녀는 말 한 마디도 없고 조용하다. 이른바 내성형이다.

그런데 이 집안에 대한 전승이 요한복음에도 있다. 거기에서는 죽었다 살아난 나자로의 자매처럼 서술되어 있으며, 예수를 초대한 동기도 다르다(11-12장). 그런데 마르타와 마리아의 성격이 루가복음의 서술과 상통한다. 나자로가 죽었다는 소문을 듣고 예수는 제자들의 만류를 무릅쓰고(위험의 경고) 그 집을 향해 간다. 그 소식을 듣고 먼저 달려나온 것은 역시 활동형인 마르타다. 그는 예수에게 원망도하고(11, 21), 회의도 하는가 하면(11, 39), 마리아에게 지시도 한다. 잔치를 장만하는 데 주역이 마르타라는 것도 루가복음서의 마르타와 흡사하다. 이에 반해서 마리아는 수동적인 조용한 성격임을 암시한다. 예수가 왔다는 소식을 듣고도 방에 그대로 앉아 있었다(11, 20). 그리고 예수의 발에 말없이 기름을 부은 것도 마리아이다. 그러나 루가는 기름부은 여인을 마리아와 같은 인물로 알고 있지 않으며, 그 이야기는 전혀 다른 맥락 속에 삽입하고 있다(7장). 마르코, 마태오, 그리고 요한복음서에 나타나는 한 여인이 예수의 머리에 기름부은 동기는 예수의 죽음과 관련하여 해석되어 있으나, 루가복음서에는 죄를 받은 죄인이 감사의 표시로써 한 행위로 서술되어 있고, 그 상황도 전혀 다르다.

이상과 같이 복음서들을 대조해 보면 이야기의 전승에 혼선을 빚고 있으나 두 여인의 성격은 비슷하게 부각되어 있다. 마르타는 외향적인데 대해 마리아는 내향적이고, 그 행태에서 보면 마르타는 활동하는 형이요, 마리아는 생각하는 형으로 부각된다.

그런데 예수가 이 두 여인에 대해 평가하는 구절이 있어서, 이 두 여인은 그리스도교 역사에서 오랫동안 사람의 성향이나 행위의 가치기준이 되어왔다. 마르타형과 마리아형으로 이분화되고, 따라서 그것은 이원적 윤리규범의 거점으로까지 되기에 이르렀다.

마르타는 활동형이다. 그는 사회에 봉사하고 참여하는 형이다. 이에 대해 마리아는 말씀을 읽고 명상하고, 기도하는 형이다. 예수는 마리아 편에 섰다. 그래서 삶의 최선의 모델은 마리아적인 것이고 그것이 불가능한 자는 마르타적인 차선의 길을 택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생업에 직접 종사해야 하는 평신도보다는 사제계층이 더 높고 그보다는 수도자들, 수도자 중에도 사회봉사하는 유형보다 일생을 고행 속에 갇혀 명상하고 기구하는 수도자가 더 귀하다는 것이다. 이러한 사고에서 수도원이 늘고 고행주의, 은둔주의가 득세하고, 사회를 세속으로 업신여기는 풍조가 자리를 잡았다. 그러는 동안 그리스도교는 자기 편에서 정교분리을 주창했고, 권력자들은 그것을 재빨리 받아 종교인들을 게토 속에 가두고 불의에로 독주할 수 있는 길을 터놓게 된 것이다. 이 바람이 한국에 까지 불어와서 종교는 제 영역을 지켜야 한다고 경고하고 참 종교는 '마리아'적인 것처럼 규정하는 경향이 생겼다. 그러나 이것은 잘못된 해석에 기인한 결과이다.

성서는 인간을 질(質)로 따지지 않는 것이 그 특징이다. 그리스도교의 본질에 속하는 논의는 희랍적 유산이지 히브리적 유산이 아니다. 이 이야기에 등장한 마리아는 분명히 조용하게 예수의 말씀에 귀를 기울이고 있다. 그러나 그것은 활동의 상반성을 나타내는 것은 아니다. 루가복음서에는 마르타가 여기에만 언급되는데, 마리아는 여기 이외에도 세 번이나 나타난다. 그 세 번 모두 마리아가 이른바 '활동형'으로 서술되지는 않는다. 그러나 말없이 끝까지 결행하는 여인으로 나타난다. 예수와 그 일행의 생활을 뒷받침한 여인군(群)이 있었다고 하는데(이것도 루가에만 있는 전승), 그 중에 마리아가 끼어 있다. 예수가 처형됐을 때 제자들마저 다 도망갔는데 끝끝내 그 죽음을 지켜보고 그의 시체를 둔 장소를 확인한 것도 마리아였으며, 마침내 예수의 무덤을 찾아갔다가 빈 무덤을 목격한 여인군에도 그녀가 끼여 있다. 이 모습은 칼멜 수녀원의 수녀같은 여인은 아닌 것이다.

마르타는 찾아온 예수를 대접하기 위해 분주하다. 활동형이다. 그녀는 예수에게 마리아가 자기 하는 일을 돕지 않는다고 불평할 뿐 아니라, 마리아가 자기 하는 일을 돕도록 지시하라고 한다. 바로 이것이 이른바 '활동형'의 특징이다. 그는 때에 대한 생각없이 '어제처럼 오늘도'의 당위에 매여서 자신만이 아니라 남에게까지 강권하는 것을 자명한 권리로 안다. 나는 이것을 '일상성'(日常性)이라고 부른다. 마르타는 일상성의 상징이다. 일상성의 특징은 자명적이라고 생각되는데 있다.

이에 대해서 마리아의 행위는 정상적이 아니다. 그래서 마르타가 고발하는 것이다. 왜 무슨 권리로 언니가 하는 당연한 일에 가담하지 않고 예수의 발치에 앉아 이야기만 들을 수 있다는 말인가! 이것이 평소의 자세라면 제 구실을 못하는 사람이다. 그런데 예수는 마르타의 고소에 대해서 마리아가 지금하는 일이 옳다고 두둔한 것이다. 그러나 예수는 마리아의 이른바 내향성을 우월하다고 판정한 것이 아니다. 아니 마리아가 '이때'를 알고, 이 때에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를 알고, 그 길을 선택한 것이 잘한 것이라는 말이다. 그것은 바로 '비상'(非常)한 때를 알고 일상성에서 벗어 나고 있다는 점이다.

루가복음서 기자는 예수의 이 방문이 예루살렘에로의 결행, 곧 수난의 도상에서 된 것으로 보도한다. 이로써 이 만남은 일상적인 것이 아니라 비상한 것임을 암시한다. 다시 오지 못할 마지막 방문이다. 마르타는 여느 때와도 같은 또 한번의 방문처럼 알고 자기나름의 준비를 하는데 대해 마리아는 다시 못 올 비상한 만남임을 알기에, 그의 조용함은 내향성의 발로가 아니라 비상한 결행의 표시이다. 마리아는 그러므로 비상성의 상징이다.

2. 일상과 비상

'상'(常)이라는 글자는 아주 상반된 듯한 두 가지 의미를 지니고 있다. 하나는 영구불변하다는 뜻으로서, 상성(常性), 상도(常道)라고 할 때는 온 인류가 가야 할 길을 나타낸다. 그런 측면에서 보면 그것은 영원, 초월 등과도 통한다. 다른 하나는 무성격하고 가치가 없다는 의미로 쓰인다. 그건 상식이라고 할 때 "그 따위야 다 아는 것이다"는 뉘앙스로 쓰여지며 상습하면 "으레히 그러니 놀랄 것 없다"는 뜻으로 쓰여진다. 우리나라에서 양반에 대해서 상인(常人, 쌍놈)이라고 부를 때 멸시의 뜻이 그 속에 담겨 있다. 그러나 이 말의 두면이 정말 다른 것일까? 가령 상식을 예로 들어 보자. "그건 상식이야" 할 때 그 따위 말은 들을 필요도 없다는 뜻도 되지만, 그것은 동시에 누구도 부정할 수 없는 진리라는 뜻이 전제되어 있다. 그래서 우리는 너무도 상식적이라고 해서 깊이 없는 천박성을 나무라기도 하는 반면 상식이 통하지 않는 사회를 통감하기도 한다.

일상성이라고 할 때 먼저 느껴지는 것은 '따분하다'는 것이다. 언제나 누구에게나 반복되는 것, 바로 그런 생활이 역겨워 그것에서 벗어 나려고 안간힘을 다 쓰는 게 요새 사람들의 작태이다. 그런데 이것은 필요불가결의 것이다. 우리가 하루에 세 끼 밥 먹고 똥싸고 자고 깨고 하는 것을 지루해 하지만, 그것은 항상 필요한 공기를 의식 못하는 것처럼, 그것의 불가결성을 잊어버리기 때문이지, 사실 그것은 삶의 바탕이다. 상용하는 것은 지루한 느낌을 주나 반대로 그것에 가장 애착을 갖는게 사람이다. 서양인에게는 빵처럼, 동양사람에게는 밥이 역시 제일이다. 일상이기에, 변화가 없어 멸시받으나 때를 초월해서 늘 필요한 것이 일상적인 것이다.

이에 대해서 '비상'이라는 말이 있다. 이 때는 비상기간 또는 앞으로 몇 년이 비상시기라는 소리를 수 없이 들어 왔으며, 현재에도 비상이 걸린 상태에 살고 있다. 그런데 '비상한 것'이란 무슨 뜻인가? 한문의 뜻으로 보면 '常'이 아니라는 말이다. 위에서 말한 상의 양면에 부쳐보면 역시 두 가지 인상을 준다. 常이 아니라면 임시적이며 기현상이다. 비상이라면 정상이 아니란 말로서 큰 고장이 낫거나 허위적인 것이 판을 치는 경우를 뜻할 수 있다. 비상식적이며 비상도적이라는 말로 받아들일 수 있다. 그러나 반면에 일상적이 아니라 특수한 경우, 그러니까 절호의 기회라고 할 수도 있고 보통 있는 일이 아니기에 비상하다고 하면 위대하다거나 월등 우수하다는 뜻도 된다. 그 사람은 비상한 사람이라고 할 때 그는 흔히 볼 수 있는 사람이 아니라는 것을 가리키듯이! 그런데 이 두 면은 전혀 다른 것일까? 그것 사이에 상통되는 건 없을까?

언어적 사변에서 삶에로 돌아와 보자.

지금 이 글을 쓰는 경우처럼 의식적으로 자기의 생각을 표출하는 경우가 비상적인 자세일까, 비상한 경우일까? 자신에게 물어 봐도 얼른 대답할 수가 없다. 이 글은 낙서는 아니다. 분명히 독자를 의식하고 쓰기 때문에 생각을 집중하고 있다. 이것은 늘 있는 모습은 아니다. 시간을 멍청히 보내는 때가 얼마나 많다고! 그런 측면에서 보면 '비상'한 작태이다. 딴말로 하면 있는 나 그대로가 아니고 긴장하고 있는 다른 나를 드러낸다. 그러나 나는 지금 붓에 마음을 맡기고 이 글을 쓰고 있다. 새삼 이 글을 쓰기 위해서 위장하는 것이 아니라 내게 고인 생각을 표출할 뿐이다. 없는 나를 노출하는 것이 아니라 나의 상식을 그대로 나타낸다. 그렇게 보면 이 글은 일상의 나를 드러낼 따름이다.

요는 일상성, 비상성을 말할 때 그것 자체를 비역사적으로 생각하고 그 비중을 왈가왈부해서는 안 된다는 말이다. "일상적인 것이 언제나 나쁘고 비상한 것은 언제나 좋다"고 해서도 안되고, 또는 그 반대의 것도 옳지 않다고 해서는 안 된다. 그것은 언제나 역사적 맥락에서 평가해야 한다는 말이다.

3. 위기의 극복

마리아와 마르타라는 두 형의 인물을 특징지어 봐서는 우리에게 가르쳐 주는 바가 별로 없다. 그것은 한 삶의 양면이라고 봐야 한다.

마리아도 일상시에는 마르타일 수밖에 없다. 일상이 반복되는 것이라면 부단히 반복하는 일을 해야 한다. 반복이 때로 지루하고 무의미해 보이나 그것 없는 삶은 발전도 없다. 그러나 일상성만 알고 비상성을 모르는 게 마르타다. 마리아는 평소에 마르타일 수 있으나 마르타는 마리아가 되지 못했다. 마르타에게 보족한 한 가지란 바로 이 점이다.

한 민족의 입장에서 보면 마르타적인 국민이 바람직하다. 소처럼 같은 일을 반복해도 지칠 줄 모르는 국민이 많은 민족은 흥할 수밖에 없다. 이런 국민이 한 민족의 전통을 이어 나간다. 그러나 마르타 밖에 될 수 없는 민족은 위기를 의식하지도 못하고 따라서 그것을 극복할 능력도 없다.

예수는 "너희가 땅과 하늘의 가상은 분간할 줄을 알면서 이 때는 분간하지 못하느냐?"(루가 13, 56)고 책망했다. 서쪽에서 구름이 떠 오르면 소나기가 오겠다든지 남풍이 불면 날이 덥겠다고 판단하여 대비할 줄 아는 것이 농민들이다. 그들은 경험의 반복에서 자연의 법칙을 안다. '때'를 분간치 못하면 미련한 것이다. 이 '때'는 물론 자연의 한 순환점을 뜻한 것이 아님은 분명하다.

어느 개인에게나 집단에게나 어느 민족에게나 그런 때가 있다. 그것은 비상의 때이다. 이 때에는 일상성에 만성화된 자신에게서 탈출할 줄 알아야 살아날 수 있다. 일상성은 "이것 없이는 절대로 안 된다"라는 협박으로 사람을 말뚝에 비끌어 맨 소처럼 만드는 마성(魔性)이 있다. 그러기에 일상성에 매인 사람이 스스로 그것에서 해방되기란 쉬운 일이 아니다. 그러나 군인으로 소집영장을 받으면 그런 '절대'는 맥없이 사라지고 만다. 그 많은 '필수'도 전쟁을 당하거나 어떤 참변 앞에는 한갖 아집이었음이 드러난다. 그렇게 외력, 외세 앞에서는 쉽게 포기할 수 있는 것인데도 그것을 스스로 버리지 못하게 하는 것이 일상성이다.

하이데거가 독일 민족성을 농민의 소박, 근면성과 군인의 규율엄수 기질의 복합이라고 한 관찰은 적중한 것으로 보인다. 독일민족에게는 확실히 농민처럼 일상성에 충실하고 군인처럼 질서를 지킬줄 아는 기질이 있다. 그러나 그것 뿐이면 아주 중요한 한 가지가 빠져있는 셈이다. 그것은 바로 '때'에 대한 민감성이다. 그것이 히틀러 같은 사람에 맹종하는 우(愚)를 낳는 이유인지 모른다.

우리에게 지금 비상이 연속되고 있다. 이 비상시를 극복하는 길은 비상한 결단으로만 가능하다. 경제적 계수조정, 정치적 트릭 따위는 마르타적인 일상성의 장난을 넘지 못한다. 비상한 결단이란 지금까지의 모든 일손을 놓고 골똘해지는 행위이다. 무엇인가 먹지 않아도 배고프지 않고, 입지 않고도 추위를 잊을만큼 도취될 수 있어야 한다. 마치 예수의 발치에 말없이 앉아 그의 말씀에 도취돼 있는 마리아 같은 상태 말이다. 우리 국민이 온통 마리아일 수 있는 새로운 바람이 일지 않는 한, 이른바 이 위기를 극복할 길은 없다. 위기를 관리하는 정도로 이 난국을 넘어설 수 있다는 백일몽에서 깨어나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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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정자와의 대결 (이사 7, 10-14)
   
제5부 새로운 존재
일상성과 비일상성 (루가 10, 38-42)
그래도 다시 낙원에로 환원시키지 않았다 (창세 3, 1-10)
새로운 인간상 (창세 12, 1-9)
믿음의 조상 (창세 22, 17-18)
두 사이 에 손을 얹을 판결자 (욥기 9, 25-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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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느님의 웃음 (시편 2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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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을 말한다 (마르 12, 28-34)
존재 근거 (시편 42편)
우주의 품으로 (시편 8,3 이하)
   
판권
표지
예수의 민중사건 : 『민중과 성서』를 내면서
   
제1부 복음서와 민중
   
예수와 민중 : 마르코복음을 중심으로
    1. 전제
    2. 마르코복음 안의 오클로스
    3. 마르코복음에 나타난 오클로스의 성격
        1) 오클로스의 성격
        2) 오클로스에 대한 예수의 행태
        3) 종합
    4. 예수를 따른 자들
    5. 마르코복음 안에 있는 어록
    6. 오클로스의 언어학적 의미
        1) 라오스와 오클로스
        2) 오클로스와 암 하 아레츠
    7. 종합
마르코복음에서 본 역사의 주체
    1. 전제
    2. 마르코의 삶의 자리
    3. 마르코의 민중신학의 기조
        1) 세례자 요한이 잡힌 후(14a절)
        2) 갈릴래아로 가다
        3) 하느님 나라의 도래 선포
    4. 민중의 행태
예수사건의 전승 모체
    1. 문제 제기
    2. 케리그마의 성격
        1) 고린토전서 15장 3~8절
        2) 필립비서 2장 6~11절
        3) 사도행전에 나타난 케리그마
    3. 민중언어의 성격
    4. 수난사
    5. 예수의 행태 일반
        1) 기적 이야기와 예수의 행태
        2) 아포프테그마와 예수의 행태
        3) 로기온(Logion, 어록)과 예수의 행태
    6. 결론
가난한 자 : 루가의 민중 이해
    1. 가난한 자
        1) 통계적 고찰
        2) 루가의 특수자료
        3) 예수의 탄생설화와 나자렛 선언
        4) 마르코와 Q자료
    2. 루가복음서의 청중
    3. 결론
마태오의 민중적 민족주의
    1. 문제 제기
        1) 마태오의 신학적 주제에 대한 논의들
        2) 문제 제기
    2. 마태오가 처한 현실
        1) 마태오와 그의 시기
        2) 민족적 와해 위기
    3. 마태오의 현실인식
        1) 이스라엘 : 길 잃은 양들
        2) 길 잃은 양이 놓여 있는 현실
    4. 민족동일성 재확립
        1) 뿌리 찾기
        2) 바리사이파가 주도하는 라삐 유다교와의 대결
    5. 마태오의 민중 이해
        1) 언어적 성격
        2) 의식화된 민중
    6. 맺는 말
민중신학의 성서적 근거 : 마르코복음을 중심으로
    1. 예수사건의 재발견
    2. 마르코복음과 민중
    3. 민중은 수단이 아니다
    4. 민중은 객체일 수 없다
    5. 십자가는 민중수난의 극치다
민중신학의 어제와 오늘
    1. 독재와 대항하므로
    2. 민중을 만나므로
    3. 민중과 더불어
   
제2부 민중운동사
   
민중사건과 언어사건
    1. 성서에서 본 말의 성격
        1) 그 말의 현장은 어떤 것이었나
        2) 예수의 경우
        3) 예수사건에 관한 전승
        4) 오순절의 말 사건
    2. 무엇으로 말하는 것인가
    3. 해야 할 말은 무엇인가
    4. 우리가 해야 할 말
미래는 가난한 자의 것 : 루가 6장 20~26절
    1. 축복과 저주
    2. 가난한 자와 부요한 자
    3. ‘지금’과 ‘장차’
    4. 우리의 선택
나라가 임하옵소서
    1. 예수의 기도
    2. 그의 기도를 전달받은 자들
    3. 하느님의 나라
고향 잃은 민중
    1. 피난민
    2. 성서에서 본 피난민문제
    3. 게르(GER) 문제 해결의 시도
    4. 이방인에 대한 관용의 한계
    5. 당면한 과제
        1 ) 새로운 인식을 위한 운동
        2) 실천에 대한 몇 가지 제언
이스라엘 민중사
    1. 머리말
    2. 출애굽
    3. 고대 이스라엘 종족동맹
    4. 민중을 배반하고 세워진 왕권
    5. 분단시대의 고난
    6. 민중운동의 여러 계열
    7. 예수의 민중운동
    8. 맺는 말
   
제3부 민중과 체제
   
민중사실의 증언
    1. 민중신학의 전제들
    2. 민중사실의 증언
고난과 고백
    1. 수난자와의 일치
    2. 마르코의 민중
    3. 수난사와 고난
    4. 더불어의 고난
    5. 맺는 말
갈릴래아 민중에 항복한 바울로
    1. 바울로의 위치
    2. 사울은 어떤 사람인가
    3. 그리스도교 박해
    4. 예수를 만남
    5. 전향
    6. 맺는 말
소명(召命)
    1. 바울로의 소명
    2. 사도 됨과 소명
    3. 이방인에게로
바울로와 역사의 예수 I
    1. 머리말
    2. 예수에 대한 바울로의 말
    3. 예수냐 바울로냐
    4. 왜 예수가 아니고 케리그마인가
선택받은 민중: 고린토전서 1장 26~31절
    1. 고린토교회 구성원의 사회계층
    2. 공동체원의 가치 판단 기준
    3. 민중을 보는 눈
    4. 택함을 받은 민중
   
제4부 예수의 희망
   
하늘도 땅도 공(公)이다
    1. 낙원 이야기
    2. 아담一인간
    3. 실락원은 공을 사유화함으로
갈릴래아에서 만나자: 마르코 16장 1~8절
    1. 제3의 자리
    2. 갈릴래아
    3. 갈릴래아에서 만나자
예수의 희망
    1. 새 세계에의 희망
    2. 희망과 세계혁명
    3. 바른 인간공동체의 희망
    4. 맺는 말
   
판권
표지
예수는 논하지 않았다
   
제1부 민중의 언어, 이야기
   
1. 성서라는 책의 성격
2. 성서의 서술양식
    1) 구약성서
    2) 신약성서
    3) 민중언어
   
제2부 예수의 이야기(비유)
   
1. 만성병에 걸린 세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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