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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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믿음의 조상
―아브라함 3
창세 22, 17-18
 
1. 머리말

서구의 문명은 헬레니즘과 헤브라이즘의 틈바구니에서 형성됐다. 만일 서구에 그리스도교를 통한 히브리적 사고가 들어가지 았았던들 동양과 별다른 차이가 없었을지 모른다. 만일 히브리 사상이 서구로 흐르지 않고 인도를 거쳐 동양으로 진출했다면 오늘의 동양은 서구적이고 서양은 동양적이 됐을런지 모른다.

히브리(이스라엘) 사람들이 수천 년 동안 제 땅과 주권을 잃고 세계에 흩어져서 그 곳의 말과 의복을 사용했어도 끝끝내 흡수되거나 조화되지 못하고 언제나 개밥의 도토리처럼 거리끼는 역할을 했다. 이처럼 히브리사상은 비록 희랍적인 사고의 세계에 동거했고 또 그렇게 위장도 했으나 끝끝내 가슴에 박힌 화살이나 가시 같은 역할을 했기 때문에 귀찮은 것이기도 했다. 그로 해서 서양의 '스칸달론'이니 '역설'이니 '변증적'이니 '레지스탕스'니 '불안'이니 '실존'이니 하는 사상이 가능했고 또한 저들을 다이나믹하게 했다.

서구의 도처에서 볼 수 있는 십자가상과 동양의 부처상은 두 종교의 차이를 나타내는 심볼이라기보다 서구와 동양의 성격의 차를 상징한 것으로 보인다. 하나는 모순도 역설도 불안도 없고 조화와 평화, 시간과 영원의 연속 속에 제집에 들어 앉은 것 같이 호수처럼 조용한 인상인데 대해, 다른 하나는 평행이 아니라 교차의 한복판에서 저항, 복종의 틈바구니에서 안간힘을 다 기울이며 피나는 고통을 겪고 있다. 하나는 정, 다른 하나는 동, 하나는 조화, 다른 하나는 대결, 하나는 몰입, 다른 하나는 탈출, 하나는 안좌(安座), 다른 하나는 격돌(激突), 하나는 왕자(양반), 다른 하나는 노동자(쌍놈). 하나는 배부른 자, 하나는 굶주린 자의 모습을 보인다. 만일 히브리 사상이 서구에 들어오지 않았더라면 이같은 대조를 보이지는 않았으리라.

2. 과거에서 탈출하는 아브라함

히브리의 사고를 형성한데 결정적인 역할을 한 것 중의 하나는 아브라함의 상이다. 여기서 그것이 사실적(Historie)인 인물이냐 아니냐의 문제를 규명하려고 하지 않는다. 사실상 구약의 이스라엘사는 본래 출애굽(Exodus)에서 시작됐다. 그렇게 보면 아브라함도 전역사적 인물이다. 또 아브라함 이야기에는 많은 이질적인 요소가 가미됐다. 그러나 그것이 어떻게 형성됐든지 간에 그 아브라함상이 수천 년 동안 이스라엘의 정신을 형성하는데 절대적인 역할을 한 것이다. 히브리 사람들은 그들의 민족사를 이 한 인물에서 읽었고, 이 한 인물의 역사를 그 민족사에서 읽었다. 여기서 저들은 새 역사의 출발을 보았으며 하나의 새로운 인간상을 추구했다. 이 아브라함은 신약에서도 신앙의 조상으로 받아들여 하나의 새로운 인간상으로 정립되었다. 우선 아브라함의 이야기를 그의 실존적 측면에서 스케치해 보자.

아브라함의 삶은 "본토와 친척, 그리고 아비 집을 떠나는 것"으로 시작된다. 즉, 그의 삶은 있던 자리에서의 탈출에서 시작된다. 자기 고향과 부모를 떠난다는 것은 종족 사회에서의 삶의 울타리를 버리는 것을 의미하며 죽음의 위험 속에 자기를 내맡기는 것을 뜻한다. 이것은 단순한 방랑의 길이 아니라 삶을 내 건 모험의 출발이다. 혈연, 지연 등 일체 자연적인 삶의 보장에서의 탈출이다. 이것은 아담의 세계에서의 탈출이라고 볼 수 있다.

아브라함은 아내와 책임져야 할 가솔을 끌고 떠난다. 이것을 불교의 출가와는 다른다. 출가는 집과 함께 책임의 줄까지 끊고 안전지대인 보리수 나무 밑으로 간다. 그러나 아브라함은 과거의 보장의 장소는 탈출하나 거기서 받은 책임은 등에 지고 간다. 낡은 보장에서 탈출했으나 책임의 멍에는 지고 떠난다. 그는 아무도 방해하지 않는 보리수 나무 밑으로 가는 것이 아니라 죽음의 위협 지대인 이방인(당시의 원수) 세계로 돌입한다. 이 탈출은 도피는 아니다. 이 탈출은 잃어버린 자기를 되찾기 위한 쟁취의 첫발이다. 탈출은 결단이다. 사람은 언제나 이 결단을 통해서 자기를 되찾음로써 나로서 산다. 만일 탈출해서 무인도나 무풍지대로 가면 그것은 자기도피이다. 그러면 결국 그 탈출한 자기 삶을 자기 안에 감금한 것이 되리라. 탈출은 계속되어야 한다. 그것이 계속되기 위해서는 계속적인 결단이 필요하다. 결단이란 시간 안(이세상 복판)에서 하는 일이다. 탈출은 앞으로 나가기 위한 발돋움이다. 차고 앞으로 나가는 것이다. 계속적으로 물을 차고 앞으로 나가는 수영하는 사람처럼. 그렇기 때문에 탈출은 이 세상에서 세상 밖으로 빠져나가는 행위는 아니다. 아니, 역사 안에서 계속적으로 과거를 차고 앞으로 나가므로 생명이 물(세상)에 잠겨지지 않고, 물 속에 있으면서도 물에 흡수되지 않는 것이 탈출의 모습이다. 탈출한 아브라함은 지하로 숨은 것도 하늘로 오른 것도 아니다. 아니, 이방인 지대로 진출한 것이다.

3. 미래를 향해

그는 미래의 약속을 믿고 떠난다. 그러나 그 미래는 단순히 미래로서 약속됐을 뿐 '무엇이' '언제' '어떻게'는 전혀 보장돼 있지 않은 미래다. "지시하는 땅", "복 받을 미래"라는 막연한 약속뿐이다. 그는 미지의 미래에 자기를 개방하고 내 손에 들어오지 않은 미래에 자기를 개방하고 전진하는 것뿐이다. 그가 향하는 곳은 어떤 '이데아'의 세계도 신비경도 아니다. 그는 피안을 향해 떠난 것이 아니다. 아니! 바로 이 땅, 이 역사 안에서 이루어질 미래이다. 그래서 지시하는 땅 그 자손이 하늘의 별처럼, 바다의 모래처럼 번성하고(창세 22, 17), 온 인류가 그로 인해서 복을 받게 될(창세 18, 18) 그런 미래이다. 그러나 그는 그 미래의 노정표도 그 미래의 청사진도 손에 가진 것이 아니다. 오직 약속만이 있을 뿐이다. 손에 잡혀진 확증은 없다. 그래도 이 미래를 향해서 가야 한다. 그래야만 살 수 있겠기에.

4. 현재

탈향(脫向, Aus-Auf)의 도상이 그의 현존이다. 그는 싸움, 미움, 사랑, 약탈, 쟁취, 꾀를 부려야하고, 노동해야 하고, 절망도 하고, 관용도 하고, 비겁해지고, 잔인해야 살 수 있는 이 현실 속에서 산다. 그런 현실 속에서 그는 비겁한 때도 있고, 용감한 때도 있고, 자기 재산을 지키기 위해 잔인한 싸움도 하고 인류를 걱정하기도 하고 불안, 회의로 넘어지기도 하고 다시 일어나기도 하면서 땅 위에 흔적을 남기며 간다.

그는 이집트 땅에서 첫 시련을 당한다. 그 아내 '사라'가 아름다웠기 때문에 이집트의 왕 바로에게 빼앗긴 것이다. 그는 아내를 누이라고 해서 자기 목숨을 건지는 한편 재산을 얻는 바겁한 사나이가 된다. 그의 친척 롯의 식솔들과의 불화에도 휩쓸린다. 그때는 네가 오른쪽으로 가면 나는 왼쪽으로, 네가 왼쪽을 택하면 내가 오른쪽을 선택하리라는 바다같이 넓은 관용을 베푼다. 그는 여러 족장들이 싸움에서 억울하게 패배하는 것을 도와 용감한 투사가 되어 개선장군이 되나 단 한푼의 보상도 용납지 않는 기사도를 보이기도 한다. 그러나 그는 여전히 방랑하는 이방인이다. 그는 한 곳에 정착 못하고 계속 유랑한다.

그러는 동안 그의 약속에 대한 희망은 회의로 변한다. 그에게는 아직도 아무런 약속이 실현될 가능성은 보이지 않는다. 이 희망은 자손이 생겨야 하는 것이다. 그러나 그의 아내 '사라'는 생산의 길을 잃은 여인이다. '사라'를 통한 약속된 미래에의 길은 꽉 막혀있다. 과거에서 탈출은 했으나 미래에의 길은 현실적으로 차단되어 있다. "주 하나님, 무엇을 내게 주시렵니까? 나는 자식이 없습니다. 주께서 내게 자식을 주지 않았습니다"(15, 2-3). 단절된 희망, 혈관이 막힌 심장, 여건은 그의 희망을 반증한다. 무너진 탄광 속에 갇힌 광부, 깊은 지하에서 출구를 잃고 손톱 발톱이 닳아지고 기진해서도 그 안에 고인 물을 수건에 적시어 코에 대면서 숨을 이어가는 광부가 연상되는 처지이다. 그렇지만 그는 비록 절벽에 부딪혔어도 체념할 수는 없었다. 그는 제힘으로 돌출구를 찾기로 했다. 단산된 아내 대신 여종 '하갈'의 몸을 통해 자식을 얻기로 한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정도가 아니었다. 아내의 속삭임에 잠깐 외도한 것 뿐이다. 아무리 절단된 상황에서도 반칙은 허락되지 않는다. 그는 한사코 정도(正道)는 '사라'를 통한 길이라고 우겼다. 바위를 쳐서 물을 내게 하려는 모세처럼, 단산된 사라를 통해서 자손이 하늘의 별처럼 바다의 모래처럼 번영하리라는 이 약속, 이 절망적인 약속 앞에 단 하나의 돌출구는 '믿음' 그것 하나뿐이었다.

5. 믿음

"내 나이 100이고, 내 아내 나이 90이다." "100세된 사람이 어찌 자식을 낳을까. 90이 된 사라가 어찌 생산하리요."

그는 자기의 희망에 대해서 고소(苦笑)한다(창세 17, 17). 그래도 그는 약속된 희망을 수정하거나 포기하지도 않으며 그렇다고 내면화 하거나 의미화하려고도 하지 않는다. 여기는 지혜도, 사변도, 수양도, 요령도, 타협도 없다. 있다면 역설이요, 억지요, 집요함뿐이다. 이 모습은 선악과를 따먹음으로 상승하려고 한 아담이나 바벨탑을 쌓아 신과의 통로를 만들려는 인간들과는 대조적이다. 그에게는 의지만이 있다. 의지라는 닻줄을 믿음에 걸고 동동 매달려 있다. 이 믿음은 약속을 하나의 불가침의 계약으로 받는다. 그는 이 계약, 이 약속, 이 희망을 제거해 버리려고 하지 않는다. 아니 그는 이 희망을 계약처럼 믿기에 비로소 절벽과 같은 현실에서도 자유할 수 있는 것이다. 그는 자기 실존과의 사이에 어떤 완충지대를 만들지 않는다. 눈을 똑바로 뜨고 자기 절망적인 현실을 직시한다. 발 아래 놓인 이 영원히 뛰어 넘을 수 없는 카오스에서 눈을 피하지 않고 대결하는 것은 오직 그의 믿음이 하는 일이다. 믿음 그것은 실존의 한계적인 존재성에 대한 주저함이 없는 승인을 의미하는 동시에 그 앞에 절대 굴복하지 않으려는 결전의 교두보이기도 하다. 수렁에 빠져 더 헤어나올 수 없는 상황에 대한 분명한 인식이면서 동시에 그래도 살고야 말겠다는 삶의 의지의 거점이다.

"아이를 낳을 수 없다"

그래도 아이를 낳을 것을 믿는다. 불가능을 그대로 승인하면서 가능을 믿는다. 여기 "그럼에도 불구하고"라는 믿음의 성격이 철저화 되어있다. 이 믿음이 불가능을 가능케했다. 단산한 사라가 아이를 낳았다. 이 믿음은 바라던 것의 실상이 되었다. 그런데 아이를 낳게 되기 위해서 사라가 갑자기 젊어졌다거나 생리적으로 어떤 가능성이 생겼다는 따위의 합리화를 모색하려는 서술적인 노력은 전혀 없다. 과거나 현재의 상태와는 단절된 전혀 새로운 가능성이 저쪽에서부터 온 것이다.

순수한 미래의 희망이 이제 현재 속에 배태되었다. 정말 그런가? 불가능에서 태어난 이삭은 미래의 약속과 직결됐나? 그렇다면 희망은 이미 순수 미래적인 것이 아니고 현재적인 것이 되었다. 만일 그렇다면 눈을 미래로 향하지 않고 여기 있는 현재로서의 이삭에게만 집중하면 된다는 말이 된다. 그렇다면 미래는 이미 적어도 한끝이 아브라함 손에 잡힌 것이 되며 미래는 단절된 것이 아니라 지금과의 연속의 줄이 생겼다. 그러면 이 줄만 착실이 잡으면 된다. 이삭만 잘 키우면 된다. 그러나 이렇게 되면 현재에 정좌할 자리가 마련된다. 그러면 믿음이라는 줄을 늦추어도 된다. 아니 놔버릴 수도 있다. 이제는 내 손 안에 들어오는 것을 꼭잡고 키우면 되니까!

그러나 아브라함은 바로 이 한가닥의 희망의 닻줄을 제 손으로 끊는다. 그는 그 아이를 제물로 죽여 바치기 위해서 모리아 산으로 오른다. 어린 아들 이삭 등에 그를 태워버릴 나무를 지우고 그의 목을 찌를 칼과 불을 제 손에 들고 산으로 오른다. 아브라함은 말없이 오르고 있다. "아버지, 불과 나무는 있으나 번제할 어린양은 어디 있습니까?" "아들아, 번제할 어린양은 하느님이 당신을 위하여 친히 준비하시리라" 이것은 아버지와 아들의 대화이다. 아브라함의 대답은 사실인가? 그는 정말 하느님이 따로 양을 준비해 두리라고 생각했나? 그렇다면 지금의 이 행위는 하나의 연극이며 하느님께 향한 거짓이 된다. 만일 제물이 될 양이 따로 준비되었으리라고 믿지 않았다면 자식에게 거짓말을 한 것이다. 그러나 아브라함은 하느님 앞에 거짓된 연극을 한 게 아니다. 그는 말없이 아들을 불붙일 나무위에 결박해 앉히고 칼을 뽑아 들었다. 그러면 아들에게 거짓말 한 것인가? 아니 믿음의 진실 그대로이다. 이 믿음은 절망 앞에서 나온 믿음이다. 단둘이 칼과 불을 들고 제단으로 향한다. 이제는 그 손의 칼로 자식을 죽여야 한다는 현실 외에 다른 길은 전혀 보이지 않는다. 이 길을 만회할 길은 자신에게는 없다. 아들을 안 죽일 수 있는 길, 지금 결정된 사실이 수정될 가능성은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아들은 안 죽는다고 믿은 것이다. 불가능한 현실 한복판에서 미래의 약속을 믿는 것, 그것이 그의 믿음이다

왜 약속의 성취를 위한 유일한 희망인 이삭을 죽여야 했나? 이것은 바로 미래의 약속을 도말하는 행위가 아닌가? 이제 아브라함은 무와도 같은 현실에서 절망이냐 아니면 믿음이냐를 선택해야 할 위치에 몰린 것이다. 이삭에게 칼을 댄 것은 자기에게 칼을 대는 것이며 미래의 약속의 줄에 칼을 대는 것이다. 절단! 철저한 단절!

믿음이란 단순히 미래 또는 피안에 낚시대를 던지고 기다리는 고기잡이 같은 행위가 아니다. 믿음은 철저한 절단(결단)의 행위이다. 아브라함이 든 칼에 이삭은 죽었다. 아니 아브라함 자신이 죽었다. 그러므로써 실낱같은 희망의 연속선도 끊어졌다. 그러나 그렇게 죽음으로써 이삭은 살았다. 아니 아브라함이 살았다. 그래서 그 약속(희망)도 새롭게 주어졌다.

네가 이 같이 행하여 네 아들, 네 독자를 아끼지 아니하였은 즉 내가 네게 큰 복을 주고 네 씨로 크게 성하여 하늘의 별과 같고 바다의 모래와 같게 하리니 네 씨가 그 대적의 문을 얻으리라. 또 네 씨로 말미암아 천하 만민이 복을 얻으리니 이는 네가 나의 말을 지켰움이니라(창세 22, 17-18).

그러나 아브라함에게 약속은 언제나 미래에 있었다. 그를 살게 한 것은 약속의 성취가 아니라 오히려 그것이 언제나 미래였기 때문에 살아 움직인 믿음에서이다.

히브리인들은 이 아브라함을 그들의 조상으로 했다. 이 아브라함의 존재양식이 저들의 민족사를 꾸몄다고도 할 수 있겠으나 동시에 그들의 민족사가 아브라함을 형성했다고도 할 수 있다. 저들의 역사는 탈출(Exodus)로 시작된다. 저들이 향한 곳은 젖과 꿀이 흐르는 약속의 땅이다. 그러나 저들의 길은 절벽처럼 차단됐다. 홍해가 가로 막혔다. 기갈과 기근, 이방인의 차단에서 수없이 죽음에 직면했다. 그러는 동안 과거에의 미련, 현재에의 정착, 약속의 포기를 강요하는 유혹의 함정에 빠지려고 했다. 그러나 미래의 약속을 믿음이 끝끝내 승리했다. 저들에게도 약속은 언제나 미래였다. 탈출한 그 세대는 모세를 포함해서 약속의 성취는 만나지 못했고 그 도상에서 끝났다. 그러나 저들은 그 약속을 믿는 믿음으로 자기를 살렸다.

바울은 이 히브리의 믿음의 결정으로 아브라함을 그 조상으로 내세웠으며 그 믿음의 극치를 예수의 십자가에서 본 것이다. 십자가! 그것은 철저한 단절이며 동시에 미래에의 투신의 극치인 것이다. 그는 이 십자가에서 죽어야만 산다는 사실을 배웠다. 그래서 그는 살기 위해 날마다 죽는다고 했으며 그 몸에 십자가의 죽음을 지고 산다고 했다.

이러한 히브리적인 믿음이 영원한 코스모스의 품에 안주하려는 희랍적인 세계에 심장에 박힌 화살처럼 계속적인 자극을 주어 가라앉은 것을 휘젓고 짜놓은 것에 칼질하고 들어 앉은 것을 내쫓고 잡은 것을 놓게 함으로써 서구의 다이나믹한 문명을 그 흔적으로 남기게 했다.

6. 믿음으로 산다는 의미

우리는 흔히 믿음을 현실도피 또는 체념과 혼동한다. 믿음은 현실 속에서 살려는 의지의 결단이다. 산다는 말은 자연적인 생의 연속을 말하지 않는다. 인간으로 산다는 말이다. 믿음으로 산다는 것은 어떤 종교적인 특수 행위이기 전에 인간의 고유한 존재의식이다.

우리는 먹어야 산다는 말과 자유아니면 죽음을 달라는 말을 동시에 한다. 이 말은 사람은 빵으로만 살 수 없고 하느님의 말씀으로 산다는 말과 본질상 같은 존재적 요청이다. 먹어야 산다 따위의 자연적인 삶과 자유해야 산다는 말은 연속성이 없는 평행적인 요청이다. 자연적인 삶이 필요로 하는 것은 인간을 비끌어매는 것이고 자유의 요청은 모든 것에서 풀려 나오자는 삶의 절규이다. 이 둘은 삶의 필수조건이면서 대치되어 있다. 먹어야 산다는 것은 사람의 유한성을 말하며 자유에서의 추구는 무한성을 말한다. '키에르케고르'는 두 면에서의 인간의 절망을 본다. 무한의 결핍에서 오는 절망과 유한의 결핍에서 오는 절망이 그것이다. 이 둘이 종합되지 않는데서 사람의 불안이 계속되는 것이다. 종합은 조화나 통일을 뜻하는 게 아니다. 이 둘은 끝끝내 대치되면서 삶에 있어서 종합되어야 한다. 마치 플러스, 마이너스가 대치관계에 있으면서 발전(發電)을 하듯이!

변소에 앉아서 영원을 생각하는 인간! 그것은 90세의 단산된 아내를 가진 100세의 아브라함이 자손을 통한 미래의 약속을 바라보는 것과 본질상의 차이는 없다. 변소에서 배설만 한다면! 아브라함이 죽는 날까지 잘 먹고 평안하는 것만을 생각한다면! 거기에는 고뇌는 없을 것이다. 이 양면이 연속성을 가지고 있다면 명상을 통해 '닐바나'에 이르는 평온을 가질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이 양면은 단절되어 있고 대치되어 있기에 인간은 그 교차점에서 몸부림친다. 그러나 그 어느 것도 무시하거나 버려서는 안 된다. 미래에의 희망(영원)을 포기하면 평안할지 모르나 누에가 제 속에서 나오는 액체로 둥지를 틀고 그 안에 안좌(安座)해 버리듯 죽어버릴 것이고 유한한 것을 포기하면 증발하거나 무저항에로 추락해 버리고 말 것이다.

히브리의 믿음은 가장 구체적 역사 속에서 자연 법칙이나 지성과 단결된 하느님과 마주 섬으로써 이루어졌다. 아브라함은 결코 은둔의 거사도 소위 성자도 아니다. 그는 너무나도 인간적이다. 이 인간적인 제한성은 우리와 똑같으며 그의 삶의 여건이나 일상성은 우리와 조금도 다를 바 없다. 한마디로 그는 생활인이다. 그의 제한성, 불안, 비겁, 본능과 그의 하느님의 약속에 대한 신뢰 사이에는 연속선이 없다. 그것은 그대로 모순이다. 그런데 그를 이 모순 속에서 좌절하지 않게 한 것은 바로 그의 믿음이다. 그런 뜻에서 아브라함은 온 인류의 믿음의 조상이다.


List of Articles
바알 (열상 19, 18)
남은 칠천 명 (19, 7-18)
민중의 손으로 통일되는 날 (아모 9, 11-15)
겨울은 가고 (에제 37장)
에제키엘이 무등산에서 절규한다 (에제 24, 6-8)
포로에서의 탈출 (이사 66, 1-8)
위정자와의 대결 (이사 7, 10-14)
   
제5부 새로운 존재
일상성과 비일상성 (루가 10, 38-42)
그래도 다시 낙원에로 환원시키지 않았다 (창세 3, 1-10)
새로운 인간상 (창세 12, 1-9)
믿음의 조상 (창세 22, 17-18)
두 사이 에 손을 얹을 판결자 (욥기 9, 25-35)
하느님으로부터의 도피 (시편 139편)
하느님의 웃음 (시편 2편)
잠과 신앙 (시편 127편)
교회란 무엇인가 (로마 8, 9-30)
인간을 말한다 (마르 12, 28-34)
존재 근거 (시편 42편)
우주의 품으로 (시편 8,3 이하)
   
판권
표지
예수의 민중사건 : 『민중과 성서』를 내면서
   
제1부 복음서와 민중
   
예수와 민중 : 마르코복음을 중심으로
    1. 전제
    2. 마르코복음 안의 오클로스
    3. 마르코복음에 나타난 오클로스의 성격
        1) 오클로스의 성격
        2) 오클로스에 대한 예수의 행태
        3) 종합
    4. 예수를 따른 자들
    5. 마르코복음 안에 있는 어록
    6. 오클로스의 언어학적 의미
        1) 라오스와 오클로스
        2) 오클로스와 암 하 아레츠
    7. 종합
마르코복음에서 본 역사의 주체
    1. 전제
    2. 마르코의 삶의 자리
    3. 마르코의 민중신학의 기조
        1) 세례자 요한이 잡힌 후(14a절)
        2) 갈릴래아로 가다
        3) 하느님 나라의 도래 선포
    4. 민중의 행태
예수사건의 전승 모체
    1. 문제 제기
    2. 케리그마의 성격
        1) 고린토전서 15장 3~8절
        2) 필립비서 2장 6~11절
        3) 사도행전에 나타난 케리그마
    3. 민중언어의 성격
    4. 수난사
    5. 예수의 행태 일반
        1) 기적 이야기와 예수의 행태
        2) 아포프테그마와 예수의 행태
        3) 로기온(Logion, 어록)과 예수의 행태
    6. 결론
가난한 자 : 루가의 민중 이해
    1. 가난한 자
        1) 통계적 고찰
        2) 루가의 특수자료
        3) 예수의 탄생설화와 나자렛 선언
        4) 마르코와 Q자료
    2. 루가복음서의 청중
    3. 결론
마태오의 민중적 민족주의
    1. 문제 제기
        1) 마태오의 신학적 주제에 대한 논의들
        2) 문제 제기
    2. 마태오가 처한 현실
        1) 마태오와 그의 시기
        2) 민족적 와해 위기
    3. 마태오의 현실인식
        1) 이스라엘 : 길 잃은 양들
        2) 길 잃은 양이 놓여 있는 현실
    4. 민족동일성 재확립
        1) 뿌리 찾기
        2) 바리사이파가 주도하는 라삐 유다교와의 대결
    5. 마태오의 민중 이해
        1) 언어적 성격
        2) 의식화된 민중
    6. 맺는 말
민중신학의 성서적 근거 : 마르코복음을 중심으로
    1. 예수사건의 재발견
    2. 마르코복음과 민중
    3. 민중은 수단이 아니다
    4. 민중은 객체일 수 없다
    5. 십자가는 민중수난의 극치다
민중신학의 어제와 오늘
    1. 독재와 대항하므로
    2. 민중을 만나므로
    3. 민중과 더불어
   
제2부 민중운동사
   
민중사건과 언어사건
    1. 성서에서 본 말의 성격
        1) 그 말의 현장은 어떤 것이었나
        2) 예수의 경우
        3) 예수사건에 관한 전승
        4) 오순절의 말 사건
    2. 무엇으로 말하는 것인가
    3. 해야 할 말은 무엇인가
    4. 우리가 해야 할 말
미래는 가난한 자의 것 : 루가 6장 20~26절
    1. 축복과 저주
    2. 가난한 자와 부요한 자
    3. ‘지금’과 ‘장차’
    4. 우리의 선택
나라가 임하옵소서
    1. 예수의 기도
    2. 그의 기도를 전달받은 자들
    3. 하느님의 나라
고향 잃은 민중
    1. 피난민
    2. 성서에서 본 피난민문제
    3. 게르(GER) 문제 해결의 시도
    4. 이방인에 대한 관용의 한계
    5. 당면한 과제
        1 ) 새로운 인식을 위한 운동
        2) 실천에 대한 몇 가지 제언
이스라엘 민중사
    1. 머리말
    2. 출애굽
    3. 고대 이스라엘 종족동맹
    4. 민중을 배반하고 세워진 왕권
    5. 분단시대의 고난
    6. 민중운동의 여러 계열
    7. 예수의 민중운동
    8. 맺는 말
   
제3부 민중과 체제
   
민중사실의 증언
    1. 민중신학의 전제들
    2. 민중사실의 증언
고난과 고백
    1. 수난자와의 일치
    2. 마르코의 민중
    3. 수난사와 고난
    4. 더불어의 고난
    5. 맺는 말
갈릴래아 민중에 항복한 바울로
    1. 바울로의 위치
    2. 사울은 어떤 사람인가
    3. 그리스도교 박해
    4. 예수를 만남
    5. 전향
    6. 맺는 말
소명(召命)
    1. 바울로의 소명
    2. 사도 됨과 소명
    3. 이방인에게로
바울로와 역사의 예수 I
    1. 머리말
    2. 예수에 대한 바울로의 말
    3. 예수냐 바울로냐
    4. 왜 예수가 아니고 케리그마인가
선택받은 민중: 고린토전서 1장 26~31절
    1. 고린토교회 구성원의 사회계층
    2. 공동체원의 가치 판단 기준
    3. 민중을 보는 눈
    4. 택함을 받은 민중
   
제4부 예수의 희망
   
하늘도 땅도 공(公)이다
    1. 낙원 이야기
    2. 아담一인간
    3. 실락원은 공을 사유화함으로
갈릴래아에서 만나자: 마르코 16장 1~8절
    1. 제3의 자리
    2. 갈릴래아
    3. 갈릴래아에서 만나자
예수의 희망
    1. 새 세계에의 희망
    2. 희망과 세계혁명
    3. 바른 인간공동체의 희망
    4. 맺는 말
   
판권
표지
예수는 논하지 않았다
   
제1부 민중의 언어, 이야기
   
1. 성서라는 책의 성격
2. 성서의 서술양식
    1) 구약성서
    2) 신약성서
    3) 민중언어
   
제2부 예수의 이야기(비유)
   
1. 만성병에 걸린 세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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