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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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둘 사이에 손을 얹을 판결자
욥기 9, 25-35
 
1. 프로메테우스

세상에는 해명될 수 없는 일들이 많다. 그 책임을 누구에게도 돌릴 수 없는 불가사의 한 일들, 이유를 모르고 당하는 박해와 괴로움, 거부하면서도 받아들여야만 하는 비극의 기습… 누구의 짓인지도 모르는 이 무자비한 횡포 아래서 인간의 삶은 근원부터가 흔들리고 있다. 욥이 당한 불시의 재난은 바로 이러한 부조리로 얽힌 삶의 짙은 단면이요 그 축도이다. 그의 재산은 하루 사이에 기습을 당해 전부 없어지고, 그의 자식들은 몰살을 당하고, 동시에 욥 자신에게는 악창이 생겨 그의 표현대로 하면 재를 뒤집어 쓰고, 기왓장으로 몸을 긁어도 그 가려움을 견딜 수 없는 괴로움을 당했다. 그의 삶은 행복에서 급전환해서 순간적으로 저주의 대상이 됐다. 그 처참한 것을 그가 그의 난 날과 그를 잉태하게 한 밤과, 그를 밴 모태를 저주하는 것으로 그 심한 정도를 나타내고 있다. 그의 아내는 그를 버렸고, 우정으로 찾아 왔다는 그의 친구들은 이른바 정론을 펴서 그를 설복하려 하지만 그의 고통은 오히려 배가될 뿐이다. 그는 처음에는 생의 부조리 그리고 그의 고독과 싸웠지만 종당에는 그의 삶에 이처럼 부당히 개입해서 그를 괴롭게 하는 하느님과 대결한다.

사람들은 욥을 유다적인 프로메테우스라 한다. 프로메테우스는 제우스 신에게서 불을 훔쳐 인간에게 가져다 줌으로써 제우스 신에게 반항을 드러냈다. 그 결과 제우스 신의 분노를 사서 체포되어 코카서스 산정의 바위에 쇠사슬로 비끌어 매인채 까마귀들이 심장을 쪼게 하는 벌을 받는다. 이 계속적인 아픔, 이것은 바로 계속적으로 닥쳐 오는 인간의 고뇌를 뜻할 것이다. 휴머니즘 또는 윤리적인 세계에서 보면 프로메테우스의 한 일은 좋은 일이다. 그는 인간을 위해 삶을 모험했다. 그는 오히려 축복을 받아야 당연할 것이다. 그런데 심장을 쪼는 듯한 아픔과 고뇌가 계속되는 것은 어떤 이유인가? 이것은 희람인들이 아무 죄도 없는 의인들이 왜 고통을 받아야 하는지 그 이유를 희랍적인 신화의 틀에서 나타낸 것이다. 인간에게 왜 고통이 있나, 더구나 그 이유를 설명하거나 해명할 수 없는 그런 고통이 … 왜 인간에게 비극이 있나, 자신마저 원인을 알지 못한채 고스란히 그 앞에서 시들어가야 하는 그런 비극이 …

고통은 죄의 대가로서 오는 벌이라는 율법적 혹은 법률적인 사고의 영역에서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그런 고통이 사람들에게는 있다. 더구나 사람은 진실하면 진실할수록, 진실하려고 하면 진실하려고 할수록 내적 고통이 더욱 심하고 외적으로는 박해를 받으며 마침내 고독한 생을 보내야 하는 현실 앞에서 고민한다. 욥은 이렇게 말한다. "곤고한 자에게 빛은 왜 주나? 번뇌하는 사람에게 생명은 왜 주나? 죽기를 바라는 사람을 왜 죽지 않게 하나?" 그는 항의한다. "도대체 누가 이렇게 간섭을 하는가? 이렇게 맞선 자는 누군가?" 이것은 인간이기에 해야 하는 고통이다. 만일 인간이 짐승처럼 생리적인 데만 머문다면 이런 번뇌는 없을 것이다. 인간의 번뇌는 빛이니, 진리니, 생명이니, 종교적으로는 하느님이니 하는 일면과, 생리적인 자극에만 의존하는 동물적인 면이 양극을 이루어 피차에 아무런 연결점도 없이 교차되는 데서 생겨난다. 인간은 생리적인 영역, 즉 자연법칙 아래 있으면서도 언제나 무엇인가가 그 사이를 뚫고 개입해 오는 고민이 있고 고뇌가 있다. 윤리적인 영역 안에 살면서도 윤리의 세계를 마구 뚫고 들어오는 것이 있다. 이것이 인간의 부조리의 현상을 빚어 낸다. 그래서 정말 고뇌를 문제로 하다 보면 종교라든지 신이라고 하는 것 일체를 없애버리면 이 문제가 전부 해결되리라고 생각하게 되는 것도 분명히 이유있는 반항이다.

칼 마르크스는 이 부조리의 원인을 사회적인 측면에서 보았다. 특히 노동자들이 고통을 당하는 이유가 단지 그들 자신의 게으름이나 무지에 기인하는 것이 아니고 자본가들의 구조적 착취에 기인한다는 것을 직시하고 고발했다. 그 결과 그는 직장에서 추방되었으며 거듭 박해를 받아야만 했다. 당시 독일의 어떤 신문들은 그를 새 시대의 프로메테우스로 비유했다.

욥도 하느님과 대결한다. 그가 인간의 편에서 신과 담판을 하려는 면에서는 프로메테우스와 같다. 그러나 그는 신에게서 무엇을 빼앗아 인간에게 가져오는 것이 그 해결점이라고 보지는 않는다. 문제는 인간의 세계와 하느님의 세계가 아무런 연결성이 없이 대립되어 있는 것으로 보고 그 신과 만나서 가부간에 담판을 하려고 한다.

"하느님 나서 주십시요!" 하는 것이 그의 부르짖음이다. 이유를 알자. 인간이 이렇게 괴로워해야 할 이유를 알자! 그는 인간이 이렇게 괴로워 해야 할 이유가 사회구조의 어떤 모순이나 결핍에 있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과의 관계에 차질이 있기 때문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무엇이 이런 차질을 가져오나. 그 이유는 무엇인가? 욥의 고통은 여기에 있었다. 그의 친구들은 전통적인 종교론을 펴서 그 이유를 죄로 돌렸으나 욥은 완강하게 이를 부정하며 자신이 옳다는 주장과 그의 양심을 고수한다.

그러나 문제는 이 양심이 통하지 않는 현실이다. "홀연히 재앙이 내게 도륙할 때 무죄한 자의 고난을 비웃으시리라" 하는 그의 말에 나타나 있는 것처럼 욥의 눈에 이 현실은 마치 하느님이 인간을 마음대로 무차별하게 짓밟으면서 비웃고 있는 것같이 보인다. 그는 자기의 불법과 죄가 얼마나 많은지, 그 허물과 죄를 알게 해 달라고 애원한다. 즉 지금 그에게 문제가 되는 것은 고통 자체보다도 이렇게 심한 저주와 고통을 받아야 할 이유가 무엇인가를 알고 싶다는 것이다. 그러나 그는 아무런 대답도 듣지 못했다.

이 상황을 이렇게 상상해 볼 수도 있다.

한 사람이 숲속을 지나다가 어디선가 날아오는 화살에 맞았다. 그는 꺼꾸러졌다. 그의 계획은 모두 좌절됐다. 그는 상처를 움켜쥔 채 쓰러져 무엇인가를 기다리고 있었다. 누가 자기를 쏘았는지, 왜 쏘았는지 그 이유를 해명할 진상을 보려고 한 것이다. 그러나 아무도 나타나지 않았다. 그는 그의 아픔 보다도 이 고요한 정적이 더 숨막히게 괴로웠다. 그는 마침내 비명과도 같은 소리를 쳤다. "누구냐. 도대체 나를 쏜 자가 누구냐. 왜 나를 쏘았느냐? 그 복면을 벗고 나오라. 나와서 이유만 말해다오." 그는 이유만 알면 죽어도 좋았다. 그래서 계속 소리쳤으나 여전히 침묵뿐 아무도 나타나지 않았다.

욥은 바로 이런 사람과도 같다. 그는 계속 이 침묵 앞에서 항의한다."하느님이 내게 독이 되어서 나를 찌른다", "힘으로 말하면 하느님 그가 강하고 심판으로 말하면 누가 그를 호출하겠느냐?" … 이것은 모두 나타나지 않는 신에 대한 그의 견딜 수 없는 항의이다. 그의 항의가 짙으면 질을수록 그는 더욱 더 하느님과 자기 사이에 철저한 단절이 있음을 절감했다. "내가 눈 녹은 물로 손을 씻고, 잿물로 손을 깨끗히 할지라도 주께서 나를 개천에 빠지게 하시리라". 욥에겐 지금 그가 당하는 일이 바로 그렇게 보였다. 윤리, 도덕, 양심, 선 … 그런 것들이 무의미성, 그리고 이유 없는 신의 횡포, 자신의 재산과 당하는 운명과의 엄청난 차질, 대화가 막히고 이해가 불가능한, 그래서 만날 길 없는 신과 인간의 철저한 단절 … 마침내 욥은 하느님과 만나서 어떤 해결이 올 것이라는 것을 체념하고 만다. 그래서 그는 "하느님은 나처럼 인간이 아니기에 우리에게 대답을 할 수 없다… 하느님이 내 곁을 지날지라도 나는 결코 그를 깨달아 알 수가 없고, 내게서 떠날지라도 나는 그를 알 수 없다"고 말한다. 그는 언어를 잃었다. 이제는 체념이다.

2. 중재자

그러나 욥에게 이 단절된 관계를 해결할 하나의 계시와도 같은 생각이 스쳐갔다. 그것은 아무래도 이 대립된 관계가 직접 해결될 길은 없으며 저의 말도 알고 내 말도 알고, 저의 처지도 알고 내 처지도 아는 그런 존재가 나타나서 그가 우리 두 사이에 손을 얹어서 중재할 때에만 이 관계는 해결될 수 있으리라는 것이다. 그래서 욥은 양측 사이에 손을 얹을 중재자를 갈망한다. 그의 눈은 희랍적인 것과는 전혀 다르게 이 중재자가 나타날 때에만 참 구원이 가능하다는 것을 암시한다. 우연의 일치이기는 하지만 이것이 바로 성서에서 말하는 그리스도의 역할이다.

사실상 우리는 우리의 현실생활에서 이런 기도와 같은 소원을 언제나 계속하고 있다. 우리는 언제나 이럴 수가 있나하는 안타까운 현실에서 억울함을 물마시듯 하면서 산다. 그러나 동시에 이 억울함과 불합리에 대결하려는 생각을 버리고 쉽게 체념한다. 그것은 역시 사이비한 설득 때문이다. 사회적인 측면에서만이 아니고 하느님과의 관계에서도 해명될 수 없는 횡포와 같은 것을 느끼지만 역시 종교적인 설득에 의해 쉽게 주저앉아 버린다. 납득이 가서가 아니다. 체념해버리고 만다.

우리는 내적으로 존재와 실존의 격리와 대립, 너와 나 사이의 단절을 뼈저리게 경험한다. 한 국가라는 영역에서도 지배자와 피지배자 사이에 서로 소통되지 않는 심한 격리, 그래서 서로 동문서답하는 그런 고통을 우리는 지금도 맛보고 있다. 그러나 이 대립성을 오히려 정당화하려는 사이비한 설득과 함께 우리들 스스로가 이제는 어떠한 노력도 정의의 호소도 통하지 않으며, 저들은 우리와 다른 사람이기에 어떠한 대화도 기대할 수 없다는 결론을 짓고 씁쓸함을 짓씹으며 체념해 버리고 만다. 분명히 우리에게 옆으로 통하는 문은 없다.

대립관계가 고통의 원인인데, 그 대립관계에서 직접 시비를 가릴 길을 막은 것이 인간이요 사회이다. 이 대립에서 오는 고통을 해결하는 길은 너와 나를 아는, 네 편에 그리고 내 편에도 설 수 있는 그래서 이 두 사이에 손을 얹을 중보자가 있을 때에만 가능하다. 우리 민족에게는 이런 중보자가 없다. 내 자체 안에도 이런 중보자가 없다. 이 희구가 역시 그리스도 신앙이다.

예수는 바로 이 양극 사이에 서 있다. 그래서 그는 하느님과 사람 사이에서 고통당했다. 그러나 이 대립성은 그 안에서 화해하려 하지 않고 계속 그 대립을 압축시켜서 그 사이에 껴서 죽은 것이 예수의 십자가의 사건이다. 부부 간에서도 충돌과 대립은 불가피하다. 서로가 흥분하였을 때에는 힘으로 결판을 내려 하지만 그 정도를 넘으면 서로 불통의 관계로 체념해 버린다. 이 때의 중재자는 구군가? 이런 상황에서 둘 사이에 손을 얹을 판결자의 역할을 할 자가 없다. 아마 현실적으로는 어린애가 그런 일을 할런지도 모른다. 직접적인 대화의 문은 막혔지만 그 어린애를 통해서 손을 잡게 된다면 비록 어린 것이지만 그는 두 사이에 손을 얹을 판결자로 임한다.

그러나 여기에서도 해결의 길을 찾지 못하고 오히려 어린애에게 주먹이 날라가고 그것이 심해서 죽게 된다면 그 어린아이의 죽음은 이 둘 사이의 대립에 껴서 죽은 십자가의 죽음과도 비슷할 것이다. 이 대립은 어떻게 해서든지 해소되어야 한다. 그러나 우리의 문제는 이 대립관계를 해소하지 않은 채 적당히 묻어두려 하는 데 있다. 우리는 그 묻어둔 곳에 예수의 십자가가 놓여 있음을 알아야 한다. 우리가 이 대립을 묻어두는 것은 그리스도를 묻어두는 것과 아무런 차이가 없다. 대인관계에서는 물론 내 자신의 내적인 싸움에서도 이렇게 애매하게 그대로 묻어 둔 것이 얼마나 많은지… 우리는 역시 팔레스틴의 그 무덤과 같은 무덤을 계속 만들어 가고 있지 않은지… 어쨌든지 이 대립을 그대로 묻어두면 또 하나의 무덤을 만드는 그런 비극을 스스로가 일으키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대립에서 직접 판결을 하고 말았다거나, 그 대립을 끝끝내 계속하면 너도 나도 다 죽고 만다. 두 사이에 손을 얹을 판결사, 이 극한의 대립을 그 사이에 서서 해소할 자… 그런 중재자를 찾는 신앙이 바로 그리스도 신앙이다.


List of Articl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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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중의 손으로 통일되는 날 (아모 9, 11-15)
겨울은 가고 (에제 37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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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로에서의 탈출 (이사 66, 1-8)
위정자와의 대결 (이사 7, 10-14)
   
제5부 새로운 존재
일상성과 비일상성 (루가 10, 38-42)
그래도 다시 낙원에로 환원시키지 않았다 (창세 3, 1-10)
새로운 인간상 (창세 12, 1-9)
믿음의 조상 (창세 22, 17-18)
두 사이 에 손을 얹을 판결자 (욥기 9, 25-35)
하느님으로부터의 도피 (시편 139편)
하느님의 웃음 (시편 2편)
잠과 신앙 (시편 127편)
교회란 무엇인가 (로마 8, 9-30)
인간을 말한다 (마르 12, 28-34)
존재 근거 (시편 42편)
우주의 품으로 (시편 8,3 이하)
   
판권
표지
예수의 민중사건 : 『민중과 성서』를 내면서
   
제1부 복음서와 민중
   
예수와 민중 : 마르코복음을 중심으로
    1. 전제
    2. 마르코복음 안의 오클로스
    3. 마르코복음에 나타난 오클로스의 성격
        1) 오클로스의 성격
        2) 오클로스에 대한 예수의 행태
        3) 종합
    4. 예수를 따른 자들
    5. 마르코복음 안에 있는 어록
    6. 오클로스의 언어학적 의미
        1) 라오스와 오클로스
        2) 오클로스와 암 하 아레츠
    7. 종합
마르코복음에서 본 역사의 주체
    1. 전제
    2. 마르코의 삶의 자리
    3. 마르코의 민중신학의 기조
        1) 세례자 요한이 잡힌 후(14a절)
        2) 갈릴래아로 가다
        3) 하느님 나라의 도래 선포
    4. 민중의 행태
예수사건의 전승 모체
    1. 문제 제기
    2. 케리그마의 성격
        1) 고린토전서 15장 3~8절
        2) 필립비서 2장 6~11절
        3) 사도행전에 나타난 케리그마
    3. 민중언어의 성격
    4. 수난사
    5. 예수의 행태 일반
        1) 기적 이야기와 예수의 행태
        2) 아포프테그마와 예수의 행태
        3) 로기온(Logion, 어록)과 예수의 행태
    6. 결론
가난한 자 : 루가의 민중 이해
    1. 가난한 자
        1) 통계적 고찰
        2) 루가의 특수자료
        3) 예수의 탄생설화와 나자렛 선언
        4) 마르코와 Q자료
    2. 루가복음서의 청중
    3. 결론
마태오의 민중적 민족주의
    1. 문제 제기
        1) 마태오의 신학적 주제에 대한 논의들
        2) 문제 제기
    2. 마태오가 처한 현실
        1) 마태오와 그의 시기
        2) 민족적 와해 위기
    3. 마태오의 현실인식
        1) 이스라엘 : 길 잃은 양들
        2) 길 잃은 양이 놓여 있는 현실
    4. 민족동일성 재확립
        1) 뿌리 찾기
        2) 바리사이파가 주도하는 라삐 유다교와의 대결
    5. 마태오의 민중 이해
        1) 언어적 성격
        2) 의식화된 민중
    6. 맺는 말
민중신학의 성서적 근거 : 마르코복음을 중심으로
    1. 예수사건의 재발견
    2. 마르코복음과 민중
    3. 민중은 수단이 아니다
    4. 민중은 객체일 수 없다
    5. 십자가는 민중수난의 극치다
민중신학의 어제와 오늘
    1. 독재와 대항하므로
    2. 민중을 만나므로
    3. 민중과 더불어
   
제2부 민중운동사
   
민중사건과 언어사건
    1. 성서에서 본 말의 성격
        1) 그 말의 현장은 어떤 것이었나
        2) 예수의 경우
        3) 예수사건에 관한 전승
        4) 오순절의 말 사건
    2. 무엇으로 말하는 것인가
    3. 해야 할 말은 무엇인가
    4. 우리가 해야 할 말
미래는 가난한 자의 것 : 루가 6장 20~26절
    1. 축복과 저주
    2. 가난한 자와 부요한 자
    3. ‘지금’과 ‘장차’
    4. 우리의 선택
나라가 임하옵소서
    1. 예수의 기도
    2. 그의 기도를 전달받은 자들
    3. 하느님의 나라
고향 잃은 민중
    1. 피난민
    2. 성서에서 본 피난민문제
    3. 게르(GER) 문제 해결의 시도
    4. 이방인에 대한 관용의 한계
    5. 당면한 과제
        1 ) 새로운 인식을 위한 운동
        2) 실천에 대한 몇 가지 제언
이스라엘 민중사
    1. 머리말
    2. 출애굽
    3. 고대 이스라엘 종족동맹
    4. 민중을 배반하고 세워진 왕권
    5. 분단시대의 고난
    6. 민중운동의 여러 계열
    7. 예수의 민중운동
    8. 맺는 말
   
제3부 민중과 체제
   
민중사실의 증언
    1. 민중신학의 전제들
    2. 민중사실의 증언
고난과 고백
    1. 수난자와의 일치
    2. 마르코의 민중
    3. 수난사와 고난
    4. 더불어의 고난
    5. 맺는 말
갈릴래아 민중에 항복한 바울로
    1. 바울로의 위치
    2. 사울은 어떤 사람인가
    3. 그리스도교 박해
    4. 예수를 만남
    5. 전향
    6. 맺는 말
소명(召命)
    1. 바울로의 소명
    2. 사도 됨과 소명
    3. 이방인에게로
바울로와 역사의 예수 I
    1. 머리말
    2. 예수에 대한 바울로의 말
    3. 예수냐 바울로냐
    4. 왜 예수가 아니고 케리그마인가
선택받은 민중: 고린토전서 1장 26~31절
    1. 고린토교회 구성원의 사회계층
    2. 공동체원의 가치 판단 기준
    3. 민중을 보는 눈
    4. 택함을 받은 민중
   
제4부 예수의 희망
   
하늘도 땅도 공(公)이다
    1. 낙원 이야기
    2. 아담一인간
    3. 실락원은 공을 사유화함으로
갈릴래아에서 만나자: 마르코 16장 1~8절
    1. 제3의 자리
    2. 갈릴래아
    3. 갈릴래아에서 만나자
예수의 희망
    1. 새 세계에의 희망
    2. 희망과 세계혁명
    3. 바른 인간공동체의 희망
    4. 맺는 말
   
판권
표지
예수는 논하지 않았다
   
제1부 민중의 언어, 이야기
   
1. 성서라는 책의 성격
2. 성서의 서술양식
    1) 구약성서
    2) 신약성서
    3) 민중언어
   
제2부 예수의 이야기(비유)
   
1. 만성병에 걸린 세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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