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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의 웃음
시편 2편
 
1. 비극과 희극

고대 희랍은 비극으로 유명하다. 타원형 노천극장 무대는 관중석 한가운데를 세로로 나누고 있다. 이렇게 함으로써 무대와 관중석의 한계를 되도록 없애고 연출자와 관중의 거리를 좁히게 되어 있다. 배우들은 앞에 놓인 무대에서 각본에 의한 비극을 연출하기 시작하여 절정에 이르면 점차로 관중 사이로 접근한다. 처음에는 구경꾼이던 관중은 점차 객관자에서 주체자로 옮겨서 그 비극의 일원이 돼 버린다. 마침내 구경꾼과 배우의 한계, 무대와 구경꾼의 자리의 거리는 없어지고 극장 전체가 온통 비극의 장으로 화하여 함께 비극의 주인공이 되어 슬픔에 흠뻑 잠기게 한다. 저들은 울려고 그것에 온 것이다.

왜 울려고 오는가? 저들은 수난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향락하기 위해서 온다. 저들은 이 비극속에 흠뻑 잠겨 싫컷 울고 나면 정화가 않된 배 속이 메슥메슥하여 고통을 느끼다가 토해 버린 뒤와 같은 가벼운 희열을 안고 돌아가는 것이다.

사람은 일상생활에서 울고 웃으며 살아가고 있다. 그러나 저들의 삶의 밑바닥에는 모순과 부조리가 암석처럼 깔려 있다. 그러나 그것을 제거할 힘이나 용기는 없어 울분 아니면 체념 속에, 불안 아니면 좌절속에서 자기를 망각하는 습성에 젖어 버린다. 그런데 이 비극의 무대에서 그러한 인간의 존재적 모순이 그대로 노정되면 그게 바로 자기가 마주한 것이며 또 자기가 토하고 싶던 울분이기에 마침내 남의 것을 보는 관객이 아니라 그 비극의 주인이 되어 보는 것이다. 자기 인생을 울고나면 지가 운명의 주인이 돼 본 것이기에 그 울음은 웃음이며 비극을 찾는 것은 또한 희극을 찾는 것이다.

비극에 대해서 희극이 있다. 그러나 그것은 형식상의 구분일 따름이다. 참 희극은 웃으면서 울게 한다. 말초신경이나 간지럽혀서 웃게 하는 건 희극이 아니다.

왜 사람은 웃나? 웃고 싶어하나? 기뻐서 웃나? 기쁨이 고조되면 오히려 운다. 너무 처절한 상황에 처해도 껄껄 웃는다. 어처구니가 없어도 웃는다. 웃음은 울음보다 더 심화된 슬픔의 발로일 수 있다.

시험준비하는 아이가 수학문제를 풀다가 깔깔 웃었다. 문제를 푼 기쁨에서 인가 했더니 노트에 여자의 나체를 그리고 웃고 있었다. 그는 8이라는 숫자에 꼭 막혀서 애타다가 좌절됐다. 그에게 8자가 저주스러웠다. 그는 8자 위에 머리를 얹어놓고 그 옆에 팔을 그리고 그 아래 다리를 그녀 여자의 나체를 그리고 모욕적인 표현을 써놓고 웃은 것이다. 결국 이 소년은 꽉 막힌 현실에서 돌파구를 찾은 것이다. 그러므로 그 웃음은 슬픔의 몸부림이지 즐거움의 표시는 아닌 것이다.

요새 웃긴다는 말이 유행한다. 황당무계한 소리라는 말이다. 그러나 바로 그 황당무계한 것이 있어 웃긴다. 유우머는 바로 황당무계한 모티브가 있을 때 재미있다. 기상천외의 것이 일상성을 비웃게 하기에 우스운 것이다. 왜 사람들은 유우머를 하며 또 듣기를 좋아하나? 그것은 꽉 막혀버린 현실에서 숨구멍을 찾자는 심정일 수도 있으나 자기를 억누르고 있는 것에 대한 저항의 고차적 토로일 수도 있는 것이다.

웃음에는 또 다른 차원이 있다.

하느님이 웃겼다.

아브라함 설화 중에 그가 웃었다는 말이 있다. 100세된 그는 90세된 그의 아내가 아들을 낳게 되리라는 하느님의 약속을 듣고 "업드려 웃으며 마음에 이르되 100세된 사람이 어찌 자식을 낳을까? 사라는 90세인데…"고 한다. 하느님이 웃겼다는 말이다. 또 사라도 이 말을 장막 안에서 듣고 "속으로 웃었다"고 한다. 까닭은 이미 경도가 끊긴 자기가 임신한다는 것은 황당무계하게 들렸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 웃음에는 인간의 한계성에 대한 슬픔과 체념이 깔려있다. 아이를 희구한 저들이 그런 약속을 들을 때 기쁘기 전에 인간의 한계성에 부딪힌 것이다. 그렇게 보면 슬픔을 웃음으로 대신한 것이다. 까닭은 그 한계성은 절망적이어서 올 수 있는 한계도 넘어섰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이스라엘이 하느님 앞에 살기를 원하나이다"라고 한다.

그러나 하느님은 이 한계성을 깨뜨렸다. 사라가 정말 임신하고 아들을 낳게 된 것이다. 이 때 아브라함 부부는 정말 웃을 수 있었다.

"하느님이 나로 웃게 하시니 듣는 자가 나와 함께 웃으리라."

이 사라의 말은 참 웃음을 말한다. 이 웃음은 그 약속을 들을 때의 그것과는 전적으로 다른 것이다. 전자는 자기 한계성 앞에서의 체념, 절망의 웃음이요, 그렇기 때문에 불신의 웃음인데 대해서 이 웃음은 그런 것이 깨뜨려지므로 불가능이 가능으로 전환된 사건 앞에서의 희열의 폭발이다. 하느님은 아브라함에게 미래의 약속을 했다. 그러나 그것은 아브라함을 웃겼다. 그러나 두 번의 웃음은 전혀 이질적인 것이었다. 하나는 자기 한계성 앞에서의 절망적인 웃음인데 대해서 하나는 하느님의 무제한성 앞에서의 해방의 웃음이다. 하느님의 약속은 그 성취로 연속성을 지니고 있었는데, 아브라함의 웃음에는 그 약속과 성취 앞에서의 연속이 없고 서로 단절되어 있다.

최근에 예수를 어릿광대로 성격화하는 사람들이 있다. 어릿광대란 희극배우이다. 로마와 같은 세계제국이 제패하고 있으며 유대교가 난공불락의 성벽처럼 버티고 있을 때 예수는 변두리에서 무명의 초민(草民)들과 더불어 새 나라 건설에 몰입하고 있었다. 마침내 예루살렘에 입성했다. 그것은 최후의 대결을 위한 것이다. 그러나 그의 입성의 대열은 사람을 웃기는 것이다. 손에 바늘 하나 갖지 않고 몇몇 초라한 제자들에게 호위되어 조그마한 나귀새끼를 타고 입성하는 그 모습은 분명히 웃기는 것이 아닌가! 동키호테인가? 동키호테는 창이라도 들었었는데! 만일 이런 일이 서울에 벌어진다면 그 관중은 웃지 않을까? 그러나 예수 자신은 엄숙했다. 그러므로 예루살렘을 향한 그의 모습이 너무 엄숙해서 "제자들은 놀라고 뒤에 따라 오는 사람들은 두려워했습니다"(마르 16, 32)고 한다. 군중들은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임금이여 복이 있으라, 하늘에는 평화가 있고 지극히 높은 곳에는 영광이 있으라"고 환호를 올렸다. 유다종교 귀족들은 이것을 어떻게 봤을까? 웃긴다고 보지 않았을까? 그러나 웃기는 한도가 넘었다고 보아 왜 저들을 그냥 두느냐고 했을까? 그러나 예수는 "저들이 잠잠하면 저 돌들이 소리를 지를 것이다"(루가 19, 40)고 응수한다. 어디서 온 자신(自信)인가? 나귀새끼를 타고 권력의 세력자들에게 전진하는 그에게 신술(神術)이라도 있단 말인가? 그러나 아무런 기적도 일어나지 않았고 '약자'는 '강자'와 부딪히면 패배할 수밖에 없다는 '원칙'은 그대로 실현되어 그는 꼼짝 못한 채 저들의 손에 잡혀 죽었다. 그는 웃겼다. 그래서 모두 그를 비웃었으며 제자들은 모두 도망쳤다.

그를 재판하는 장면도 희극의 한토막 같다. 로마제국 전복 죄로 고소되어 조소의 왕관과 왕복을 씌웠다. 그를 비웃은 것이다. 정말 그가 그런 음모를 꾀했었다면 웃을 일이 아니다. 그러나 그런 흔적은 없다. 그러나 예수만이 웃긴 것이 아니다. 처형할만한 죄목은 발견 못하면서 그를 처형하는 빌라도도 웃겼다. 로마제국을 대표한다면 로마법을 준수해야 할 장본인이 법에 의한 죄명을 못찾으면서도 그를 처형함으로 자기가 디디고 선 로마제국을 웃음거리로 만들었다. 그를 끌고 간 유대인들도 민족의 원수인 로마의 카이사르의 충성스러운 신하들로 분장했으니 결국 자기를 비웃고 로마를 비웃었다. 온통 웃음거리가 된 재판장!

마지막 장면도 웃긴다! 사람들의 손에 죽으면서 '나의 하느님 나의 하느님 왜 나를 버리셨읍니까'는 또 무엇인가? 그 소리를 듣고 엘리야가 와서 구해 주나 보자고 한 사람들은 희극의 관중들인가? 비극의 관객인가?

그러나 복음서기자들은 희극을 쓴 것이 아니다. 저들은 그것이 하느님의 뜻의 실현이라고 주장한다. 그렇다면 하느님이 이 세계를 온통 웃긴 것이다. 그러나 다시 보면 이 얼마나 처절한 비극인가? 그러나 비극은 한도를 넘으면 희극이 된다. 그러나 이 희극(?)은 그것으로 끝이지 않는다.

사람들은 예수의 무능한 최후를 웃었다. 그러나 또 한번 크게 웃을 일이 생겼다. 그것은 죽은 그 예수가 살아났다는 증언 때문이다. 죽은 자가 살아나다니? 정말 웃기는 일이다. 그러나 그리스도인들은 사람들이 하느님을 웃겼다고 한다. 생명을 폭력으로 죽여 무덤에 가두는 것으로 끝난다고 생각하는 것이 하느님을 웃기는 일이다. 그러나 이번에는 하느님이 사람들을 웃겼다. 그리스도인들은 정말 웃었다. 그것은 죽음마저도 정복하는 하느님의 능력 앞에서 두려움의 쇠사슬을 끊고 폭발된 웃음이다.

부활 그것은 하느님의 웃음이다. 그것은 인간의 교만과 미련함을 심판하는 웃음이다. 그러므로 그 웃음은 비웃음이다.

2. 웃음과 분노

어찌하여 열방이 소란하며, 민족들이 허사를 경영하는고,
세상의 군왕들이 나서며, 관원들이 나서며,
관원들이 서로 꾀하여 여호와와 그 기름 받은 자를 대적하며,
우리가 그 맨 것을 끊고 그 결박을 벗어 버리자 하는 도다.
하늘에 계신 자가 웃으시며 주께서 저희를 비웃으시리로다.
그 때에 분을 발하며 진노하사 저희를 놀래게 하여 이르기를
내가 나의 왕을 내 거룩한 산 시온에 세웠다 하시리라(시편 2편)

이것은 하느님편에 선 자의 노래이다. 세계의 국가들, 민족들이 하느님의 의에 반기를 들었다. 그들 앞에는 군왕들과 관원들이 섰다. 저들은 하느님과 그의 이름으로 선 자를 적대시하며 자기들 위에 어떤 권위도 거부함으로 스스로 절대권을 가지려고 했다.

저들에 대해서 하늘에 계신 이가 웃었다. 저들은 하느님을 웃긴 것이다. 왜?

아브라함을 하느님이 웃겼다. 까닭은 하느님이 아브라함의 한계성을 무시했기 때문이다. 이에 대해서 저들은 하느님을 웃겼다. 까닭은 저들 자신이 자기들의 한계성을 무시했기 때문이다.

하느님의 웃음은 절대자의 웃음이다. 그의 주권은 무엇도 침범할 수 없기 때문에 아무런 공략에도 웃을 수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하느님이 웃는다는 것은 그러한 불손과 불의에 대해서도 관용한다는 뜻도 된다.

이 시는 영원불변하는 하느님의 섭리데 대한 신앙의 고백이다. 그 어떤 반신적(反神的)인 힘도 이 역사에 향한 하느님의 목표를 좌절시킬 수는 없는 것이다. 이것은 성서에 일관된 신앙이다. 그러나 이 고백은 또한 믿는 자 자신의 약함이 반영되어 있다. 하느님께 선택된 자는 수난한다. 그러므로 울며 절망할 수도 있다. 그러나 절망은 있을 수 없다. 까닭은 하느님은 웃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신앙자의 입장에서는 하느님의 웃음은 칠전팔기의 근거이다.

그러나 웃는 그 하느님은 또한 진노한다. 웃는 하느님은 그의 불공(不攻)의 주권을 나타내는 데 대해서 진노의 하느님은 죄와 벌로 다스리고야마는 하느님을 나타낸다. 웃는 하느님은 관용의 하느님, 참고 기다리는 하느님인데 대해서 진노의 하느님은 심판의 하느님이다.

웃고 있는 하느님! 이것은 역사의 부조리에 고통하는 자들에게 주는 위로이며 동시에 불의한 자들에 대한 경고인데 대해서 진노의 하느님 신앙은 불의한 역사의 종국과 더불어 새 역사의 출현을 가져오는 종말적 확신이다.

3. 하느님이 웃을 때

한 개인이나 어느 계층이 불의를 자행해도 아무런 징벌이 나타나지 않을 때는 하느님이 웃고 있는 때이다. 하느님이 웃고 있는 때는 회오(悔悟)를 촉구하는 때다. 바울은 이 때를 하느님이 "저들을 … 내버려 두었다"(로마 1, 24)고 한다. 인간이 진리를 거짓 것으로 바꾸고 피조물을 절대화해도 그대로 내버려 둔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방치해 버린다는 뜻이 아니라 이 때가 어느 때인지, 지금 하고 있는 일이 무엇을 뜻하는지 바로 깨닫도록 주어진 기회임을 말한다. 그러므로 하느님이 웃는 때는 불의한 자들이 함께 웃을 때가 아니라 회오의 눈물을 흘려야 할 때이다. 하느님이 웃는 때란 바로 그가 침묵하는 때이다. 침묵하는 순간처럼 무서운 때는 없는 것이다.

하느님이 침묵하는 때는 하느님이 웃는 때이다. 그러므로 믿는 자는 비록 불의한 세력이 온 천하를 영원히 지배하는듯 해도 웃는 하느님을 믿으므로 웃는다. 그러므로 시편기자는 "행악자를 인하여 불평하지 말며 불의를 행하는 자를 투기하지말라", "여호와앞에 잠잠하고 참아 기다리라"고 하는데 까닭은 비록 "악인이 죄인치기를 꾀하고 저들을 향하여 이(齒)를 갈더라도 주께서 저를 웃으시기" 때문이라고 한다(시편 37). 그러므로 하느님이 웃을 때는 불의한 자에게는 회오의 최후의 기회며 수난하는 자에게는 내일을 믿고 준비하는 신앙의 때이다.

하느님이 웃는 때, 그가 침묵할 때에 불의한 자는 제 계획대로 되는 것에 만족해 웃으며, 그위에 간섭하는 것을 못 느끼기 때문에 점점 오만해지며 수난자는 당면한 부조리에 지쳐서 운다.

그러나 하느님의 웃음은 진노로 바뀔 때를 전제로 하는 것이다. 그것은 심판의 때이다. 그것은 회오의 기회도 준비의 기회도 지나간 때이다. 심판의 때는 "이미 늦었다"가 그 특징이다. 이 날은 희극과 비극이 웃음과 울음이 이중적인 성격을 탈피하고 선명하게 갈라지는 때이다.

우리는 어느 때에 있는가? 하느님이 웃는 때인가? 진노의 때인가? 우리는 지금 웃어야 할 때에 서 있는가? 울어야 할 때인가? 우리가 운다면 무엇 때문이며, 웃는다면 왜? 오늘을 위기라고 하는가? 그렇다면 오늘에 우는 자가 웃고, 웃는 자가 우는 전환의 전 단계에 있다는 말이다.


List of Articles
바알 (열상 19, 18)
남은 칠천 명 (19, 7-18)
민중의 손으로 통일되는 날 (아모 9, 11-15)
겨울은 가고 (에제 37장)
에제키엘이 무등산에서 절규한다 (에제 24, 6-8)
포로에서의 탈출 (이사 66, 1-8)
위정자와의 대결 (이사 7, 10-14)
   
제5부 새로운 존재
일상성과 비일상성 (루가 10, 38-42)
그래도 다시 낙원에로 환원시키지 않았다 (창세 3, 1-10)
새로운 인간상 (창세 12, 1-9)
믿음의 조상 (창세 22, 17-18)
두 사이 에 손을 얹을 판결자 (욥기 9, 25-35)
하느님으로부터의 도피 (시편 139편)
하느님의 웃음 (시편 2편)
잠과 신앙 (시편 127편)
교회란 무엇인가 (로마 8, 9-30)
인간을 말한다 (마르 12, 28-34)
존재 근거 (시편 42편)
우주의 품으로 (시편 8,3 이하)
   
판권
표지
예수의 민중사건 : 『민중과 성서』를 내면서
   
제1부 복음서와 민중
   
예수와 민중 : 마르코복음을 중심으로
    1. 전제
    2. 마르코복음 안의 오클로스
    3. 마르코복음에 나타난 오클로스의 성격
        1) 오클로스의 성격
        2) 오클로스에 대한 예수의 행태
        3) 종합
    4. 예수를 따른 자들
    5. 마르코복음 안에 있는 어록
    6. 오클로스의 언어학적 의미
        1) 라오스와 오클로스
        2) 오클로스와 암 하 아레츠
    7. 종합
마르코복음에서 본 역사의 주체
    1. 전제
    2. 마르코의 삶의 자리
    3. 마르코의 민중신학의 기조
        1) 세례자 요한이 잡힌 후(14a절)
        2) 갈릴래아로 가다
        3) 하느님 나라의 도래 선포
    4. 민중의 행태
예수사건의 전승 모체
    1. 문제 제기
    2. 케리그마의 성격
        1) 고린토전서 15장 3~8절
        2) 필립비서 2장 6~11절
        3) 사도행전에 나타난 케리그마
    3. 민중언어의 성격
    4. 수난사
    5. 예수의 행태 일반
        1) 기적 이야기와 예수의 행태
        2) 아포프테그마와 예수의 행태
        3) 로기온(Logion, 어록)과 예수의 행태
    6. 결론
가난한 자 : 루가의 민중 이해
    1. 가난한 자
        1) 통계적 고찰
        2) 루가의 특수자료
        3) 예수의 탄생설화와 나자렛 선언
        4) 마르코와 Q자료
    2. 루가복음서의 청중
    3. 결론
마태오의 민중적 민족주의
    1. 문제 제기
        1) 마태오의 신학적 주제에 대한 논의들
        2) 문제 제기
    2. 마태오가 처한 현실
        1) 마태오와 그의 시기
        2) 민족적 와해 위기
    3. 마태오의 현실인식
        1) 이스라엘 : 길 잃은 양들
        2) 길 잃은 양이 놓여 있는 현실
    4. 민족동일성 재확립
        1) 뿌리 찾기
        2) 바리사이파가 주도하는 라삐 유다교와의 대결
    5. 마태오의 민중 이해
        1) 언어적 성격
        2) 의식화된 민중
    6. 맺는 말
민중신학의 성서적 근거 : 마르코복음을 중심으로
    1. 예수사건의 재발견
    2. 마르코복음과 민중
    3. 민중은 수단이 아니다
    4. 민중은 객체일 수 없다
    5. 십자가는 민중수난의 극치다
민중신학의 어제와 오늘
    1. 독재와 대항하므로
    2. 민중을 만나므로
    3. 민중과 더불어
   
제2부 민중운동사
   
민중사건과 언어사건
    1. 성서에서 본 말의 성격
        1) 그 말의 현장은 어떤 것이었나
        2) 예수의 경우
        3) 예수사건에 관한 전승
        4) 오순절의 말 사건
    2. 무엇으로 말하는 것인가
    3. 해야 할 말은 무엇인가
    4. 우리가 해야 할 말
미래는 가난한 자의 것 : 루가 6장 20~26절
    1. 축복과 저주
    2. 가난한 자와 부요한 자
    3. ‘지금’과 ‘장차’
    4. 우리의 선택
나라가 임하옵소서
    1. 예수의 기도
    2. 그의 기도를 전달받은 자들
    3. 하느님의 나라
고향 잃은 민중
    1. 피난민
    2. 성서에서 본 피난민문제
    3. 게르(GER) 문제 해결의 시도
    4. 이방인에 대한 관용의 한계
    5. 당면한 과제
        1 ) 새로운 인식을 위한 운동
        2) 실천에 대한 몇 가지 제언
이스라엘 민중사
    1. 머리말
    2. 출애굽
    3. 고대 이스라엘 종족동맹
    4. 민중을 배반하고 세워진 왕권
    5. 분단시대의 고난
    6. 민중운동의 여러 계열
    7. 예수의 민중운동
    8. 맺는 말
   
제3부 민중과 체제
   
민중사실의 증언
    1. 민중신학의 전제들
    2. 민중사실의 증언
고난과 고백
    1. 수난자와의 일치
    2. 마르코의 민중
    3. 수난사와 고난
    4. 더불어의 고난
    5. 맺는 말
갈릴래아 민중에 항복한 바울로
    1. 바울로의 위치
    2. 사울은 어떤 사람인가
    3. 그리스도교 박해
    4. 예수를 만남
    5. 전향
    6. 맺는 말
소명(召命)
    1. 바울로의 소명
    2. 사도 됨과 소명
    3. 이방인에게로
바울로와 역사의 예수 I
    1. 머리말
    2. 예수에 대한 바울로의 말
    3. 예수냐 바울로냐
    4. 왜 예수가 아니고 케리그마인가
선택받은 민중: 고린토전서 1장 26~31절
    1. 고린토교회 구성원의 사회계층
    2. 공동체원의 가치 판단 기준
    3. 민중을 보는 눈
    4. 택함을 받은 민중
   
제4부 예수의 희망
   
하늘도 땅도 공(公)이다
    1. 낙원 이야기
    2. 아담一인간
    3. 실락원은 공을 사유화함으로
갈릴래아에서 만나자: 마르코 16장 1~8절
    1. 제3의 자리
    2. 갈릴래아
    3. 갈릴래아에서 만나자
예수의 희망
    1. 새 세계에의 희망
    2. 희망과 세계혁명
    3. 바른 인간공동체의 희망
    4. 맺는 말
   
판권
표지
예수는 논하지 않았다
   
제1부 민중의 언어, 이야기
   
1. 성서라는 책의 성격
2. 성서의 서술양식
    1) 구약성서
    2) 신약성서
    3) 민중언어
   
제2부 예수의 이야기(비유)
   
1. 만성병에 걸린 세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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