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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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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과 신앙
시편 127 편
 
1

하느님께서 집을 세우지 아니하시면
세우는 자의 수고가 헛되며
하느님께서 성을 지키지 아니하시면
파숫군의 경성함이 허사로다.
너희가 일찍 일어나고 늦게 누우며 수고의 떡을 먹음이 헛되도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그 사랑하는 자에게 잠을 주시는도다.

이 시는 2500여년 전 한 시인의 입술을 통한 하느님의 뜻이지만 오늘의 우리의 상황을 그대로 말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우리는 무엇인가를 건설하고, 그 건설한 것을 지키기 위해 거의 모든 시간을 바치며 정말 바쁘게 살고 있습니다. 우리는 근대화다, 발전이다 하여 날로 바빠지는 것을 정상적인 적으로 생각하지만 바로 이 점이 다시 생각해야 할 문제라고 봅니다. 우리는 계속 무엇이든 구상하고, 설계하고 운영해 나가야만 살도록 되어 있습니다. 이제는 소위 1차적인 산업시대는 지나 거의 모든 것이 전체적으로 얽혀 있습니다. 이 전체적 연관성의 연쇄작용 때문에 아무리 애를 써도 혼자의 힘 만으로는 잘 되어지는 일이 없습니다. 우리는 세계가 발달을 하고 편리해진다는 것을 보고 있지만 그 반면에 인간이 점점 일에 쫓기어 마음의 여유를 잃어 가고 있다는 것은 잊고 있습니다. 현대의 특징은 급속한 변화입니다. 불과 1, 2년 사이에 과거 수백년에 걸쳐 이루어졌던 것보다 더 큰 변화를 일으키고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점차 안심하고 정좌할 수 있는 장소나 시간을 잃어 가고 있습니다. 우리가 가진 어떤 것이든 조금만 두어 두면 상황이 달라져서 무용한 것이 되어 버리고 맙니다. 어제까지 가치있던 것이 오늘 순식간에 무의미한 것으로 전락해 버립니다. 이 급변 속에선 언제나 힘의 균형에 공백이 생기기 마련입니다. 그리고 이 공백의 사이를 뚫고 합법적이건 비합법적이건 어떤 다른 힘이 침투해 오려고 하기 때문에 자기를 유지하기 위해선 어쩔 수 없이 치열한 공방전을 계속해야만 합니다. 느는 것은 서로에 대한 경계 뿐입니다. 그래서 불신은 또 하나의 현대의 특징이 되었습니다. 세계는 분명히 공동 운명이 되어가고 있지만 내용적으로 보면 이와는 반대로 내 것은 내가 지켜야 하고 내 일은 내가 해야 한다는 상황으로 사람들을 몰아 넣고 있습니다. 그러나 아무리 버티어도 또 다른 세력이 내 영역을 침범할 틈이 생기고 불안은 가중됩니다. 이제 우리는 정치, 경제, 사회 … 어느 면에서고 자기를 지탱하기엔 힘의 한계점에 도달하였음을 절감합니다.

2

본문의 말씀은 듣는 사람의 입장에 따라 두 가지가 될 수 있습니다. 우선 이 말씀은 건설하는 것이나 그것을 지키는 일은 내가 해야 한다. 나밖에는 아무도 할 수 없다고 생각하는 사람에게는 "네가 아무리 애를 써도 네가 건설한 것이 네 것이 될 수 없다. 네가 아무리 눈을 똑바로 뜨고 파수꾼 노릇을 할지라도 네가 그것을 지킬 수는 없다"는 일종의 경고가 됩니다. 반면에 점점 더 자기 자신의 한계성을 느껴 나는 도저히 내 운명을 내가 처리할 수 없다고 생각하고 오히려 불안해 하는 사람에게는 "걱정말라, 정말 건설하는 이, 이끌어 가는 이, 그리고 정말 지켜주시는 이, 곧 네 운명의 주인은 너 자신이 아니라 바로 나다. 너는 안심하라. 내가 너를 지켜준다"는 격려와 위로의 말씀이 될 것입니다. 그런데 이 말씀 속에는 허무주의적인 인상이 짙은 것을 엿볼 수 있습니다. 즉 네가 새벽부터 밤중까지 애를 쓰고 일을 해보아야 그 수고의 대가로 네가 차지한게 무엇이냐는 것입니다. 성서의 표현대로 하면 결국 떡을 얻은 것인데 그게 다 허무한게 아니냐 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허무주의적인 표현이기는 하지만 엄숙히 생각하면 사실은 사실입니다.

그런데 본문의 초점은 마지막 구절인 "그러므로 하느님께서 잠을 주시도다"에 있습니다. 그 뜻을 요약하면 사람들에게 잠을 자게한 것은 바로 하느님의 사랑의 표시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왜 "그러므로"라는 표현을 썼는가 하는 것입니다. 그것은 이렇게 해 보아도 저렇게 해 보아도 결국은 남는 게 없으니까 잠을 주어 좀 푹 쉬게 한다는 뜻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잠은 사랑하는 자에게 허락한 은혜라는 것입니다. 잠과 은혜, 잠과 하느님의 사랑을 연결한 것은 현대인에게는 납득이 어려운 내용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잠이 바로 하느님께서 나를 사랑하기 때문에 주신 은혜라는 것을 생각해 본 적이 있는가 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만일 우리가 잠을 잘 수 없다면…" 하는 반대의 면을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그러면 아마 우리는 생존경쟁 속에서 생긴 독소 때문에 불과 1주일 내에 미쳐버릴 것입니다. 사람이 하루 종일 애를 쓰고 수고하는 동안에 생리적으로 어떤 독소가 생겨서 그게 다시 정화되려면 8시간 동안을 무의식 세계로 들어가야 한다고 합니다. 그러는 동안에 신진대사의 작용을 해서 그 독소가 제거된다는 것입니다. 어쨌던 잠을 자지 못한다면 우리는 오래 살지 못할 것입니다.

아무리 피곤하고 어려운 일이 있어도 잠은 불가항력적으로 우리를 무의식의 세계로 끌고 갑니다. 하루에 8시간 동안, 그래서 잠은 우리의 삶의 1/3을 점령합니다. 50살이 된 사람은 17년 동안을 계속 잤습니다. 20살쯤되면 7년 동안을 계속 잤습니다. 참 기막힌 일입니다. 그 사이에 나는 아무 의식도 못하고 일단 나를 무엇엔가 내맡기고 살았습니다. 누구보다도 똑똑하다고 자랑하던 사람들도 자기 운명을 그렇게 내동댕이 쳤습니다.

그런데 삶의 1/3을 점령하는 이 긴 시간 동안, 불가항력적으로 점령되는 이 기간, 이 현실을 우리는 그리스도인으로서 어떻게 생각해야 할 것인가 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여기 대해서 너무 등한히 하지 않았나 하는 생각이 듭니다. 물론 본문의 뜻은 네 운명을 내게 맡기고 푹 쉬라는 것이지만 다른 측면에서 좀 생각을 해보아야 되지 않을까 합니다.

3

사람들은 자기의 의식상태에서는 언제나 자기 자신을 자기가 수호하지 않으면 안 된다고 생각하여 모든 것을 총동원해서 자기방어와 수호에 급급합니다. 그런데 사람은 의식하든 의식하지 않든 간에 하루에 8시간 동안을 무얼 믿고 그러는지 잠이라는 것에 송두리째 자기를 내맡겨 버립니다. 우리가 문제하는 것은 하루에 8시간 동안, 하여간 삶의 1/ 3을 그렇게 무의식 세계에 내 맡길 수 있다면 우리가 깨어 있는 동안의 어느 순간에도 마치 잠에서 자기를 내맡기듯이 자기를 내맡기는 부분이 있을 수 있지 않겠나 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각 사람의 처지에 따라 깊이 반성해 보아야 할 문제라고 생각합니다. 우리는 무엇엔가 맡겨 두어야 할 시간까지를 동원해서 자기를 유지하고 있기 때문에 오히려 불안과 공포에 사로잡히고 생의 무의미성 속으로 빠져 들지 않나 하는 반성이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남이 나를 어떻게 생각할까?" 하는 내 손이 전혀 미치지 못하는 문제에까지 걱정을 하고, 혹은 전쟁이 일어나면 어떻게 될까 하는 생각 같은 것을 앞당겨 하고서 신경과민이 됩니다. 또 과거로 이끌어 가서 "내가 그랬더라면 …" 하는 시시한 생각까지 하고서 그냥 고뇌를 계속합니다. 사람에 따라 다르겠지만 중요한 것은 무엇과 비교하지 말고, 현재의 자기 처지를 과감하게 감수하고, 또 내게 어떤 일이 다가와도 당황하지 않고 자기를 확 내맡길 수 있는 그런 영역이 우리에게 있어야 할 것입니다.

우리는 모르는 동안에 서구적인 사고나 생활양식을 철칙처럼 생각하고 동양적인 것을 멸시해 왔는데 이제는 좀 더 폭을 넓혀 삶을 주시해야 할 것입니다. 그리스도교란 역시 서구에서 형성됐기 때문에 그 내용이나 성격을 보면 언제나 의식상의 세계에서 활동하고 진취적인 일에 총 집중하고 이것만 고취해 온 나머지 이른바 동중정(動中靜), 즉 차분히 가라앉은 그러면서도 확고히 서서 자기를 내맡기는 이런 안정된 자리가 없다는 것이 그 약점이 아닌가 생각됩니다. 동양의 선사의 그림을 보면 배꼽이 드러나게 배를 내놓고 얼굴은 꼭 바보에 가까운 표정을 하고 있습니다. 어떤 그림을 보면 사람이 오고 가는 길에 아무렇게나 누워서 배꼽을 내놓고 쿨쿨 자고 있습니다. 어떻게 보면 될 대로 되라는 듯이 자기를 내맡긴 모습입니다. 이렇게 안심하고 깊이 잠이 든 모습, 이 정(靜)의 모습, 이름으로는 하느님이라는 말을 쓰고 있지 않지만 이렇게 자기를 확 내맡긴 모습에서 오히려 중요한 삶의 일면을 보고, 우리는 이러한 면을 잃어가고 있지 않는가 하는 아쉬움을 느낍니다. 물론 동기는 다른 데 있지만 성서에도 풍랑에 위협받는 조각배 위에서 예수님이 쿨쿨 자고 있었다는 기록이 있습니다. 어떻게 보면 그렇게 심각하게 밤낮 깨어 있는 분이지만 자신을 내맡기고 깊이 잠들 수 있는 그의 동중정의 모습을 이곳에서 볼 수 있습니다.

역사는 밤에 이루어진다는 말이 있습니다. 그러나 이말은 인간의 암약에 의해서 역사가 이루어진다는 뜻은 아닙니다. 오히려 인간이 다 자는 동안에도 깨어 있어서 역사를 조정하는 주인이 있음을 의미하는 말입니다. 우리는 평면적으로 움직이면서 내가 움직이는 이것이 역사를 결정한다고 보기 쉽지만 그것은 실제에 있어 극히 미소한 부분에 지나지 않는 것이고 역사의 방향을 결정하는 이는 따로 있다는 그런 확신이 있어야 할 것입니다. 이스라엘은 이런 신앙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시편 121편에는 "이스라엘을 지키시는 이는 졸지도 않고 주무시지도 않는다"는 고백이 있습니다. 우리는 오랫동안 의식상의 세계에 삶을 한정시키고 거기에서 데이타를 찾고, 절대확률을 구했는데 여기에 큰 잘못이 있지 않았나 하는 생각이 듭니다. 우리의 역사는 하느님이 결정한다고 믿습니다. 표면상에 나타난 인간의 활동이란 거의 보잘 것 없다는 것을 우리는 알고 있습니다.

이제 우리는 삶의 많은 부분을 점유한 무의식의 세계, 잠이라는 이 현실을 중시하고 내가 자고 있는 동안에도 나를 지키시는 이를 생각하자는 것입니다. 마치 예수의 비유에서 농부가 자고 깨고 하는 동안에 곡식은 그 어떻게 되는 것을 알 수 없이 자랐다고 하는 것처럼 우리도 역시 내가 자고 있는 동안에도 계속 나를 지키시는 어떤 이의 손길을 느끼고 있어야 하겠다는 것입니다. 우리에겐 점차 자기 전에 드리는 기도가 희미해져 가고 있지만 기도의 형식은 어떻든 나를 맡기고 평안히 잠들 수 있음이 중요합니다. 그리고 잠에 나를 내맡기는 것이 존재적으로 믿음의 자세라는 것을 생각했으면 좋겠습니다. 그리고 이렇게 잠에서 나를 맡기듯이, 깨어 있는 동안에도 일상생활 전반에서 그야말로 어느 한계에까지 가서는 확 나를 내맡길 수 있는 그런 믿음을 찾아야 하겠다는 것입니다.

어떤 의미에선 이것만으로도 족할 것입니다. 그러나 진일보 해서 우리는 남이 다 잘 때 자고 있는 자를 위해서 깰 수 있는 현실도 생각해야 하겠습니다. 특히 어머니들은 언제나 경험을 하시지만 사랑하는 자식의 잠자는 그 얼굴을 바라볼 때면 아마 참 기도가 나올 것입니다. 그리고 오래도록 눈을 뜨고 곤히 잠든 그들을 지켜주고 싶은 마음이 될 것입니다. 정말 가정의 주인이 된 입장에서 다 잘 때에 문을 단속하고, 이불을 차버리고 자는 것을 다시 덮어주는, 비록 자고 있는 자는 모르지만 이런 손길이 있어 평안히 잘 수 있음을 부모들은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한 부모로서, 혹은 가정의 주인으로서 하는 이 섬세한 남이 잘 때도 깨어 있는 마음을 가정이라는 영역에 멈추지 말고 일보 더 확대시킬 수가 없겠습니까! 모두 모르고 있을 때 조용히 그의 위험을 막아주고 그의 상처를 싸매어 주는 그같은 밤의 파수꾼이 되는 기회를 나는 하느님과 더불어 깨어서 가지고 싶다는 기도가 꾸밈없는 우리의 마음이 될 수는 없겠습니까?


List of Articles
바알 (열상 19, 18)
남은 칠천 명 (19, 7-18)
민중의 손으로 통일되는 날 (아모 9, 11-15)
겨울은 가고 (에제 37장)
에제키엘이 무등산에서 절규한다 (에제 24, 6-8)
포로에서의 탈출 (이사 66, 1-8)
위정자와의 대결 (이사 7, 10-14)
   
제5부 새로운 존재
일상성과 비일상성 (루가 10, 38-42)
그래도 다시 낙원에로 환원시키지 않았다 (창세 3, 1-10)
새로운 인간상 (창세 12, 1-9)
믿음의 조상 (창세 22, 17-18)
두 사이 에 손을 얹을 판결자 (욥기 9, 25-35)
하느님으로부터의 도피 (시편 139편)
하느님의 웃음 (시편 2편)
잠과 신앙 (시편 127편)
교회란 무엇인가 (로마 8, 9-30)
인간을 말한다 (마르 12, 28-34)
존재 근거 (시편 42편)
우주의 품으로 (시편 8,3 이하)
   
판권
표지
예수의 민중사건 : 『민중과 성서』를 내면서
   
제1부 복음서와 민중
   
예수와 민중 : 마르코복음을 중심으로
    1. 전제
    2. 마르코복음 안의 오클로스
    3. 마르코복음에 나타난 오클로스의 성격
        1) 오클로스의 성격
        2) 오클로스에 대한 예수의 행태
        3) 종합
    4. 예수를 따른 자들
    5. 마르코복음 안에 있는 어록
    6. 오클로스의 언어학적 의미
        1) 라오스와 오클로스
        2) 오클로스와 암 하 아레츠
    7. 종합
마르코복음에서 본 역사의 주체
    1. 전제
    2. 마르코의 삶의 자리
    3. 마르코의 민중신학의 기조
        1) 세례자 요한이 잡힌 후(14a절)
        2) 갈릴래아로 가다
        3) 하느님 나라의 도래 선포
    4. 민중의 행태
예수사건의 전승 모체
    1. 문제 제기
    2. 케리그마의 성격
        1) 고린토전서 15장 3~8절
        2) 필립비서 2장 6~11절
        3) 사도행전에 나타난 케리그마
    3. 민중언어의 성격
    4. 수난사
    5. 예수의 행태 일반
        1) 기적 이야기와 예수의 행태
        2) 아포프테그마와 예수의 행태
        3) 로기온(Logion, 어록)과 예수의 행태
    6. 결론
가난한 자 : 루가의 민중 이해
    1. 가난한 자
        1) 통계적 고찰
        2) 루가의 특수자료
        3) 예수의 탄생설화와 나자렛 선언
        4) 마르코와 Q자료
    2. 루가복음서의 청중
    3. 결론
마태오의 민중적 민족주의
    1. 문제 제기
        1) 마태오의 신학적 주제에 대한 논의들
        2) 문제 제기
    2. 마태오가 처한 현실
        1) 마태오와 그의 시기
        2) 민족적 와해 위기
    3. 마태오의 현실인식
        1) 이스라엘 : 길 잃은 양들
        2) 길 잃은 양이 놓여 있는 현실
    4. 민족동일성 재확립
        1) 뿌리 찾기
        2) 바리사이파가 주도하는 라삐 유다교와의 대결
    5. 마태오의 민중 이해
        1) 언어적 성격
        2) 의식화된 민중
    6. 맺는 말
민중신학의 성서적 근거 : 마르코복음을 중심으로
    1. 예수사건의 재발견
    2. 마르코복음과 민중
    3. 민중은 수단이 아니다
    4. 민중은 객체일 수 없다
    5. 십자가는 민중수난의 극치다
민중신학의 어제와 오늘
    1. 독재와 대항하므로
    2. 민중을 만나므로
    3. 민중과 더불어
   
제2부 민중운동사
   
민중사건과 언어사건
    1. 성서에서 본 말의 성격
        1) 그 말의 현장은 어떤 것이었나
        2) 예수의 경우
        3) 예수사건에 관한 전승
        4) 오순절의 말 사건
    2. 무엇으로 말하는 것인가
    3. 해야 할 말은 무엇인가
    4. 우리가 해야 할 말
미래는 가난한 자의 것 : 루가 6장 20~26절
    1. 축복과 저주
    2. 가난한 자와 부요한 자
    3. ‘지금’과 ‘장차’
    4. 우리의 선택
나라가 임하옵소서
    1. 예수의 기도
    2. 그의 기도를 전달받은 자들
    3. 하느님의 나라
고향 잃은 민중
    1. 피난민
    2. 성서에서 본 피난민문제
    3. 게르(GER) 문제 해결의 시도
    4. 이방인에 대한 관용의 한계
    5. 당면한 과제
        1 ) 새로운 인식을 위한 운동
        2) 실천에 대한 몇 가지 제언
이스라엘 민중사
    1. 머리말
    2. 출애굽
    3. 고대 이스라엘 종족동맹
    4. 민중을 배반하고 세워진 왕권
    5. 분단시대의 고난
    6. 민중운동의 여러 계열
    7. 예수의 민중운동
    8. 맺는 말
   
제3부 민중과 체제
   
민중사실의 증언
    1. 민중신학의 전제들
    2. 민중사실의 증언
고난과 고백
    1. 수난자와의 일치
    2. 마르코의 민중
    3. 수난사와 고난
    4. 더불어의 고난
    5. 맺는 말
갈릴래아 민중에 항복한 바울로
    1. 바울로의 위치
    2. 사울은 어떤 사람인가
    3. 그리스도교 박해
    4. 예수를 만남
    5. 전향
    6. 맺는 말
소명(召命)
    1. 바울로의 소명
    2. 사도 됨과 소명
    3. 이방인에게로
바울로와 역사의 예수 I
    1. 머리말
    2. 예수에 대한 바울로의 말
    3. 예수냐 바울로냐
    4. 왜 예수가 아니고 케리그마인가
선택받은 민중: 고린토전서 1장 26~31절
    1. 고린토교회 구성원의 사회계층
    2. 공동체원의 가치 판단 기준
    3. 민중을 보는 눈
    4. 택함을 받은 민중
   
제4부 예수의 희망
   
하늘도 땅도 공(公)이다
    1. 낙원 이야기
    2. 아담一인간
    3. 실락원은 공을 사유화함으로
갈릴래아에서 만나자: 마르코 16장 1~8절
    1. 제3의 자리
    2. 갈릴래아
    3. 갈릴래아에서 만나자
예수의 희망
    1. 새 세계에의 희망
    2. 희망과 세계혁명
    3. 바른 인간공동체의 희망
    4. 맺는 말
   
판권
표지
예수는 논하지 않았다
   
제1부 민중의 언어, 이야기
   
1. 성서라는 책의 성격
2. 성서의 서술양식
    1) 구약성서
    2) 신약성서
    3) 민중언어
   
제2부 예수의 이야기(비유)
   
1. 만성병에 걸린 세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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