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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회란 무엇인가
로마 8, 9-30
 
1. '교회'라는 개념

교회를 희랍어로 '에클레시아'(ekklesia)라고 한다. 이 말은 질서에 따라서 선정된 정치 단체의 모임 또는 단순히 어떤 목적을 위한 사람들의 모임을 뜻했는데, 이스라엘 사람들이 이 단어를 사용할 때 "거룩한 뜻을 이루기 위한 이스라엘 사람들의 모임"이라는 뜻으로 사용했다.

그런데 처음 그리스도교에서 그들의 모임을 '에클레시아'라고 불렀는데, 다음의 몇가지 뜻으로 사용했다. 첫째는, 단순히 그리스도 인들의 공동체(고전 11, 18)를 뜻한 것으로서 어떤 일정한 장소(집)에 모이는 것을 전제했다(로마 16, 5). 그런 경우는 개체적인 모임을 뜻한다. 둘째는 그리스도인의 모임을 우주적인 성격을 가진 공동체로서 하느님에 의해서 부름을 받은 자들의 모임이라고 했다(마태 16, 18; 고전 6, 4; 12, 28). 셋째로 신약(특히 바울)에서 가장 본질적으로 나타낸 것은 이 우주적인 그리스도인의 모임을 '하느님의 교회' 또는 '그리스도의 교회'라고 인식한 것이다(고전 1,2; 10,32; 11,16; 고후 1,1; 갈라 1,13; 로마 16,16; 살전 1,1).

그러므로 교회란 비록 인간들이 모이는 공동체이면서도 인간이 주재가 되는 것이 아니라 어디까지나 하느님이 주재하는 공동체가 교회라는 전통이 이루어졌다. 이런 전제에서 교회의 성격의 특징을 살펴보자.

2. 교회의 탄생

도대체 교회는 언제 어떻게 어떤 근거에서 시작되었는가? 이것은 교회의 성격을 아는 데 중요한 문제이다. 가령 희랍적으로 말하면 나라를 남에게 빼앗겼다가 해방을 맞아 헌법과 지도체제를 이루기 위해서 국회를 만든 것을 '에클레시아'라고 할 것이다. 이런 경우에는 해방된 것이 동기요, 대표를 투표로써 뽑아서 선출된 사람들이 모여서 조직을 가지는 것이다. 그 목적은 나라를 건설하는 데 있다. 그런데 이스라엘의 경우에는 하느님이 이스라엘 민족을 선택하여 계약을 한 뜻으로 율법을 주므로써 그것이 이스라엘이라는 에클레시아의 근거가 됐다. 그러면 그리스도의 교회는 어떻게 시작됐는가?

예수 자신은 생존시에 교회를 세우지 않았다. 그는 하느님의 나라가 임박했으니 그 나라를 맞이할 준비를 하라고 촉구했다. 그에게 많은 제자들이 따랐다. 그러나 예수는 로마의 정권에 의해서 억울하게 처형됐다. 그 때 그를 따르던 제자들은 비겁하게도 모두 흩어져 버렸다. 이것으로 모든 일이 끝났다면 교회라는 것이 생겨나지 않았을 것이다.

그런데 맥없이 처형되어 죽은 줄 알았던 그 예수가 부활했다. 죽은 자가 죽음을 박차고 살아났다는 이 사실이 그를 따르던 사람들을 실의(失意)에서 되살아나게 했으며 그들은 이 사실에 힘을 얻고 그들이 따르던 예수는 정말 우리가 기다리던 하느님의 아들이며, 우리를 구원하기 위해 하느님이 보낸 구원자라는 사실을 전파하기 시작했다. 이것을 위해서 저들은 한 집(마르코의 다락방)에 모였다. 그리고 거기서 저들은 새로운 희망에 부풀어서 함께 기도와 증언을 하면서 이제부터 해야 할 과제를 의논했다(사도 1장). 이것이 교회의 탄생의 날이다. 그러므로 교회는 어디까지나 예수의 부활 사건에 의해서 이루어졌다.

3. 교회의 발동

이렇게 모이게 된 그리스도인들은 이제 무엇을 어떻게 무슨 방법으로 할 것인지를 모색하고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인간들의 어떤 모임처럼 의장을 선택하고 부서를 짜고, 계급을 형성해서 명령계통을 확립함으로써 발동한 것이 아니다. 저들이 함께 모였을 때 '성령'이 강림했다. '성령'은 무엇이며 무엇을 명령했는가?

'성령'이 무엇인지는 어떤 일이 일어났느냐를 바로 보면 알 수 있다. 그것은 분명히 예기하지도 못했던 일이다. 그런 뜻에서 심리적으로 설명할 수 없다. 단지 놀라운 사실은 그 모임에 비록 같은 이스라엘 사람들이지만 여러 나라에 흩어져서 살았기 때문에 자기나라 말을 다 잊어버린 탓으로 서로 의사소통을 할 수 없었던 무리들이 갑자기 의사소통을 할 수 있고 말을 알아들을 수 있고 말의 의미를 알 수 있게 됐다(사도 2장). 그런데 이것은 무엇을 뜻하는가?

첫째, 저들 사이의 지역적 장벽이 무너짐으로써 한 형제가 됐다.

둘째, 저들 사이를 가로 막은 언어의 장벽이 무너짐으로 한 뜻을 가질 수 있는 공동체가 됐다.

셋째, 저들이 함께 깨달은 것은 예수의 십자가 사건이 단순히 그가 약하고 무능해서 강한 자의 손에 힘없이 패배하고 죽음 앞에 굴복한 것이 아니라, 그것은 인간과 그 역사의 모든 죄를 그의 죽음과 더불어 영원히 매장하고 이제 새로운 역사를 시작하는 창조의 순간이 바로 부활이라는 사실을 함께 깨닫게 된 것이다.

이 순간부터 저들은 그저 모여서 기도나 하고 옛날이나 회상하는 것이 아니라 동적 공동체로서 온 세계에 흩어져서 이 사실을 증거함으로 온 세계를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구원하는 사도들이 되도록 한 것이다. 그것이 바로 오순절이며 그런 뜻에서 오순절은 교회가 그 본질을 발동하는 날이 된 것이다. 이로써 교회는 단순히 그리스도의 부활에 힘을 얻은 사람들이 용기를 찾아서 조직을 이루고 대열을 정비하여 복음전선에 나선 단체가 아니라 언제나 '성령'이 함께하는 그런 공동체라는 것을 의미한다. 또한 이렇게 발동함으로써 유대교처럼 민족이라는 장벽은 무너지고 온 세계의, 세계를 위한 공동체가 되었다.

4. 교회의 최후목표

바울은 교회를 다음과 같이 규정했다. 그것은 '교회는 그리스도의 몸'이라는 것이다(고전 12,12 이하).

무슨 뜻인가? 교회라는 것은 그리스도를 믿는 자들 즉 그리스도를 중심으로 뜻을 같이 하는 모임이 아니라, 바로 '그리스도의 몸'이라는 것은 어떤 목적을 위해 모였다가할 일을 다했거나 뜻이 맞지 않으면 흩어질 수 있는 정치나 사회 단체 같은 것이 아니라 한 유기체가 됐다는 것이다.

유기체는 각기 자기 할 분야가 있다. 바울이 말한 대로 사람의 몸에는 눈, 코, 입, 팔, 다리 등의 지체들이 있어 각기 제 할 일을 하는 것은 결국 '한 몸'을 위한 것이며, 그렇게 함으로써 한 몸이 된다. 교회가 그리스도의 몸이며 그리스도인 한 사람 한 사람 또는 한 그룹 한 그룹들은 각기 자기에게 주어진 장소와 상황에서 그것에 알맞는 방법으로 활동한다. 그러나 그것은 독자적인 주체들이 아니고 합해서 그리스도의 몸을 형성한다. 아니, 저들은 그리스도라는 몸에 붙은 손이요, 발이라는 것이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들은 그 어디에서 무엇을 하든지 숙명적인 유기체다. 그러므로 어느 한 부분이 상처를 받으면 전체가 아프며 또한 균형을 잃게 된다. 그러므로 어느 한 부분이 상하면 체내의 모든 것이 총동원해서 그 부분이 얼른 제 모습을 찾도록 노력하게 되어 있다.

그런데 이것은 반드시 이미 그리스도 교회에 속하면 그리스도의 몸의 지체가 됐으며 그러므로 그리스도의 몸은 완결됐다는 뜻이 아니다. 이것은 동시에 그리스도 교회의 궁극적인 목표를 제시하는 것이다. 말하자면 온 세상, 온 인류를 그리스도의 몸, 즉 하나의 유기적 공동체가 되게 하는 사명을 가진 것이 바로 그리스도인이요, 교회의 궁극적 목표라는 것이다. 말하자면 그리스도 중심의 하나의 세계를 형성하는 것이 교회의 목표이다. 그러나 그것은 가령 UN과 같이 각 민족, 국가가 서로 연합하여 마침내 하나의 연합체를 만들자는 이상 정도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온 인류 우주가 그리스도 안에서 하느님과 더불어 하나가 되는 것을 뜻한다.

가톨릭의 신부이며 진화론자인 사르댕은 이 세계의 궁극적 목표는 그리스도 안에 '인간화'가 되는 것을 목표로 진화한다고 예언한다. 그가 말하듯이 진화론적으로 그렇게 될런지 쉽게 동의할 수 없으나 바울은 이와 비슷한 중대한 사실을 말하고 있다. 곧 그는 모든 만물이 탄식하면서 하느님의 아들들이 나타나기를 기다리고 있다고 한다. 그 이유는 참 하느님의 아들들(참 인간)이 출현되어서 이 만물이 허무한 것에 사로잡혀 노예상태에 있는 것을 해방할 수 있기 때문이라고 한다. 그런데 이 목적을 위해서 인간도 그리고 성령도 함께 탄식하면서 노력하고 있다는 것이다. 이것은 그리스도인에게 그리스도 교회의 최후 목표를 가르치는 중대한 말씀이다(로마 8장).

이 말씀 안에는 우선 이 세계가 잘못되어 있다는 사실을 전제로 한다. 오늘 인간들은 스스로의 목적을 위해서 만물의 가치를 마음대로 규정하고 상대적인 것을 절대화하고, 평화에 사용할 것을 살인도구로 만들어 버리고, 서로 돕고 한몸되는 길 대신 모든 만물의 힘(에너지)을 이용해서 자기 목적만을 위해 뺏고 착취함으로써 분열을 일으키고 있다. 그 때문에 만물이 제 모습을 잃고 혹사를 당하고 있다. 이런 세계를 구원하기 위해서 무엇보다도 '참 인간,' 즉 하느님의 아들이 출현해야 한다. 그래야만 저들이 하느님의 뜻에 따라 본래의 모습을 되찾게 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것이 바로 교회의 궁극적인 목적이다.

5. 교회는 어디 있느냐?

그런데 부활절에 탄생하고 오순절에 발동하여 그리스도의 몸을 이루어 마침내 온 세계를(만물을 포함해서) 구원할 거점인 교회는 어디 있느냐?

오늘날 건물을 짓고, 조직을 만들고 오랜 전통을 자랑하는 '교회'가 바로 그리스도의 몸이냐? 만일 그렇다고 하면 실망할 사람들이 많을 것이다. 까닭은 그런 교회 안에서 많은 부패와 무능을 보아 왔기 때문이다. 그러나 여기서 먼저 분명히 해 두어야 할 것이 있다. 그것은 교회나 인간을 측정하는 척도가 무엇이냐 하는 것이다. 만일 재래적인 윤리나 그 외의 어떤 가치관으로 참 교회냐 또는 참 그리스도인이냐를 재는 것은 벌써 교회의 성격을 모르는 잘못이다. 만일 낡은 가치관에 맞는 것이 교회라면 그것은 벌써 낡은 것이지 새로운 공동체는 아니다. 교회는 낡은 세계(기존 세계)에서 모범적인 사람들의 집단이 아니다. 아니! 우리는 무엇이 참된 교회냐를 알려면 전혀 새로운 눈을 가져야 할 것이다. 예수는 나는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라 죄인을 부르러 왔노라고 했다. 이 말씀은 기존 가치관에서 보면, 절대로 납득할 수 없는 말씀이다. 그런데 여기서 말씀하는 '의인' 또는 '죄인'이란 낡은 가치관에서 말하는 규정이다. 예수의 보는 눈은 전혀 달랐다. 그러기에 윤리적으로나 율법적으로 흠이 없는 바리새인의 기도와 죄인 세리의 기도를 평해서 세리의 기도가 의롭다고 단정하는가 하면 세리나 창기가 바리새인들 보다 먼저 천국에 참여하리라는 과격한 말씀을 했다. 그런 뜻에서 교회라는 것은 의인이 모인 집단이 아니라 죄인들이 모인 집단이라고 하는 말에 주의를 기울여야 할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교회에 대한 비판을 하기 전에 자기의 입장이 어디 있느냐를 반성하는 것이 중요하다. 예수의 보는 눈이 우리의 것과 다른 것처럼 하느님의 판단의 기준은 우리의 그것과는 전적으로 다르다. 그러므로 오늘의 교회에 대해서 함부로 부정적 태도를 갖는 것은 삼가해야 할 것이다. 그러나 바로 그렇기 때문에 참 교회는 어디에 어떤 모양으로 자라고 있는지는 모른다. 그래서 사람들은 '보이는 교회'와 '보이지 않는 교회'가 있다고 한다. 즉 우리 눈에 보이는 교회와 하느님의 눈에 보이는 교회는 다르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그리스도의 부활과 더불어 이 역사 안에 그리스도의 몸으로서의 교회가 엄존한다는 것이다.

6. 교회와 하느님의 나라

처음에 예수는 하느님의 나라가 도래한다는 것을 선포했지 교회를 세우지는 않았다. 그러면 하느님의 나라와 교회는 어떤 관계가 있는가? 과거에는 보이는 교회가 바로 지상의 하느님의 나라라고 주장했다. 물론 예수가 선포한 하느님의 나라의 도래를 전제하지 않았더면 교회란 있을 수 없다. 그러나 교회가 곧 하느님의 나라 자체는 아니다.

그리스도인들이 교회를 형성했을 때는 하느님의 나라가 곧 도래할 마지막 시대(신학적으로 이것을 '종말시대'라고 한다)에 그 나라를 기다리는 공동체였다. 그러나 이 교회는 스스로 하느님의 나라라고 하지 않고 하느님 나라가 곧 도래한다는 것을 증거하는 공동체로 행동했다. 하느님의 나라는 완전히 하느님의 통치권이 지배하고 지금까지 있는 모든 것을 끝내고, 새롭게 시작되는 창조의 현실이다. 그러므로 교회는 곧 하느님의 나라의 시작이거나 부분도 아니다. 그러나 위에서 말한 대로 교회는 이 땅에서 만물을 포함한 모든 인간들을 낡은 세계에서 해방시킴으로써 오고 있는 하느님 나라에 참여하기 위해 이 역사에 있는 전위대이다. 그러므로 비록 하느님의 나라 자체는 아니지만 이제 올 하느님의 나라를 앞당겨서 사는 공동체이다. 아직 하느님의 나라는 오지 않았다. 그러나 참 교회는 그 나라가 이미 도래한 것처럼 그 나라를 기다림으로써 현재를 사는 것이다. 그러므로 그 새로운 나라를 기다림(종말의식)이 없는 교회는 이미 그리스도의 몸으로서의 교회는 아니고 낡은 세계에 흔히 있는, 이 낡은 세계에 예속된 이른바 한 '종교집단'에 불과하다.

7. 반성(결론)

우리는 교회에 속한 한 지체라고 믿는가? 그렇다면 교회는 그리스도의 부활사건에 그 터전을 갖고 있다는 것을 확실하게 믿어야 한다. 현실교회가 보잘 것 없고 나 자신도 힘이 없다고 생각하는가? 그러나 교회는 단순한 인간의 집단으로 인간의 힘으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성령이 함께 해서 지는 듯 하나 이기고 죽은 듯하나 산다는 것을 믿어야 한다. 성령이 함께 한다는 것을 무엇으로 아는가? 그것은 예수가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했다는 사실을 중심으로 한 성서의 말씀에 공명하고 이해하게 되며, 나 홀로만이 아니라 언어와 지역이 다른 온 세계의 보이는 혹은 보이지 않는 교회의 사람과 하나가 되었다는 확신이 있으면 그것이 바로 성령으로 인도받고 있다는 증거이다.

나는 정말 교회원인가? 그렇다면 나는 그리스도의 몸의 지체라는 유기체적 신념이 있어야 한다. 그것은 교회의 어느 부분이 아프면 나도 아프고 즐거워하면 나도 즐겁고 그 승리가 바로 나의 승리라는 확신이다. 그러므로 참 교회원은 이기적일 수 없다.

참 교회의 실재를 믿는가? 그렇다면 비록 우리 눈에 보이지는 않으나 이 역사 안에서 몸된 교회가 현존하여 마침내 이 세계 전체 사이의 막힌 담을 헐고, 상대적인 것들이 절대화하여 만물의 본래의 목적을 변경해서 불의한 목적으로 쓰여지는 상태에서 해방시켜 그리스도의 몸으로 하나를 이루는 것을 믿어야 한다.

이러한 그리스도의 몸으로서의 교회의 목적을 믿는가? 그렇다면 바로 이러한 교회의 궁극적인 목적에 참여하여 이러한 불의와 싸울 각오가 서 있어야 할 것이다. 이것은 바로 공동체 의식이며 따라서 공동체의 일원으로서 공동전선에 서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나 교회는 하느님의 나라 자체는 아니다. 우리 앞에는 하느님의 나라의 도래라는 엄숙한 현실이 있다. 그러므로 보이는 교회에 안주하거나 또 그것에서 실망하여 좌절되어 있으면, 그와 더불어 하느님의 나라에 참여할 희망을 포기하는 일이며 이와 더불어 이 '새 나라'에 참여할 권리를 잃게 될 것이다. 그런 뜻에서 '교회 밖에는 구원이 없다'라는 과거의 주장을 엄숙하게 다시 생각해야 할 것이다.

오늘 우리는 일대 전환기에 처해 있다. 이것은 역사의 추세이다. 지금 모든 가치관이 뒤집히고 따라서 모든 제도도 파괴될 운명에 처해 있다. 그래서 모든 것은 그 파멸을 면하기 위해서 체제를 바꾸고 체질개선에 전력을 기울이는 자들이 있는 반면에 낡은 질서를 절대로 고수하려는 보수 운동이 있다.

우리에게 변할 수 없는 것은 그리스도 중심 특히 그의 죽음과 부활에 대한 확신이며, 그것을 중심으로 그리스도의 몸을 이루어 간다는 것이다. 그러나 보이는 교회의 조직이나 제도 같은 것은 이 역사의 변천에 따라서 언제든지 개혁할 수 있는 것이다. 교회당이 교회는 아니며 교회의 직제도 교회가 아니다. 그러므로 그런 것을 절대적인 것처럼 고수하려고 하는 것은 새로운 시대를 외면하는 것이며 오고 있는 그 나라를 외면하고 '현재'의 이대로가 좋다는 안일주의의 타락상이다. 우리는 정말 참 교회의 실재를 믿는가? 그렇다면 그 나라 '하느님 나라', 새로운 세계가 옴으로 지금까지의 모든 것이 끝장이 날 것이라는 확신 '종말' 신앙을 갖고 있어야 한다.


List of Articles
바알 (열상 19, 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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겨울은 가고 (에제 37장)
에제키엘이 무등산에서 절규한다 (에제 24, 6-8)
포로에서의 탈출 (이사 66, 1-8)
위정자와의 대결 (이사 7, 10-14)
   
제5부 새로운 존재
일상성과 비일상성 (루가 10, 38-42)
그래도 다시 낙원에로 환원시키지 않았다 (창세 3, 1-10)
새로운 인간상 (창세 12, 1-9)
믿음의 조상 (창세 22, 17-18)
두 사이 에 손을 얹을 판결자 (욥기 9, 25-35)
하느님으로부터의 도피 (시편 139편)
하느님의 웃음 (시편 2편)
잠과 신앙 (시편 127편)
교회란 무엇인가 (로마 8, 9-30)
인간을 말한다 (마르 12, 28-34)
존재 근거 (시편 42편)
우주의 품으로 (시편 8,3 이하)
   
판권
표지
예수의 민중사건 : 『민중과 성서』를 내면서
   
제1부 복음서와 민중
   
예수와 민중 : 마르코복음을 중심으로
    1. 전제
    2. 마르코복음 안의 오클로스
    3. 마르코복음에 나타난 오클로스의 성격
        1) 오클로스의 성격
        2) 오클로스에 대한 예수의 행태
        3) 종합
    4. 예수를 따른 자들
    5. 마르코복음 안에 있는 어록
    6. 오클로스의 언어학적 의미
        1) 라오스와 오클로스
        2) 오클로스와 암 하 아레츠
    7. 종합
마르코복음에서 본 역사의 주체
    1. 전제
    2. 마르코의 삶의 자리
    3. 마르코의 민중신학의 기조
        1) 세례자 요한이 잡힌 후(14a절)
        2) 갈릴래아로 가다
        3) 하느님 나라의 도래 선포
    4. 민중의 행태
예수사건의 전승 모체
    1. 문제 제기
    2. 케리그마의 성격
        1) 고린토전서 15장 3~8절
        2) 필립비서 2장 6~11절
        3) 사도행전에 나타난 케리그마
    3. 민중언어의 성격
    4. 수난사
    5. 예수의 행태 일반
        1) 기적 이야기와 예수의 행태
        2) 아포프테그마와 예수의 행태
        3) 로기온(Logion, 어록)과 예수의 행태
    6. 결론
가난한 자 : 루가의 민중 이해
    1. 가난한 자
        1) 통계적 고찰
        2) 루가의 특수자료
        3) 예수의 탄생설화와 나자렛 선언
        4) 마르코와 Q자료
    2. 루가복음서의 청중
    3. 결론
마태오의 민중적 민족주의
    1. 문제 제기
        1) 마태오의 신학적 주제에 대한 논의들
        2) 문제 제기
    2. 마태오가 처한 현실
        1) 마태오와 그의 시기
        2) 민족적 와해 위기
    3. 마태오의 현실인식
        1) 이스라엘 : 길 잃은 양들
        2) 길 잃은 양이 놓여 있는 현실
    4. 민족동일성 재확립
        1) 뿌리 찾기
        2) 바리사이파가 주도하는 라삐 유다교와의 대결
    5. 마태오의 민중 이해
        1) 언어적 성격
        2) 의식화된 민중
    6. 맺는 말
민중신학의 성서적 근거 : 마르코복음을 중심으로
    1. 예수사건의 재발견
    2. 마르코복음과 민중
    3. 민중은 수단이 아니다
    4. 민중은 객체일 수 없다
    5. 십자가는 민중수난의 극치다
민중신학의 어제와 오늘
    1. 독재와 대항하므로
    2. 민중을 만나므로
    3. 민중과 더불어
   
제2부 민중운동사
   
민중사건과 언어사건
    1. 성서에서 본 말의 성격
        1) 그 말의 현장은 어떤 것이었나
        2) 예수의 경우
        3) 예수사건에 관한 전승
        4) 오순절의 말 사건
    2. 무엇으로 말하는 것인가
    3. 해야 할 말은 무엇인가
    4. 우리가 해야 할 말
미래는 가난한 자의 것 : 루가 6장 20~26절
    1. 축복과 저주
    2. 가난한 자와 부요한 자
    3. ‘지금’과 ‘장차’
    4. 우리의 선택
나라가 임하옵소서
    1. 예수의 기도
    2. 그의 기도를 전달받은 자들
    3. 하느님의 나라
고향 잃은 민중
    1. 피난민
    2. 성서에서 본 피난민문제
    3. 게르(GER) 문제 해결의 시도
    4. 이방인에 대한 관용의 한계
    5. 당면한 과제
        1 ) 새로운 인식을 위한 운동
        2) 실천에 대한 몇 가지 제언
이스라엘 민중사
    1. 머리말
    2. 출애굽
    3. 고대 이스라엘 종족동맹
    4. 민중을 배반하고 세워진 왕권
    5. 분단시대의 고난
    6. 민중운동의 여러 계열
    7. 예수의 민중운동
    8. 맺는 말
   
제3부 민중과 체제
   
민중사실의 증언
    1. 민중신학의 전제들
    2. 민중사실의 증언
고난과 고백
    1. 수난자와의 일치
    2. 마르코의 민중
    3. 수난사와 고난
    4. 더불어의 고난
    5. 맺는 말
갈릴래아 민중에 항복한 바울로
    1. 바울로의 위치
    2. 사울은 어떤 사람인가
    3. 그리스도교 박해
    4. 예수를 만남
    5. 전향
    6. 맺는 말
소명(召命)
    1. 바울로의 소명
    2. 사도 됨과 소명
    3. 이방인에게로
바울로와 역사의 예수 I
    1. 머리말
    2. 예수에 대한 바울로의 말
    3. 예수냐 바울로냐
    4. 왜 예수가 아니고 케리그마인가
선택받은 민중: 고린토전서 1장 26~31절
    1. 고린토교회 구성원의 사회계층
    2. 공동체원의 가치 판단 기준
    3. 민중을 보는 눈
    4. 택함을 받은 민중
   
제4부 예수의 희망
   
하늘도 땅도 공(公)이다
    1. 낙원 이야기
    2. 아담一인간
    3. 실락원은 공을 사유화함으로
갈릴래아에서 만나자: 마르코 16장 1~8절
    1. 제3의 자리
    2. 갈릴래아
    3. 갈릴래아에서 만나자
예수의 희망
    1. 새 세계에의 희망
    2. 희망과 세계혁명
    3. 바른 인간공동체의 희망
    4. 맺는 말
   
판권
표지
예수는 논하지 않았다
   
제1부 민중의 언어, 이야기
   
1. 성서라는 책의 성격
2. 성서의 서술양식
    1) 구약성서
    2) 신약성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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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부 예수의 이야기(비유)
   
1. 만성병에 걸린 세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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