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존재 근거
시편 42편
 
1. 무신세계의 예언

"내가 어떻게 은혜로운 하느님을 찾을 수 있을까?"

이것은 중세기 말엽 어거스틴 수도사 마르틴 루터의 외로움과 고통에서 나온 절규다. 그런데 이 절규는 그 한 사람만의 것이 아니라 그 당시의 뜻있는 사람들의 전형적인 문제를 토로한 것이다.

그러나 오늘날은 문제가 달라졌다. 지금 크리스천이거나 아니거나 피안적인 구원보다는 차안적인 행복을 찾으며, 영혼의 구원보다도 현재 여기서 당하는 운명과 싸우고 있다. 지금 현대인이 만약 하느님에 대해서 관심이 있다면, 그 하느님은 하늘에 존재한 이가 아니라 지금 여기 내 삶의 현장에서 작용하는 신이다. 따라서 지금의 질문은 "은혜로운 하느님이냐, 아니냐?"가 아니라 하느님 자체다. 즉 "대체 하느님 당신은 존재합니까? 있으면 어디 있습니까?" 하는 것이다.

어떤 한 미친 사람이 있었다. 그는 밝은 대낮에 손에 등불을 켜들고 장거리를 오르내리면서 "나는 하느님을 찾는다"고 소리쳤다. 그 때 신을 전제로 하지 않고 사는 많은 사람들이 "하느님을 잃었나?", "그 하느님은 어린애처럼 길을 잃었나?", "그가 어디 숨었나?", "우리를 무서워하나!", "망했나!", "출타했나!" 라고 빈정대면서 그에게 조소를 퍼부었다. 그 때 이 미친 사람은 저들 한복판에 뛰어들면서 "하느님이 어떻게 되었는지 아느냐? 내가 너희들에게 말하리라. 우리가 그를 죽였다. 그대들과 나, 우리는 모두가 살신자(殺神者)들이다!"라고 절규했다.

2. 무신과 허무

그 때 조소를 퍼붓던 사람들이 그에게 물었다. "우리가 무슨 일을 저질렀나?" 그는 서슴치 않고 이렇게 대답했다.

우리는 지구를 태양의 궤도에서 빼내었다. 그럼 이제 우리는 어디를 향해 움직이고 있나? 모두 태양에서 떠나가나? 우리는 계속 굴러 떨어지고 있지 않나? 어디로? 뒤로, 옆으로, 앞으로, 또는 사방으로? 아직 위와 아래가 있나? 우리는 무한대의 숲 속에서 방황하고 있지 않나? 우리는 진공 속을 헤엄치고 있지 않나? 점점 밤에서 밤으로 줄달음치고 있지 않나? 우리를 둘러싸고 있는 공기는 보다 더 싸늘해져가고만 있지 않나? 그러니 대낮에 등불을 켜들고 다녀야 하지 않겠나? 우리는 아직도 '무덤!' 하는 소리를 못듣는가? 하느님을 묻은 무덤을! 우리는 하느님의 시체 냄새를 못맡는가? 하느님은 죽었다. 하느님은 죽은 채로 있다. 우리가 그를 죽였다. 이 살인 강도들아! 어떻게 우리 스스로 위로받겠는가? 이 세상이 가졌던 가장 거룩한, 가장 전능한 이는 우리 칼에 피로 물들여졌다. 누가 우리에게서 이 피를 씻을 것인가? 어떤 물로 이것을 깨끗이 할 것인가?

이상은 니체의 『즐거운 학문』(Fröhlicher Wissenschaft)의 한 부분이다. 이것은 근대인의 종교 상태를 사정없이 파헤친 것이며, 동시에 그로 인해 일어난 허무한 혼란상태를 폭로한 것이다. 니체의 '하느님이 죽었다'는 이 선언은 실은 '하느님이 죽었다'는 선언이기보다는 '하느님! 당신은 어디 있습니까?'라는 부르짖음이었다. 그는 이 무신 세계 속에서 무신의 현실이 가져오는 허무 앞에 떤다.

십자가에 처형되는 순간까지 하느님을 찾던 예수가 재림하면 먼저 교회로 오리라고 믿는 사람들은 교회영역에 묻혔다. 그래서 교회당은 안팎으로 시체가 가득 차 있다. 교회가 예수를 기다리는 시체들의 무덤이 된 셈이다. 그러던 어느날 하늘에 오른 예수가 정말 교회로 먼저 온 것이다. 이를 본 모든 시체들이 소리쳤다. "그리스도여! 하느님이 계십니까?" 이에 대해 예수는 침통한 얼굴로 "없었다. 나는 우주를 배회했다. 나는 태양에 오르고 은하수를 거쳐 하늘의 광야를 헤맸다 그러나 거기에 하느님은 없었다. 나는 존재가 그림자를 던지는 밑에까지 내려가 심연을 굽어보면서 '아버지 어디 계십니까?'고 절규했다. 그러나 나는 아무 반응도 없고, 영원한 폭풍소리만 들었을 뿐이었다… 내가 무한한 세계에서 신의 눈(眼)을 찾았을 때 그 눈은 텅빈, 동공 없는 것이었고, 영원은 카오스 위에 가로놓여 있어 짓씹고 새김질하고 있었으며 … 모든 것은 비어 있었다."

이 때에 교회당 마당의 어린 시체들이 일어나서 "예수여! 우리에게 아버지가 없단 말이요?"라고 덤벼들다시피 절규했다. 예수는 한없이 눈물을 흘리면서 "우리는 다 고아들이다. 나나 너희들이나 다 아버지가 없다." … 그리고 그는 눈을 허무, 공허에게로 향하면서 "보라! 말없는 허무, 차고 영원한 필연성, 미친 우연(偶然.) … 나는 여기 홀로 시체의 무덤 가운데 있구나! 나는 나 홀로 있을 뿐이다. 오! 아버지! 오! 아버지! 어디에 내가 쉴 수 있는 당신의 무한한 품이 있오?"

이것은 쟝 폴(Jean Paul)의 『죽은 그리스도의 말』의 한 구절이다. 그리고 그는 이 이야기로 끝맺는다.

… 그러나 그것이 꿈인 것을 알았을 때, … 내 영은 기쁨 때문에 울었다. 왜냐하면 내 영이 다시 하느님께 기도할 수 있었기 때문에 … 기쁨과 웃음과 그를 믿음이 내 기도였다. …

신이 죽었다는 사실이 꿈이기를 바란다는 결말이다.

이상은 근대의 신의 죽음의 예감과 더불어 다가온 허무를 묘사한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순전히 기독교의 신의 죽음만을 선언한 것은 아니다. 하이데거의 말대로 플라톤 이후에 생긴 서구의 형이상학의 운명을 말한 것이다. 다시 말하면 저들이 존재근거로 했던 하느님 이름 위에 세워졌던 이상(理想)의 세계, 척도, 가치, 참 것, 선, 미, 목적 등 절대적인 것이라고 믿던 것들이 다 무너진 것을 선언한 것이다.

그러나 이 선언들은 처음으로 표출된 새로운 것은 아니었다. 수천년전 한 시인도 본질상 꼭 같은 부르짖음과 경험을 한다.

하느님이여,
사슴이 타도록 목말라 시냇물을 찾던
내 영혼이 주님을 찾아 애답니다. 내 영혼이
하느님, 살아계신 하느님을 언제 내가 나가서
하느님을 뵈오리까?(시편 42, 1-2)

이것은 외국에 포로로 잡혀가서 이방의 노예생활을 하는 사람의 애가(哀歌)이다. 그런데 그가 몸부림치며 그리워하는 것은 고국의 땅도 가족도 아니다. 그것은 오직 그의 존재근거인 하느님이다.

이 고대인은 이 하느님을 성전(聖殿)과 결부시켜 생각했다. 그래서

내가 지나간 날들이 생각난다.
무리의 앞장에 서서
하느님의 집에 이르던 일
환희와 찬송소리 드높던 그 행렬
순례자의 축제로 법석을 떨던 그 일
이제 이런 일들을 생각하여도
가슴이 미어지는구나.
내 영혼아!
네가 어찌하여 그렇게 낙심하며
어찌하여 그렇게 괴로워하느냐?(시편 42,4-5)

이 불안은 두 면에서 온다. 하나는 그의 주변이 전부 하느님의 죽음 혹은 없음을 선언하고 있기 때문이다. 즉 포로된 저들은 어제 무신 세계에서 살며, 동시에 또 하나는 스스로도 자기존재 근거를 회의하기에 이르렀기 때문이다.

사람들이 날이면 날마다 나를 보고
'너희 하느님이 어디 있느냐?' 하고 비웃으니
밤낮 흘리는 눈물이
나의 음식이 되었구나(시편 42, 3).

이 시인이 처해 있는 상황은 현대인의 그것과 아주 비슷하다. 우리는 이방에 있지 않을 수 없다. 그러나 이 기술사회는 통틀어 '네 하느님이 어디 있느냐?'고 조소한다. 이에 대해서 우리도 그 시인처럼 '여기 있다!'고 내보여 줄 말을 잃었가 때문에 고뇌한다.

3. 무신론과 존재근거

그러면 하느님을 부정하면 사람은 불안에서 해방되나?

이 시인은 그런 상태에서 절망해버리지 않는다. 왜? 그는 비록 그 빈정댐에 대응할 대책이 없으나 하느님을 부인한다는 것은 자기부인, 자기자살을 의미하기 때문에 다시 힘을 가다듬어 일어선다.

내 영혼아! 너는 하느님을 바라라.
그 얼굴의 도우심을 인하여
내가 오히려 찬송하리로다(시편 42, 5, 11).

결국 그는 사람들에게 대답하는 대신 신을 찬양하고 그 분만 바라보기로 의지적(意志的) 결정을 한다. 하느님이 갑자기 나타나리라는 것을 기대해서가 아니다. 그 하느님은 여전히 보이지 않고 침묵한다. 그래도 그는 신을 떠나서는 살 수 없다. 하느님은 그의 존재 근거이니까! 따라서 이 시인은 신이 비록 침묵하고 무(無)와 같이 잠잠해도 다시 그에게 온 몸을 기울여 그를 무엇으로인가 확인하려고 한다. 그는 옛 기억을 더듬는다. 본래의 나, 분열되지 않은 나를 되찾아 신과의 관계의 단서를 찾으려고 한다.

내 하느님이여
내 영혼이 내 속에서 낙망하므로
내가 요르단 땅과 헤르몬 산과 미살 산에서
주를 기억하나이다(시편 42, 6).

그 때는 물결에서도, 파도에서도, 낮에도, 밤에도 그와 분열됨 없이 몸으로 느끼면서 살았다. 그 분은 생명의 하느님, 즉 나의 삶의 근거였다. 그는 이 원상태를 다시 회상하여 기도하기로 한다.

내 반석이신(삶의 근거, 내 삶의 뿌리박은 데인)
하느님께 말하가를
어찌하여 나를 잊으셨나이까?
내가 어찌하여 원수의 압제로 인하여
슬프게 다니나이까?(시편 42,9)

나를 버린 하느님, 내게서 상실된 하느님, 나를 더 간섭하지 않고 원수의 손에 내버려둔 하느님! 이것은 내 분열, 내 불안, 내가 나와의 격리에서 오는 몸부림이다! 그렇더라도 나는 그를 포기할 수 없다. 나를 버린 하느님, 그를 찾아야 나로 살기 때문에 그에게 매달린다. 그래도 역시 하느님은 아무런 대답은 없다. 그러나 그 침묵 속에서 이 시인은 이런 결론을 갖는다.

내 영혼아 네가 어찌하여 낙망하며,
어찌하여 내 속에서 불안하여하는고.
너는 하느님을 바라라.
나는 내 얼굴을 도우시는 내 하느님을
오히려 찬송하리로다.(시편 42, 11)

오히려 찬송하리로다!

이것은 근본적으로 니체나 쟝 폴의 부르짖음과 다를 바 없다. 차이가 있다면 시인은 하느님을, 존재의 근거로서의 하느님을 성전(聖殿)과 연결시켜 생각했고, 니체나 쟝 폴은 형이상학적인 데서 찾았던 것이다. 성전의 하느님도, 형이상학적인 하느님도 죽은 게 확실하다. 그러나 이 두 경우 모두에서 하느님을 찾는 갈망이 있음은 '하느님이 없다'는 것을 말하고자 하는 것이 아님을 알 수 있다. 왜? 그 물음은 내 존재 문제와 결부되어 있기에!

4

존재! It is! 이 'is'는 가장 쉽고 자명적인 듯 하면서도 해결할 수 없는 수수께기이다. 존재한다는 점에서는 나무나 짐승이 사람과 다를 바 없다. 그러나 사람이 그런 것들과 다른 점은 이 'is'를 묻는다는 것이고, 따라서 인간만이 종교를 갖는다.

왜 그러면 인간은 존재를 문제로 하는가?

첫째, 인간은 비존재에서 부단히 위협받고 있다. 이것이 사람이 갖는 기본적인 불안이다. 있던 것이 없어진다. 아니, '있음'이 '없음'에게 삼켜져 버린다. 이것은 반드시 사변에서 오는 지적인 결론이 아니다. 아무리 기계만 만지는 무식한 사람이라도 문득 "무엇 때문에 이 고생이야?", "무엇 때문에 사는가?"라는 질문을 하게 마련이다. 이것은 결국 존재에 대한 물음이다.

사람은 누구나 존재함을 의식할 때, 비존재의 위협 앞에 불안해진다. '나는 산다'는 의식은 곧 '나는 죽는다'에로 이끌게 한다. 결국 이 손이, 이 얼굴이 없어진다. 지나간다. 사람은 행복을 당하면 곧 불안해진다. 왜? 그 누리고 있는 행복도 결국은 끝이 있으리라는 것을 알기 때문이다. 헤어져 살던 사랑하는 사람들이 오랫만에 만나면 끌어안고 울어댄다. 왜? 이 밤도 곧 몇 시간 후면 지나갈 것이고 그 후에는 다시 헤어져야만 한다는 것이 그림자를 드리우기에 슬프다. 그래서 '이 시간이 안 지나갔으면!', '태양아 서라!'라고 절규한다. 이러한 불안은 존재가 비존재에게 위협 받는 데서 오는 불안이다.

인간이 불안한 것은 다른 동물보다 더 비참한 존재이기 때문이 아니라 바로 이런 것을 함께 예감하기 때문이다. 이것이 다른 동물과 다른 점이고, 또 두 존재 근거가 다른 점이다.

인간이 시간 안에서 초조함은 인간은 영원을 경험했기 때문이다. 또한 인간이 지나가는 것에 대한 초조함은 지나가지 않음을 경험했기 때문이다. 인간이 갖는 불완전에 대한 초조함은 완전을 알기 때문이다. 인간이 갖는 분열에 대한 초조함은 분열 아닌 존재 자체를 경험했기 때문이다.

이 이미 경험한 것, 그것이 본래의 나의 삶의 근거이다. 그래서 인간은 그것을 잃어버렸다는 것을 알기 때문에 그걸 찾아 갈급하다. 그럼 무엇이 이렇게 했나?

죄란 '나'를 '나'에게 소외(Entfremdung)시키는 현실을 말한다. 이런 죄의식이 나를 세 가지 형태로 격리시킨다. 그것은 첫째, 내 존재 근거에서 둘째, 자기 자신에게 그리고 셋째, 나를 형성하는 이웃 관계(mitmenschen)이다.

이 시인의 비명도 본질상 이런 불안에 속한다.

바로 그렇기 때문에 지금 자신이 갖지 않은 어떤 힘을 찾는다. 비존재, 죄, 잘못, 무의식, 무상, 죽음 이런 것에게 위협을 받기 때문에 그것을 저항할 수 있는 어떤 힘을 찾는다. 그것이야말로 곧 원래의 내 존재 근거, 궁극적인 것이다.

5. 현대의 고뇌에게 주는 성서의 말

그럼 현대인은 어떤가? 현대인은 무신적인가? 아니다. 틸리히는 비존재 앞에 선 존재를 세 가지 방향으로 설명한다.

첫째, 비존재 앞에서 존재적인 공포이다. 이것은 상대적으로는 운명에 대한 공포로서 나타나고, 절대적으로는 죽음에 대한 공포로 나타난다.

둘째, 윤리적인 공포이다. 이것은 상대적으로는 죄책감으로, 절대적으로는 영원한 저주로 나타난다.

셋째, 정신적인 공포이다. 이것은 상대적으로는 공허에 대한 불안으로, 절대적으로는 무의미성으로 나타난다.

고대에는 존재적 불안이 압도적이었고, 중세기에는 윤리적인 불안이 인간을 지배했다. 그리고 근대 이후는 무의미에 대한 불안이 인간을 휘몰았다.

현대인은 삶의 무의미를 정말 피하려고 노력하고 있나?

현대인은 근본적으로 이 시인과 같은 위치에 있다. 그러나 단 현대인은 하느님을 성전에서나 형이상에서가 아니라 내 실존에서 찾는다.

그러면 그리스도교는 이 잃어버린 존재근거를 어디서 찾나? 성서는 새 창조의 신앙에서 찾는다. 바울로는 고린도후서 5장 17절에서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 것이 되었도다"고 말한다.

그럼 새 창조는 어떻게 가능한가? 그것은 그리스도의 십자가사건에서 가능하다. 이것을 통해 화해가 이루어지고 새로운 창조가 이루어지는 것이다. 로마서 5장 1절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느님으로 더불어 화평을 누리게 되었습니다"라고 한다. 여기서 십자가와 그 의미가 드러난다.

이런 현실이 사건으로 역사 안에서 구현된 것이 예수의 고난사(苦難史)이다. 이것은 무(無)에서 믿음에로 어떻게 변화할 수 있고, 그것의 가능성을 우리들에게 보여주고 있다. 그것은 어떤 믿음인가? 새 창조, 새 가능성에 대한 믿음이다.


List of Articles
바알 (열상 19, 18)
남은 칠천 명 (19, 7-18)
민중의 손으로 통일되는 날 (아모 9, 11-15)
겨울은 가고 (에제 37장)
에제키엘이 무등산에서 절규한다 (에제 24, 6-8)
포로에서의 탈출 (이사 66, 1-8)
위정자와의 대결 (이사 7, 10-14)
   
제5부 새로운 존재
일상성과 비일상성 (루가 10, 38-42)
그래도 다시 낙원에로 환원시키지 않았다 (창세 3, 1-10)
새로운 인간상 (창세 12, 1-9)
믿음의 조상 (창세 22, 17-18)
두 사이 에 손을 얹을 판결자 (욥기 9, 25-35)
하느님으로부터의 도피 (시편 139편)
하느님의 웃음 (시편 2편)
잠과 신앙 (시편 127편)
교회란 무엇인가 (로마 8, 9-30)
인간을 말한다 (마르 12, 28-34)
존재 근거 (시편 42편)
우주의 품으로 (시편 8,3 이하)
   
판권
표지
예수의 민중사건 : 『민중과 성서』를 내면서
   
제1부 복음서와 민중
   
예수와 민중 : 마르코복음을 중심으로
    1. 전제
    2. 마르코복음 안의 오클로스
    3. 마르코복음에 나타난 오클로스의 성격
        1) 오클로스의 성격
        2) 오클로스에 대한 예수의 행태
        3) 종합
    4. 예수를 따른 자들
    5. 마르코복음 안에 있는 어록
    6. 오클로스의 언어학적 의미
        1) 라오스와 오클로스
        2) 오클로스와 암 하 아레츠
    7. 종합
마르코복음에서 본 역사의 주체
    1. 전제
    2. 마르코의 삶의 자리
    3. 마르코의 민중신학의 기조
        1) 세례자 요한이 잡힌 후(14a절)
        2) 갈릴래아로 가다
        3) 하느님 나라의 도래 선포
    4. 민중의 행태
예수사건의 전승 모체
    1. 문제 제기
    2. 케리그마의 성격
        1) 고린토전서 15장 3~8절
        2) 필립비서 2장 6~11절
        3) 사도행전에 나타난 케리그마
    3. 민중언어의 성격
    4. 수난사
    5. 예수의 행태 일반
        1) 기적 이야기와 예수의 행태
        2) 아포프테그마와 예수의 행태
        3) 로기온(Logion, 어록)과 예수의 행태
    6. 결론
가난한 자 : 루가의 민중 이해
    1. 가난한 자
        1) 통계적 고찰
        2) 루가의 특수자료
        3) 예수의 탄생설화와 나자렛 선언
        4) 마르코와 Q자료
    2. 루가복음서의 청중
    3. 결론
마태오의 민중적 민족주의
    1. 문제 제기
        1) 마태오의 신학적 주제에 대한 논의들
        2) 문제 제기
    2. 마태오가 처한 현실
        1) 마태오와 그의 시기
        2) 민족적 와해 위기
    3. 마태오의 현실인식
        1) 이스라엘 : 길 잃은 양들
        2) 길 잃은 양이 놓여 있는 현실
    4. 민족동일성 재확립
        1) 뿌리 찾기
        2) 바리사이파가 주도하는 라삐 유다교와의 대결
    5. 마태오의 민중 이해
        1) 언어적 성격
        2) 의식화된 민중
    6. 맺는 말
민중신학의 성서적 근거 : 마르코복음을 중심으로
    1. 예수사건의 재발견
    2. 마르코복음과 민중
    3. 민중은 수단이 아니다
    4. 민중은 객체일 수 없다
    5. 십자가는 민중수난의 극치다
민중신학의 어제와 오늘
    1. 독재와 대항하므로
    2. 민중을 만나므로
    3. 민중과 더불어
   
제2부 민중운동사
   
민중사건과 언어사건
    1. 성서에서 본 말의 성격
        1) 그 말의 현장은 어떤 것이었나
        2) 예수의 경우
        3) 예수사건에 관한 전승
        4) 오순절의 말 사건
    2. 무엇으로 말하는 것인가
    3. 해야 할 말은 무엇인가
    4. 우리가 해야 할 말
미래는 가난한 자의 것 : 루가 6장 20~26절
    1. 축복과 저주
    2. 가난한 자와 부요한 자
    3. ‘지금’과 ‘장차’
    4. 우리의 선택
나라가 임하옵소서
    1. 예수의 기도
    2. 그의 기도를 전달받은 자들
    3. 하느님의 나라
고향 잃은 민중
    1. 피난민
    2. 성서에서 본 피난민문제
    3. 게르(GER) 문제 해결의 시도
    4. 이방인에 대한 관용의 한계
    5. 당면한 과제
        1 ) 새로운 인식을 위한 운동
        2) 실천에 대한 몇 가지 제언
이스라엘 민중사
    1. 머리말
    2. 출애굽
    3. 고대 이스라엘 종족동맹
    4. 민중을 배반하고 세워진 왕권
    5. 분단시대의 고난
    6. 민중운동의 여러 계열
    7. 예수의 민중운동
    8. 맺는 말
   
제3부 민중과 체제
   
민중사실의 증언
    1. 민중신학의 전제들
    2. 민중사실의 증언
고난과 고백
    1. 수난자와의 일치
    2. 마르코의 민중
    3. 수난사와 고난
    4. 더불어의 고난
    5. 맺는 말
갈릴래아 민중에 항복한 바울로
    1. 바울로의 위치
    2. 사울은 어떤 사람인가
    3. 그리스도교 박해
    4. 예수를 만남
    5. 전향
    6. 맺는 말
소명(召命)
    1. 바울로의 소명
    2. 사도 됨과 소명
    3. 이방인에게로
바울로와 역사의 예수 I
    1. 머리말
    2. 예수에 대한 바울로의 말
    3. 예수냐 바울로냐
    4. 왜 예수가 아니고 케리그마인가
선택받은 민중: 고린토전서 1장 26~31절
    1. 고린토교회 구성원의 사회계층
    2. 공동체원의 가치 판단 기준
    3. 민중을 보는 눈
    4. 택함을 받은 민중
   
제4부 예수의 희망
   
하늘도 땅도 공(公)이다
    1. 낙원 이야기
    2. 아담一인간
    3. 실락원은 공을 사유화함으로
갈릴래아에서 만나자: 마르코 16장 1~8절
    1. 제3의 자리
    2. 갈릴래아
    3. 갈릴래아에서 만나자
예수의 희망
    1. 새 세계에의 희망
    2. 희망과 세계혁명
    3. 바른 인간공동체의 희망
    4. 맺는 말
   
판권
표지
예수는 논하지 않았다
   
제1부 민중의 언어, 이야기
   
1. 성서라는 책의 성격
2. 성서의 서술양식
    1) 구약성서
    2) 신약성서
    3) 민중언어
   
제2부 예수의 이야기(비유)
   
1. 만성병에 걸린 세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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