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1970년대 초반 민주화운동의 현장에서 민중을 만난 사건은 나의 사고(思考)를 전면적으로 재검증하게 했을 뿐만 아니라 내가 일생을 두고 전공해왔다는 성서를 총체적으로 재인식하게 하는 결과를 가져왔다.
서남동은 「두 이야기의 합류」라는 글에서 '기독교의 민중 전통과 한국의 민중 전통'의 합류를 '증언'하고 있는데, 나는 민중을 만남으로써 성서의 이야기가 우리 이야기라는 것을 인식하게 되었으며, 또 그럴 때에만 성서는 오늘을 사는 우리에게 의미가 있다는 확신에 이르게 되었다.
이같은 인식을 언어화하는 데 '맥'(脈)이라는 언어가 큰 도움을 주었다. 2,000년 전과 오늘을 연결시킬 수 있는 것은 맥을 통해서 가능하다. 그 맥은 바로 민중사건이다. 민중사건은 가장 구체적인 현장에서 일어나는 것이면서도 시공(時空)을 넘어서는 맥이 된다. 그렇지 않고서야 어떻게 수천 년 전의 이방에서 일어난 민중사건이 오늘 우리의 민중사건으로 재연될 수 있으며, 오늘의 우리 민중사건이 그 시대의 민중사건의 현재적 사건으로 조명될 수 있겠는가!
성서에는 여러 가지 전통들이 뒤섞여 있다. 제왕 전통도 있고 지혜문학 또는 법률적 전통도 있다. 그러나 민중 전통만이 신구약을 잇는 맥이 될 뿐만 아니라 우리를 이어놓는 맥이 된다. 이같은 확신은 바로 예수가 이 민중 전통의 맥이며, 그 맥을 짚었기 때문이다. 나는 그에게서 전형적인 민중사건을 인식했다.
나의 성서적 작업은 예수사건의 민중성을 재조명하는 데서부터 출발했다. 이 책의 제1부에서는 예수에 대한 이야기 중 가장 오래된 마르코복음에 나타난 예수의 민중사건을 밝히는 세 편의 논문을 실었다. 그리고 그것을 자료의 하나로 사용하여 쓴 루가와 마태오의 민중 사건을 밝히는 글을 실었다. 그중에서도 「마태오의 민중적 민족주의」는 오랜 작업 끝에 가장 최근에 쓴 글이며, 논문으로서는 이례적으로 긴 편이다. 그런데 그 결론을 마르코의 그것과 비교하면 마태오에게 있어서 민중에 대한 이해가 얼마나 달라지고 있느냐 하는 것을 발견할 수 있을 것이다. 한편 '민중적 민족주의'란 한국의 민중운동에서 창출된 개념으로서, 그 개념이 마태오를 그런 시선에서 보게 했고, 또 2,000년 전의 마태오에서 오늘의 우리의 염원을 찾아낼 수 있다는 사실에 나 스스로 감격했다.
예수의 민중사건에서 시각을 얻어 바울로를 거쳐 구약으로 그 맥을 찾아 탐색을 확대해나갔다. 특히 구약에 있어서 민족형성이 민중 해방사로 시작된 것을 재확인하는 것은 감격적인 일이 아닐 수 없었다. 한국의 민족사도 민중해방 전통에서 다시 해석되어야 하지 않겠는가라는 발상도 이 감격 속에서 생긴 것이다. 제1부의 민중운동사라는 제목 아래 수록한 「이스라엘 민중사」는 한국사를 이렇게 보고 싶은 국외자의 염원을 반영한다.
민중사건을 여러 시각에서 생각해본 글들은 예수를 중심으로 한 민중운동에서 맴돌고 있으나 그 발상에는 거의 예외없이 우리가 당면하고 있는 문제들이 담겨 있으며, 구체적인 대답은 별로 제시되지는 못했으나 성서의 언어를 빌려서 우리 이야기를 하고자 시도한 것이다. 그중에서 제3부 '민중과 체제'가 더욱 그러하면, 제4부의 '예수의 희망'도 바로 우리의 내일을 그려본 단편들이다. 바울로의 전향을 새롭게 보면서 한국의 엘리트라고 자부하는 계층에 대한 비판을 해본 것이라든지 '물'(物)의 의의를 민중사건에 부각시켜보려는 시도나 '공'(公)사상을 도입한 것도 권력, 경제 할 것 없이 독점한 것을 기득권화하려는 우리 사회의 방향을 제동시켜보려는 몸부림이다.
그리스도교가 아니고 성서만을 대상으로 하려는 노력은 구미적(歐美的) 유산에서 해방되자는 의지의 표현이요, 성서를 민중사건으로 집약하는 것은 이스라엘 복고주의와 맞장구를 칠 수는 없다는 의지의 표명이다. 그리고 이 책을 '예수의 희망'으로 끝을 삼은 것은 예수가 종지부가 아니라는 선언을 우회적으로 표현한 것이다.
그리스도교 밖의 독자에게는 성서언어로 일관된 이 책이 부담스러울 수 있다. 그러나 한국 현실을 보는 시각에 차이가 없다면 그런 정도의 부담은 쉽게 극복될 수 있을 것이다.
1992년 가을
안병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