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장 17b절 : "나는 의인을 부르러 오지 않았고 죄인을 부르러 왔다." 이 어록은 예수의 기본적인 사랑의 자세를 제시한 것이다. 여기에 나오는 'not'과 'but'을 가볍게 넘겨서는 안 된다. 그것은 'but also'로 해석될 수는 없다. 그는 결코 이른바 보편애(普遍愛)를 한 이가 아니며, 박애주의를 설교하지 않았다. 그는 편애한 것이다. 그 대상은 어떤 조건에서든 눌린 자, 박해받는 자들이다.
예수는 약자의 편에 선 이이다. 이 사실은 Q자료에서 보면 더욱 뚜렷해진다. 99마리 양을 두고 잃은 한 마리 양을 찾아 떠나는 목자의 비유(루가 15, 2 이하/ Q자료)는 이러한 예수의 입장을 강하게 나타낸 예이다.
마르코는 이미 언급한 대로 '죄인'을 오클로스라고 전제함으로 예수는 바로 오클로스를 위해 이 세상에 온 것임을 분명히 한다. 그런데 이 '죄인'이란 예수의 입장에서 규정된 것인지 아니면 그 사회에서 규정한 것인지를 밝힐 필요가 있다. 이 마르코자료를 전승한 루가는 그 끝에 '회개하는'을 첨부함으로 전자의 입장에 섰다. 킹 제임스(King James) 영역은 마르코의 본문에 이 구절을 첨가함으로 루가의 입장에서 이해하고 있다. 그러나 '회개하는'이라는 조건은 루가의 입장이지(가령 루가 15장의 잃은 것에 대한 비유들) 마르코의 입장은 아니다.
이 어록은 예수가 오클로스에게 향한 입장과 같다. 그러므로 죄인이라는 것은 '이른바'라는 단서를 붙여야만 될 것이다. 이 어록을 통해 예수는 자신은 그때의 지배층의 가치체계에서 '죄인'으로 규정받은 계층, 바로 뺏기고 억눌린 피해자들을 위해 이 세상에 왔음을 선언한다.
7장 15절 : "무엇이든지 밖으로부터 들어가는 것이 그 사람을 더럽히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사람에게서 나오는 것이 그 사람을 더럽힌다." 이것은 정결법에 대한 예수의 말씀이다. 이 어록은 1절 — 2절 — 5절 — 14b절 — 15절로 연결되는 상황언어(Apophthegmata)로 되어 있다. 그런데 6~14절까지 내용상 직접 관련이 없는 것들이 포함되어 그 원모습을 흐리게 하나, 이 어록은 바리사이 체제에서 일반화된 정결법에 대한 부정적 입장을 뚜렷이 나타낸 말씀이다. 이미 언급한 대로 정결법은 많은 사람들을 소외시키는 결과를 가져왔다. 그런데 예수의 이 말씀은 제의적인 규율 전체를 거부하는 선언이다. 그런데 사람들은 대부분이 이러한 예수의 혁명적인 선언을 유다교(율법)적이냐 또는 반유다적이냐라는 측면에서 논의했지 왜 그래야만 했는지를 묻지 않았다.
이 말씀의 틀을 이루고 있는 상황은 '예루살렘'에서 내려온 바리사이파 사람들과 율법학자가 부정한 손으로 음식을 먹는 예수의 제자들을 비판하는 것이다. 씻지 않은 손으로 음식을 먹는 것은 정결법에 저촉된다. 당시 유다 사회에서는 정결법에 저촉되면 암 하 아레츠(Ám hā´ āres)로 낙인 찍혔다(J. Jeremias). 그런데 마르코는 그의 편집구(14a절)에서 '듣는 자들'이 오클로스임을 확인시킴으로써 중요한 사실을 암시한다. 이 어록을 통해 오클로스에게 무거운 짐이 되어 있는 정결법을 철폐함으로써 저들은 그런 체제에서 해방되었음을 선언한다는 사실이다. "안식일이 사람을 위하여 있는 것이요, 사람이 안식일을 위하여 있는 것이 아니다"(마르 2, 27)라는 말은 안식일법에 눌린 사람들을 해방시키는 선언 같은 것으로, 마태오자료의 표현을 빌리면 이 말은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사람들"(11, 28)을 위한 것이다.
9장 37절과 10장 13~15절 : 이 두 어록은 모두 어린이를 존중하라는 내용이다. 9장 37절은 어린이와 예수 자신 그리고 하느님을 일치시키며, 10장 13~15절은 하느님 나라를 어린이 것이라고 선언한다.
유다교는 성인의 종교라고 한다. 그것은 율법을 알고 그것을 지킬 의무가 있기 때문이다. 이런 입장에서 어린이는 여인과 더불어 천대받았다.
이 어록들에서 "어린이와 같이"라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에 대해 논란이 많다. 마르코는 누가 높으냐 또는 누가 첫째냐 하는 다툼을 하는 맥락에서 어린이를 내세워서 낮은 자의 상징으로 삼고 있다(9, 37). 10장 13~15절에서도 마찬가지이다. 까닭은 제자들이 어린이를 멸시하는 데 대한 말씀으로 되어 있기 때문이다. 한편 루가(9, 48)는 마르코의 본문에 "너희 가운데 작은 사람이 위대한 사람이다"라는 구절을 첨부함으로써 사회적으로 천대받는 자의 상징이 어린이라는 점을 밝힌다. 사실상 어린이는 '작은 자들'(μακροί)과 상통한다(마르 9, 42; 마태 10, 42; 17, 2/ Q자료). 불트만은 루가 17장 1~2절을 이 자료의 원형이라고 보고(마태 18, 6~7) "미미한 자"에 τών πιστευόντων(of believing)을 붙인 것은 그리스도교화한 것이라고 본다. 큄멜은 "미미한 자"를 마태오 5장 3절의 "마음이 가난한 자"와 일치시키지만, "미마한 자"는 결코 겸손한 자세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사회적 위치를 지칭하는 것이다. 따라서 마르코복음에서 이들을 하느님 나라의 참여자로 단정하는 점에서 루가의 '들의 설교'에서 서술된 가난한 자, 우는 자, 배고픈 자와 결부시키는 것이 타당할 것이다.
이상의 마르코복음 안에 있는 극히 적은 예수의 말씀은 Q자료와 비교하면 큰 공통점이 있으며, 오클로스로서 지시된 군중에 대한 예수의 행태와 일치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