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상에서 마르코복음을 중심으로 본 예수와 민중, 예수와 오클로스의 관계를 정리해보면 다음과 같다.
첫째, 마르코는 의식적으로 라오스를 피하고 오클로스로 사용함으로써 민족 또는 종교적 계층 분류에 반해서 사회사적 계층성을 나타냈다.
둘째, 오클로스를 절대로 고정적으로 질화(質化)하지 않고 상관성에서 규정하므로 유동적이다. 저들을 결코 미화하지 않는다.
셋째, 오클로스는 결코 어떤 목적 밑에서 스스로 세력화하려는 대중이 아니라, 스스로의 삶과 갈구를 지닌 자신만의 세계를 갖고 있다. 이 말은 저들이 밖에서 규정할 수 없고, 자신 안에 고유한 현실을 갖고 있다는 말이다. 이 점에서 율법을 이데올로기화해서 저들을 동원하려던 바리사이파에 대한 정면충돌의 설화는 의미가 크다.
넷째, 예수는 저들을 규합하거나 또 어떤 가치를 가르치기 위해 능동적으로 저들에게 접근하지 않았고 오직 저들의 요청에 응했을 뿐이다. 그런 의미에서 예수는 수동적 혹은 그들과 일치하는 입장에 섰지, 저들의 지배자, 라삐 또는 수령이 되려고 하지 않았다. 그것은 복음서에서 예수가 오클로스와 단ᆞ속(斷ᆞ續)의 관계로 서술된 것에서 볼 수 있다.
이상에서 볼 때 마르코의 오클로스는 프롤레타리아도 아니며, 민족의 실체로서의 민족이나 민주체제의 일원인 People과 직결시킬 수도 없음을 알 수 있다.
다섯째, 예수가 저들에게 알린 것은 한마디로 하면 '하느님 나라의 도래'이다. 마르코가 예수의 설교를 그렇게 요약한 것(1, 15)은 의미심장하다. '하느님의 나라가 곧 온다! 오고 있다!'라는 이 종말론적 선언은 낡은 세계의 종말과 더불어 개벽의 때를 알려줌으로 흩어진 이 오클로스에게 새로운 희망과 변화의 길을 열어주었다. 마르코가 나타낸 예수는 바로 새 세계의 도래를 확신했기에 그의 오클로스와 더불어의 행태가 자명한 것으로 되어 있다. 민중은 새 세계를 기다린다. 지금 그들은 고난의 장에 있기 때문이다. 예수는 그 나라의 도래의 전선에서 민중과 더불어 싸웠다. 그런 의미에서 그는 메시아이다. 이것은 적어도 마르코의 메시아관의 일면임에 틀림없다.
■ 『현존』 제10호. 1979년 11월호에 수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