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르코의 신학적 기조에 대해서는 다양한 학설이 있다.14)W. G. Kümmel, Einleitung in das Neue Testament, S. 46-53; J. Gnilka, op. cit., S. 17~35(서설) 참조. 큄멜은 1장 14~15절이 마르코신학의 기조라고 단언한다. 마르코복음을 각기 여러 단계로 나누는데15)가령 Kümmel은 다섯 단계로, 즉 ① 갈릴래아 예수 ② 갈릴래아 내외에서의 순행 ③ 예루살렘 도상 ④ 예루살렘의 예수 ⑤ 고난과 부활 설화로 나눈다. Gnilka는 ① 출발 ② 민중과 예수 ③ 예수의 교훈과 기적 ④ 지향없는 순행 ⑤ 십자가를 질 각오 촉구 ⑥ 예루살렘에서의 행태 ⑦ 고난과 죽음과 빈 무덤 등으로 구분한다(번호는 다르나 순서는 같음). 결국 사건을 지리적으로 압축하면 둘 다 ① 공생애 출발 ② 갈릴래아에서의 민중과 예수 ③ 예루살렘에서의 수난과 처형의 순서이다. 어떻게 나누든지 간에 1장 14~15절을 마르코복음의 총집약이라고 말할 수 있다. 이른바 케리그마 성서학자들도 이미 이 사실을 지적했으나 사실 15절에만 관심하여 그것이 예수의 설교의 집약이라고 했을 뿐,16)R. Bultmann, Die Geschichte der Synoptische Traditions, 1957, S. 124, 134; G. Bornkamm, Jesus von Nazareth, 1956, S. 58. 14절과의 관련에서 15절의 의미를 해석하려는 시도는 거의 볼 수 없다. 클로스데르만(E. Klostermann)은 14절이 마르코의 편집구임을 전제하고 예수 설교의 시간과 지역의 틀에 두면서 성격화한 것이라고 지적하지만, 결국은 초대교회의 선교용어로 이차적 의미밖에는 없다고 한다. 그러면서 세례자 요한의 사건으로서 예수의 하느님 나라 설교의 새로움이 강조 된 것은 '내실적으로 사실'이라고 할 뿐이다.17)E. Klostermann, Das Markusevangelium(HNT), 1950, 동 구절 주석 참조. 그닐카도 비록 이 구절이 역사적으로 사실이라고 해도 여기서 말하고자 하는 것은 사실(史實 Historie)이 아니라 하나의 구속사적 도식이라는 재래의 입장에 머물고 있다.18)J. Gnilka, op. cit., S. 65. Klostermann도 역시 이것에 대해 언급하면서 구속사적 도식이냐 역사적 회상이냐라는 질문을 하는데, 그도 역시 전자에 기울어지고 있다.
이 항목을 디벨리우스의 양식사 연구에 적용한다면 파라디그마(Paradigma)적 양식이다. 양식사적 시각에서 보면 14절은 그 상황(틀)이다. 그런데 양식사학자들은 15절이 중요할 뿐 14절은 상황(틀)으로서 15절의 성격을 확실히 하기 위한 간접적 기술의 역할만을 한다고 보고, 사실상 14절을 무시해버리는데, 이러한 해석은 거부되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