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것은 바로 정치적 상황을 말한다. 이런 상황이 곧 예수가 하느님 나라의 도래를 선포한 장이다. 세례자 요한을 체포한 안티파스의 지배영역인 갈릴래아에서 예수가 이런 선포를 했다는 것은 벌써 하느님 나라가 후퇴하고, 비시간적인 '하느님의 의'가 대신하는 경향(바울로)이 지배적일 때에 그런 경향과는 달리 중요한 다른 사실을 말하려는 것이다.
마르코에 있어서 예수가 갈릴래아로 간 것은 마태오의 경우와는 전혀 다르다. 마태오는 다윗의 고향인 베들레헴이 예수의 본향이라고 한다. 그리고 헤로데의 박해를 피해서 에집트로 갔다가 헤로데가 죽은 후 귀향하려고 하지만 헤로데의 아들 아르켈라오 역시 위험하다는 정보를 듣고 갈릴래아로 피해갔다고 한다. 그러나 마태오와는 정반대로 마르코는 예수가 오히려 위험지대를 위험한 시기에 들어가는 것으로 보도한다. 민중이란 일차적으로 지배자에 대하여 피지배자를 말하는 것이라면20)서남동, 「민중의신학」, 『신학사상』 제24호, 1979년 봄호 참조. 이러한 보도를 통하여 마르코는 예수의 민중적 위치를 분명히 한다.
마르코는 세례자 요한이 체포된 현실 안으로 예수를 포함시킴으로써 예수의 운명을 미리 암시하려 하고 있다. 그것은 무엇보다도 세례자 요한이 '잡힌다'고 할 때 사용된(παραδοθηναι)가 예수의 수난예고의 단어와 꼭 같은 데서 알 수 있다(9, 31ᆞ10, 33ᆞ14, 41). 마르코는 안티파스가 세례자 요한을 체포한 동기와 처형과정을 전승하는 데 비교적 많은 지면을 할애한다. 한편 그런 설화에는 정치적 동기가 별로 반영되어 있지 않다고 보는 사람들이 있다. 아마도 마르코는 세례자 요한파의 자료를 그대로 전승했으리라.21)Bultmann(op. cit., S. 328f, )은 헬레니즘 영역에 세례자 요한파의 다른 흔적이 있다고 하며, Dibelius와 Haenchen은 헤로데에 대한 일화일 것이라고 본다(E. Haenchen, Der Weg Jesus, S. 241). 그런데 중요한 것은 이러한 전승들을 소개하는 마르코의 생각 속에는 안티파스가 예수의 활동에 대한 정보를 듣고 "내가 목을 벤 그 요한이 살아난 것이다"22)이와 같은 전승을 8장 28절에서도 본다.라고 한 말을 연관시키려는 편집적 의도가 숨어 있다는 점이다. 이로써 지배자와의 관계에서 예수를 이미 처형된 세례자 요한과 동일한 역사적 상황에 위치시킨다.
마르코의 기록에서는 세례자 요한이 안티파스의 불륜행위를 힐책한 것이 죄가 되어 처형된 것으로되어 있는데, 유다의 어용역사가인 요세푸스의 기록에는 요한이 반로마 선동 정치범으로 처형되었으며 그는 민중을 귀신(δαμίονιον)처럼 현혹하는 능력을 가진 '거짓 예언자'라고 한다.23)JB 2, S. 259. 이런 보도는 마르코의 것과 상치되는 것은 아니다. 집권자를 비판한다는 것은 이유야 어떻든 현실적으로 정치적 행위이다. 마르코는 그가 민중에게 큰 영향력이 있었다는 사실도 지적한다(11, 32). 또 하나 주목할 것은 그가 귀신이 들렸다(δαιμονιον έχει)는 세론(世論)을 Q자료(마태 11, 18)가 전하는데, 그것을 요세푸스의 용법 그대로 이해하면 민중을 선동했다는 뜻이다. 즉 세례자 요한은 정치범으로 처형된 것이다.24)J. Wellhausen, Israeliten und Jüdische Geschichte, Berlin, 1958, S. 341; E. Meyer, Ursprung und Anfange des Christentums I, S. 851, II, S. 406; E. Lohmeyer, Urchristentums, S. 59f.; F. F. Bruce, Zeit-geschichte des N.T von Babylon bis Golgotha I, S. 166, 32.
예수의 공생애 출발의 장은 마르코의 삶의 장과 정치적 측면에서 유사하다. 세례자 요한이 처형된 뒤의 예수의 그것처럼 마르코의 삶의 자리는 이스라엘이 로마제국에 의해 '처형'된 다음이다. 그런데 예수가 갈릴래아로 간 것이 반드시 세례자 요한의 투쟁의 배턴을 넘겨받은 것이라는 의미를 부각시키지는 않는다. 다만 그곳은 그의 현장(고향)이기 때문에 돌아가는 것이다(1, 9 참조).25)마태오는 예수의 고향을 베들레헴으로 안다. 그런 전제를 갖는다면 예수의 갈릴래아행이 투쟁적 대체로 해석될 수 있으리라. 그러나 마르코는 그렇지 않다. '마르코의 민중'도 선택한 고난의 길에 들어선 것이 아니라 그렇게 매도되었다(παραδίωμι). 헬레니즘 영역의 지식층에게는 육의(κάτα σάρκα) 예수보다는 신격화되고 초역사화된 그리스도상이 바람직했을지 몰라도 정치적 박해의 사정거리에 들어선 갈릴래아의 민중은 그같은 예수가 친밀해질 수 있었을 것이다. 이 점은 이 글에서 계속 반영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