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건너뛰기

전집

전집은 OCR 스캔 잡업으로 진행되어 오탈자가 있습니다.
오탈자를 발견하면 다음과 같이 등록해 주시면 관리자가 수정하도록 하겠습니다.
1. 수정 요청을 하려면 로그인이 필요합니다.
2. 본문을 읽는 중에 오탈자가 있는 곳을 발견하면 앞뒤 텍스트와 함께 마우스로 선택합니다.
3. 그 상태에서 [오른쪽 마우스]를 클릭하여 나타나는 창에서 수정 후 [수정요청]을 클릭합니다.
4. 각주의 경우에는 각주 번호를 마우스오버하여 나타난 창을 클릭하면 수정요청 창이 열립니다.

※ 컴퓨터 브라우저에서만 가능합니다.
2) 갈릴래아로 가다

마르코에서 갈릴래아의 의미에 주목한 로마이어는 편집사적 고찰의 선구자이며, 마르크센은 그 뒤를 따라서 이 사고를 발전시켰으나 치명적인 잘못에 빠져들고 있다. 그것은 갈릴래아라는 지역의 정치 사회적 고찰을 의식적으로 도외시하고, 순수 교회사 내지 신학적 상징으로만 보려고 한 점이다.26)두 사람은 갈릴래아는 지리적 의미보다 그리스도교 영역(Terra Christina)의 상징이며 따라서 케리그마의 장으로 이해해야 한다고 한다(E. Lohmeyer, Galiläa und Jernsalem, 1936, S. 26ff.; W. Marxen, op. cit., S. 71, 74). 이들은 불트만의 "예수는 케리그마에 의해서 부활했다"는 전제와 꼭 같이 갈릴래아를 케리그마적 표상으로 이해하자고 하는데, 핸첸이 지적한 대로 마르코에게 이런 사고방식은 생소한 것이다.27)E. Haenchen, op. cit., 1966, S. 460.

갈릴래아는 예수의 상황이며 민중의 상황이다. 그러므로 정치경제문화사회사적으로 파악해야 한다. 이 점에서 다가와(田川)가 정당한 비판과 더불어 정치사회사적으로 갈릴래아 분석을 시도한 것28)田川建三, 『原始キリスト敎史の一斷面』, 1부 2장.은 제길에 들어선 것이다. 그러나 그의 한계는 바로 예수와 신약시대를 결정짓는 데 큰 역할을 하는 사회, 경제 그리고 종교적 상황분석을 하지 않았다는 점이다. 그리고 갈릴래아를 예루살렘과 대결시켜서 본 것은 옳은데 그 대결의 원인의 뿌리에까지 미치지 못한 점이다.

갈릴래아의 민중적 성격은 오랜 역사에 소급되어 예수와 그후 신약시대에서 현저해진다. 이 글에서는 편의상 정치문화경제적으로 나누어보려고 하나 그것을 나누는 데는 어려움이 있다. 그것은 그런 구분이 현실적으로 불가능할 만큼 서로 엉켜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경제문제는 일단 구별해보기로하고 정치와 문화는 함께 취급하기로 한다. 여기서 문화라고 할 때는 종교적 평가와 깊은 관계가 있다.

 

(1) 갈릴래아의 정치문화적 배경

갈릴래아를 "이방인의 땅"29)이사 9, 2; 마태 4, 15~16.이라고 부른 것은 그 땅이 오랫동안 이방인에게 점유되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라삐 유다교에 이르러 종교적으로 정죄하고 멸시하는 뜻이 되었으며, 그것은 정치문화사적 배경에서 규정된 것이었다.30)"갈릴래아, 너는 토라를 멸시한다"라는 말은 갈릴래아인이 예루살렘을 공격할 때 한 저주의 소리다(Kreissig, S. 45f. 참조).

갈릴래아 지방은 B.C. 733년에 앗시리아에게 점령되어 강제로 므기또(Magidu 또는 Megiddo) 주에 편입, 이방의 직접통치지역이 된 이래 그 뒤로 등장한 신흥제국 바빌론, 페르샤 등에 계속 인계되어 노예 같은 곤욕의 역사를 거듭한 분단지의 비극적 상징이었다. 유다 문헌에는 마카베오 독립전쟁으로 승리를 거두었을 때(유다 지방) 갈릴래아에서 이민족 밑에 박해받던 소수의 유다인이 구원을 청해서 시몬이 저들을 구출해왔다는 기록이 있고31)마카베오상 5, 14 이하. 그후 아리스토불 1세(B.C. 104~103년)가 그 영지를 갈릴래아와 이두매 지방으로 확대함으로 갈릴래아는 600년간의 '이방인의 땅'이라는 분단적 슬픔에서 해방된다.32)그 이전까지는 갈릴래아에 영향권을 행사한 대사제가 없었다(Jos., Ant., 13, S. 322). 그러나 이마 프톨레매오와 셀류커스 조(朝) 시대에 갈릴래아 도시들은 헬레니즘 문화의 식민지가 되었다.33)Bo Reicke, Neutestamentliche Zeitgeschichte, 1968, S. 52.

한편 그 유산을 고스란히 물려받은 로마제국 치하에서 반(半)유다인인 25세의 헤로데의 부(父) 안티파터가 로마의 그늘 밑에서 이 지방의 총독이 됨으로 예수시대에는 유다 지방(예루살렘) 사람들이 그곳을 이방인의 땅으로 멸시하는 의식이 새로워졌다. 그 다음 헤로데가 전 팔레스틴의 로마 어용 통치자가 되었다가 그의 유언으로 팔레스틴이 다시 분할 통치될 때 또다시 갈릴래아는 안티파스(B.C. 4~A.D. 39년)의 치하에 놓이게 되어34)안티파스도 갈릴래아 지방의 도시를 헬레니즘화하는 데 전력을 기울였다. 세포리스, 디벨리우스 등이 그 상징이다(Reicke, op. cit., S. 86). 유다 지방과 분단된 채 계속 멸시의 대상으로 남게 되었다. 이러한 감정을 이용한 로마정권은 두 지방을 차별대우했는데, 둘 간의 통용화폐를 구별하여 갈릴래아 지방의 통용화폐에는 황제 티베리오 상을 버젓하게 담은 것이 그 상징적 예이다.

갈릴래아는 민중봉기로 유명하다. 이미 갈릴래아의 민중은 A.D. 1세기초부터 봉기했는데 그 구체적 계기는 시리아 주재 로마총독 퀴리노(Quirinius)가 증세를 목적으로 인구조사를 실시한 사건이었다. 그러나 정말 놀라운 것은 그것이 아직 갈릴래아 지방에 해당되지 않고 유다 지방에 해당된 일이었음에도 불구하고 갈릴래아 민중이 가말라의 유다(일명 갈릴래아 유다)를 중심으로 격렬한 투쟁에 나섰다는 사실이다.35)Jos., Ant., 18, S. 355; JB. 7, S. 253~356; Ant., 17, S. 3~10, 123~125. 사람들은 그것이 순수 신앙심의 결과라고 보지만36)가령 저들의 예루살렘 성전에 건 황금 독수리상 제거를 위해 피흘린 것은 그러한 구체적 증거다(Jos., Ant. 17, S. 149~163; JB, 1, S. 468~655). 그것만으로 그 이유가 설명되지 않는다.

반면에 헹겔은 저들이 하느님 통치 외의 어떤 지배권도 배격한다는 신념에서 있다고 한다면 그 지향하는 바는 사회혁명이며, 전형적 프롤레타리아 게릴라부대였을 것이라고 본다.37)M. Hengel, Judentum und Hellenismus, 1969, S. 79, 87, 89, 91ff., 108, 119ff., 130, 133ff., 288. 그들이 예루살렘에 진격하여 어용 지배층을 숙청하고 헤로데 궁을 불태우고 시청의 사채장부들을 불태운다. 이들의 이런 일련의 행동38)H. Kreissig, S. 124; M. Hengel, op. cit., S. 223, 595.은 저들의 종교적 신념, 즉 하느님 외에는 어떤 통치세력도 용납할 수 없다는 신념의 표출로써 예루살렘 세력들이 어용화됨으로써 이스라엘 정신을 압살하는 데 대한 분노로 방향이 모아졌으나 무엇보다도 예루살렘 중심주의로 갈릴래아를 소외한 데 대한 소외자의 분노가 크게 작용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갈릴래아가 유다 지방(예루살렘)에게는 주변지 역으로서 멸시받은 흔적은 신약에도 전해진다.39)요한 1장 46절 "나자렛에서 무슨 선한 자가 나겠느냐?" 이 멸시와 상호반목의 이유는 정치 종교사적으로 소급해야 알 수 있는데, 예루살렘 내지 다윗왕조와 대립시켜 볼 때 확실해질 것이다.

예루살렘은 명실공히 다윗왕의 도시다. 그는 유다 지방에서 유다 지방민에 의해서 왕이 되어(삼하 2, 4)40)유다 지방은 종족동맹에 가담하지 않은 지역이다. 헤브론에서 유다를 다스리고 간교와 폭력으로 북이스라엘 전역, 즉 가나안 종족동맹 지역을 병합하고41)그 침략과 협박 그리고 권모술수는 유명하다(사무엘하 2~5장 참조). 여부스족의 도시 예루살렘을 폭력으로 빼앗아 새 왕도로 삼았다(삼하 5, 6~9). 곧 그는 예루살렘에 웅대한 궁전을 짓고 모세의 계약 전통의 상징인 법궤를 그 도시에 안치함으로써 이스라엘 민족의 종교(이데올로기) 중심지로 만들었을 뿐 아니라 후대에 종말적 대망의 중심지가 되는 계기가 되었다. 후대의 묵시문학은 다윗왕조와 예루살렘을 일치시켜 종말을 생각하게 했으며, 그 도시는 하나의 성도로서 천(天)적인 의미로까지 발전했다.42)F. Maass, "Jerusalem", RGG III.

한편 나단, 요시아 등을 위시하여 예루살렘―다윗 후예―구원사를 밀착시킨 어용론자들이 계속되어 신약에까지 영향을 미치는데, 중요한 것은 야훼신앙을 왕권사적 맥락에서 계속 축소, 인위화시키고 성전을 세우므로 예루살렘이 야훼를 독점 내지는 감금하고, 야훼 신앙을 다윗왕조를 위해 이데올로기화했다는 사실은 신약 특히 예수와의 관계에서 중요하다. 이것을 최근 사회학적으로 추구하는 구약학의 결론과 연관시켜 조명하면 중요한 다른 측면이 노출되는데43)최근 주도적으로 사회역사적 연구를 시도한 문헌으로 George Mendenhall, The Hebrew Conquest of Palestine BA 25, 1962와 Gottwald, Biblical Theology of by Biblical Sociology 등을 들 수 있는데 W. Brueggeman의 "Trajectories in OT Literature and the Sociology of Ancient Israel"은 한역으로 「구약문헌의 전승궤도들과 고대 이스라엘에 관한 사회학」, 장로회신학대학 간에 요약되어 있다. 그런데 반드시 사회학을 내세우지 않았음으로서 구약 큰 두 계열로써 시나이 산 전승과 다윗 전승을 구분한 학자도 무수하다. 그 예로 A. H. J. Gunneweg, Sinaibund und Dauidsbund, 1960과 W. Zimmerli, Propheten Proklamation und Reinter Pretation이 있다. 그것은 갈릴래아의 정신저 배경을 이해하는 것과 직결된다.

최근의 구약연구는 모세 전통과 다윗 전통을 구분하는데, 모세 전통은 출애굽사건에 근거를 두고 다윗 전통은 이른바 다윗계약으로서 예루살렘 중심의 왕권 전통이다. 브루지만(W. Brueggeman)은 최근의 연구를 종합하여 이 두 계열의 성격을 다음과 같이 구분한다.

 

왕조전승 전통(The Royal Trajectory)

① 총화를 우선한다.

② 풍요(창조)와 연속성(왕조체제)을 우선한다.

③ 지배적 이해양식은 우주적이고 포괄적이다.

④ 도시의 가진 자들을 존중하고 육성하는 경향이 있다.

⑤ 안정성에 우선적 가치를 두므로 사회적으로 보수적인 경향을 띤다.

⑥ 하느님 품격의 영광과 신성(神性), 그 영광에 상응하는 데 초점을 둔다.

 

해방 전통(The Liberation Trajectory)

① 해방의 구체적 이야기들을 말하는 것을 우선한다.

② 전쟁과 불연속적 언어를 쓴다.

③ 지배적 이해양식은 역사적 특수성에 관한 것이다.

④ 농촌의 가난한 자들을 존중하고 육성하는 경향이 있다.

⑤ 변혁을 우위에 두므로 사회혁명적 경향이 있다.

⑥ 하느님의 뜻인 공의와 의에 초점을 둔다.44)Ibid., S. 180, 한역 36면.

 

이상의 성격화는 놀랍게도 예루살렘의 체질을 집약하고 있다. 예루살렘은 다윗왕조 이래 어용이 체질화되었다. 그것은 자국의 지배 세력에 대해서만 아니라 외세에 대해서도 그러하였다. 그렇게 되었던 중요한 이유는 바로 예루살렘을 신격화한 관념과 무엇보다 예루살렘 성전에 대한 절대존중이라는 대전제가 무엇에나 타협할 수밖에 없는 담보물이 되었기 때문이다. 예루살렘과 성전수호의 원칙은 안정제일주의의 논리에 쉽게 동의하게 했으며, 그것은 제도적인 연속성을 고수하게 했다.

그러므로 예수 당시에 예루살렘파는 뚜렷하게 갈리는데, 마카베오 전쟁에 가담했던 하시딤 그룹을 기점으로 에쎄네, 젤롯당, 세례자 요한파, 예수운동이 바로 탈예루살렘 계열이며, 주류인 사두가이파와 바리사이파는 역시 예루살렘파로서 체제를 존중하며 근본적으로 보수적이었다. 바리사이파가 비록 평신도로서 민족(민중이 아님)운동을 일으켰으나, 산헤드린에서 득세하면서부터는45)바리사이파에 대해서 민중적이며 야적(野的)이라는 주장이 많은데 그것은 사적(史的)으로 보지 않고 한 이념체로 보기 때문이다. 바리사이파가 민중에게 율법의 생활화운동을 폈으나 그 내용이 그날 그날 벌어서 살아가는 가난한 자나 천직자들을 안중에 두지 않았다. 그것이 출발할 때(하스몬왕조시)에는 왕권에 의해 박해를 받았다. 그러나 철천지원수로서 6년이나 바리사이파 박해에 혈안이 되었던 얀내우스(B.C. 103~76년 재위)가 죽은 후 그의 처인 알렉산드라(B.C. 76~67년 재위)에 와서 저들은 일약 여(與)의 입장에 서면서 변질되었고 헤로데대왕 때 또다시 박해받았으나 예수 당시는 산헤드린에서 절대권을 행사하는 세력이 됨으로써 집권층의 이데올로기가 되었다. 라삐 유다교를 사실상 대신했으며, 예루살렘의 이념적 지도세력이 되었다. 바로 이 이데올로기가 예수와 정면충돌한 것이다.

그런데 갈릴래아는 바로 마태오복음에서 인용한 대로 즈불룬, 납달리 등으로 표시된 한 이스라엘의 종족동맹이라는 사실이다. 이 말은 유다 지방과 그 뿌리가 다르며, 다윗왕조의 계승자로 자부하는 유다 지방과 정신적으로 다른 계보라는 말이다. 이것을 브루지만의 분류에 적용하면 안정주의적인 1)의 전통과 해방 전통인 2)의 전통의 본질적 차이를 말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갈릴래아는 예수 당시에는 정치문화적으로 소외된 지역의 상징이었다. 그런데 바로 이 지역이 반로마 저항운동의 본거지로 정치군사적 대결의 장이 되고 있는 것이다. 따라서 이 지방이 로마와 헤로데의 숙청대상으로 위험지역이 된 것은 당연한데, 주목할 것은 유다 지방인들에게 갈릴래아라는 이름이 반란의 대명사로 받아들여졌으며 특히 예루살렘인들에게 공포의 대상이 되어 있었다는 사실이다.46)M. Hengel, op. cit. S. 59f; H. Kreissig, op. cit., S. 124.

그것은 저들이 갈릴래아와 젤롯당을 연결시켰기 때문이다.47)M. Hengel, op. cit., S. 54. 이것은 예루살렘 사람들의 젤롯당에 대한 감정의 발로인데, 저들이 젤롯당을 '강도'(λησταί)라고(요세푸스) 부른 것이 단적인 표시이다. 유다 지방 사람들이 젤롯당을 그렇게 혹평하는 데는 그 나름의 이유가 있었다. 그것은 젤롯당이 로마 못지않게 예루살렘의 어용 유다인들을 증오했으며,48)Jos., JB, 7, S. 254; M. Hengel, op. cit., S. 88. 예루살렘 숙청을 일차적 목표로하고, 대사제를 원수로 삼고 있었기 때문이다.49)M. Hengel, op. cit., S. 223. 이같은 증오는 마침내 젤롯당이 예루살렘에 쳐들어갔을 때 극적으로 표출되었다. 갈릴래아 유다의 아들 므나행은 대사제 아나니아를 죽이고 아그리빠 성을 불질렀고,50)Jos., JB., 2, S. 425ff. 요하네스는 산헤드린을 분쇄했으며, 종교적 귀족들을 잔인하게 숙청하였다.51)Ibid., S. 334ff. 요세푸스에 따르면 젤롯당들이 로마군과 싸운 기록은 별로 없고, 산헤드린과 대사제 권력을 격퇴한 것뿐이다.52)H. Kreissig, op. cit., S. 134. 이것은 어떤 이유일까? 이것은 바로 갈릴래아인들이 정치종교(문화)적으로 예루살렘파에게 얼마나 서러움을 받고 있었던가를 말하며, 그 멸시당한 한이 행동으로 폭발된 것이라고 보는 수밖에 없다.53)젤롯당에 대해서는 후에 다시 언급.

 

(2) 갈릴래아의 경제적 상황

사람이 살아가는 데 있어서 가장 현실적인 문제는 역시 경제적인 조건이다. 요세푸스는 갈릴래아의 봉기자들을 '강도'로 규정하면서, 많은 사람들이 자신의 안전을 위해 이 강도때에 가담했다고 기록한다. 또한 모든 갈릴래아 지방에는 강도떼가 많았으며 용감하게 저항했다54)Jos., JB., 2, S. 238; JB, 3, S. 303.고 한다. 그런데 자신의 안전을 위해서라고 하는데 그것이 무슨 뜻인가? 이것이 열쇠이다.

우선 요세푸스의 보도에서 지적할 것은 이 당에 부녀자들(가족)이 가담했다는 사실이다.55)JB, 7, S. 256, 264. 이렇게 여자까지 포함하여 전가족이 가담했다면, 이것은 현실적으로 생활할 수 없는, 즉 경제적으로 거덜났기 때문이라고볼수 있다.

갈릴래아는 팔레스틴에서 가장 비옥한 농토로 알려졌다. 원래 팔레스틴은 농경사회였으며,56)Jos, JB., 4 : Kreissig, op. cit., S. 17ff. 유다 지방이 박토이고 기후조건이 나쁘기 때문에57)J. Jeremias, Jerusalem zur Zeit Jesu 43; F. JacksonKieke, The Beginning of Christanity I, 1920, pp. 1f. 갈릴래아 지방 소산에 의존해서만 살 수 있었다. 그런 탓에 갈릴래아 지방에는 농부들이 몰려들어 농촌 중에서 인구밀도가 가장 높았다.58)요세푸스(JB., 3, S. 43)는 농촌인구가 1만 5천 명을 헤아렸다고 한다(J. Jeremias, op. cit., S. 52 참조). 그런데 주목할 것은 저들이 대부분 소작인 아니면 날 품팔이들이었다는 사실이다.59)S. W. Baron, A Social and Religious History of the Jews, Vol. I, p. 278. 이 실상을 정확하게 파악할 자료를 갖지 못하였으나 대체로 다음의 몇 가지 사실들을 통하여 갈릴래아의 경제적 상황을 그려볼 수 있다.

헤르츠에 의하면60)J. Herz, Grossgrundbesitz in Palaistina im zeitalter Jesu, Palästina Jahrbuch Berles, 1928, S. 98 이하. 로마의 식민지 토지정책이 프톨레매오 왕조의 에집트 지배법을 다분히 답습했다고 하는데, 그것은 군사기지 및 영지점령세력을 특정인의 사령지로 지정하여 현지에서 경제조달 또는 착취를 일삼는 것이였다. 이같은 영지를 경작하기 위해서 그 경작권을 지방관리가 관장하게 함으로써 농민들의 노동력을 강제 동원할 수 있게 했다. 둘째는 식민지의 특권층인 왕 또는 그외의 사람들에게 봉토를 주어 그것을 연봉의 수익원으로 만들어중으로써 통치수단을 삼았던 것이다. 둘째 범주에는 신전영지도 속한다. 이런 제도는 농민에게 이중의 노동을 강요하는 구조가 되는 셈이다.

로마가 유다 지방에 책정한 증세액이 600달란트였는데61)B. Schürer, Geschichte des Jüdischen Volkes im zeitalter Jesu christi 1~13, 1901~1904, I, 473ff, 508ff.; H. Kreissig에서 인용. 그외에 남녀, 노예까지 포함한 인두세와 소득세, 가축세 그리고 토지세 등을 강요했다. 로마의 권력대행자로서 그 그늘 밑에서 권력을 향유하는 헤로데왕의 연수(年收)는 천 달란트를 초과했다.62)J. Jeremias, op. cit., S. 10f. 그런데 이것은 그의 유서에 그 자손들에게 분배한 액수를 기준으로 한 것일 뿐이다. 요세푸스가 전하는 바에 따르면 아르켈라오는 400달란트, 안티파스는 200달란트, 필리푸스는 100달란트 그리고 살로메는 50달란트를 상속받았다고 한다. 그러나 다른 기록에는 아르켈라오가 600달란트를 받은 것으로 되어 있다.63)Jos., Ant., 17, 11, 4~5. 그외에 많은 선물이 별도로 있었다(Otto, Herode, Beiträge zur Geschichte der letzte jüdischen Königshause, 1913). 그런데 그것은 농지를 주어 그것에서 나오는 수익으로 대체한 것으로 보인다. 즉 아르켈라오가 봉건영주에서 추방되었을 때 아우구스투스가 아르켈라오의 영지를 자기 것으로 만들고 그 일부는 관리, 경영했다는 기록은 그러한 측면을 말해주고 있다.64)Jos., Ant., 18, S. 2; M. Hengel, op. cit., S. 341 참조. 그외에도 헤로데왕실의 경리담당자가 사유지로 아루스(Arus)의 한 부락 전체를 갖고 있었으며,65)Jos., Ant., 17. 10. 9; JB., 2. 5. 1. 살로메가 아우구스투스 부인에게 야마인(Jamain)지역 전부를 선물했다는 기록도 있다.66)Jos., Ant., 18. 13. 1; JB., 2, S. 167. 이러한 기록은 갈릴래아 지방에 국한된 것만은 아니었다. 물론 전체 농토와의 관계에서 그러한 토지가 차지하는 비율을 밝힐 수 없기 때문에 확실한 통계를 낼 수는 없으나 지배층의 횡포가 어느 정도였으며, 비옥한 땅에 사는 갈릴래아 농부들이 왜 그렇게 가난할 수밖에 없었던가에 대한 이유를 잘 드러내고 있는 셈이다.

한 일꾼의 정상적인 하루 품삯은 1데나리온이다.67)Billerbeck, I, 831, 마태 20, 1~15 참조. 그것은 한 가족의 하루 최저생계비이다. 1데나리온은 1달란트의 1만분의 1이다. 그러면 1달란트는 1만 가족의 하루 생활비이다. 그런데 헤로데의 토지에서 나오는 수익만 1천 달란트가 넘는다고 한다. 1만 가족 x 1천 = 1천만 가족. 이만하면 지배자와 피지배자 사이의 격차와 횡포가 어떠했는지를 짐작하고도 남지 않는가.

B.C. 1세기 팔레스틴의 농부는 소작인이 압도적이었는데, 그들은 극도로 생존의 위협을 받고 있었다.68)H. Kreissig, op. cit., S. 27. 소작인은 생산의 주역이면서도 날품팔이일을 겸해도 살기가 어려웠다.69)Dalman, Arbeit und Sitte in Palästiner II, S. 197. 어떤 사람은 팔레스틴, 특히 갈릴래아에 고용농민이 압도적으로 많았다고 밝히고 있다.70)M. Hengel, S. 329f.; Baron, I, op. cit., S. 278.

요세푸스는 헤로데 치하의 소농들이 아주 빈곤했다고 한다.71)Jos., JB, 2, S. 86; Ant., 17, S. 307. 그 이유가 무엇이었나? 헹겔은 지주들의 착취 때문이라고 하며, 바론은 특히 갈릴래아의 소농들이 부재지주들에 의해서 착취당했음을 입증한다.72)M. Hengel, op. cit., S. 431; S. W. Baron, op. cit., S. 278. 결국 농토가 농민의 손에 있지 않은 것이 문제이다.

갈릴래아 지역의 농촌은 경제적 의미에서 사실상 한 도시를 중심으로 한 종속적인 관계에 있었다. 지주들은 도시에 살면서 관리인을 보내 경작과 소작을 운영했다.73)E. Lohmeyer, Soziale Fragen nach Urchristentum, Leipzig, 1921, S. 55f. 그런데 그 지주들이 어떤 계층이었던가? 정치권력층은 물론 로마에 아부하는 유력한 교권자들도 중요한 지주충이었다.74)정치권력 집단 다음의 특혜충이 종교귀족인데 이 둘 사이에는 공통점이 있다. 그것은 그들이 지주계층이었다는 사실이다. 이것은 주목할 만하다(M. Hengel, op. cit., S. 89, 218; H. Kreissig, op. cit., S. 99 참조). 저들의 친로마주의는 거의 체질화되었고, 나아가서 성전세와 십일조를 받는 기득권을 유지하기 위해서도 그럴 수밖에 없었다. 좀 과장되어 보이지만 유명한 라삐 엘르아잘의 아버지 하르솜(D. Harsom)은 1천 개의 시(市)와 배를 갖고 있었는데, 그는 자신의 도시들을 순찰하다가 노예집단을 만나자 강제로 자기 일을 시켰다고 한다.75)H. Kreissig, op. cit., S. 97. 라바티(Eka Rabbati)는 예루살렘에 살고 있던 네 사람의 라삐 이름을 들면서, 예루살렘이 포위되었을 때 그 땅 주민이 (어느 곳인지는 분명치 않음) 적어도 10년간의 생계를 유지할 수 있는 재물을 쌓아놓고 있었다고 말한다.76)D. BB 145b. 라삐 엘르아잘은 목축의 십일조로 일 년에 송아지 1만 3천 마리를 바쳤다고 한다.77)D. JT 23a. 이러한 몇 가지 두드러진 예는 통계적 자료가 될 수는 없으나 분명한 것은 예루살렘에 거농들이 있었다는 사실이며, 그 경우 토박한 유다 지방보다 갈릴래아에 땅을 가진 지주들이 많았을 가능성이 크다. 이런 추측은 이마 언급한 대로 유다 지방이 자체의 식량문제를 갈릴래아에 절대 의존하고 있었음을 감안할 때 더욱 타당하다.78)J. Jeremias, S. 52. 갈릴래아에서 출발 한 젤롯당이 예루살렘에 진입했을 때 무엇보다도 먼저 시청을 습격하여 모든 소유권 장부와 채무장부를 불태워버렸다는 사실은 도농(都農)간의 격차와 부재지주들의 횡포가 얼마나 심했는가를 보여준다.79)J. Klausner, S. 252ff. 257; H. Kreissig, S. 113. 또 이와 관련해서 경제적으로 파산해버린 농민이 중심이 된 것으로 알려지고 있는80)Jos., JB, 2, pp. 425ff. 젤롯당의 일차 목표가 로마보다 예루살렘의 지배층이었다81)Ibid.는 것 등이 이런 추측을 뒷받침한다.

이상의 간단한 정치경제적 고찰은 갈릴래아가 지역적으로 정치, 문화 그리고 무엇보다도 경제적인 면에서 억압, 소외, 착취당하는 주변지의 상징임을 밝히고 있다. 따라서 갈릴래아를 민중의 현장이라고 한다면 그 민중은 바로 정치, 경제 그리고 문화적으로 소외된 계층임을 표시한다.82)서남동(앞의 글 82면), 김용복(앞의 글 61면) 등은 민중은 결국 경제와 정치 등 어느 한 면에서만 규정될 수 없다면서 정치, 경제 그리고 문화적으로 피압박계층의 총칭으로 본다. 특히 김용복은 프롤레타리아와 민중의 차이를 강조한다. 그러나 그것은 이데올로기화된 개념으로서의 프롤레타리아가 아닌 산업 사회에서 경제적으로 억압된 계층이 민중에서 제의된다는 뜻은 아닐 것이다.

TAG •

List of Articles
바알 (열상 19, 18)
남은 칠천 명 (19, 7-18)
민중의 손으로 통일되는 날 (아모 9, 11-15)
겨울은 가고 (에제 37장)
에제키엘이 무등산에서 절규한다 (에제 24, 6-8)
포로에서의 탈출 (이사 66, 1-8)
위정자와의 대결 (이사 7, 10-14)
   
제5부 새로운 존재
일상성과 비일상성 (루가 10, 38-42)
그래도 다시 낙원에로 환원시키지 않았다 (창세 3, 1-10)
새로운 인간상 (창세 12, 1-9)
믿음의 조상 (창세 22, 17-18)
두 사이 에 손을 얹을 판결자 (욥기 9, 25-35)
하느님으로부터의 도피 (시편 139편)
하느님의 웃음 (시편 2편)
잠과 신앙 (시편 127편)
교회란 무엇인가 (로마 8, 9-30)
인간을 말한다 (마르 12, 28-34)
존재 근거 (시편 42편)
우주의 품으로 (시편 8,3 이하)
   
판권
표지
예수의 민중사건 : 『민중과 성서』를 내면서
   
제1부 복음서와 민중
   
예수와 민중 : 마르코복음을 중심으로
    1. 전제
    2. 마르코복음 안의 오클로스
    3. 마르코복음에 나타난 오클로스의 성격
        1) 오클로스의 성격
        2) 오클로스에 대한 예수의 행태
        3) 종합
    4. 예수를 따른 자들
    5. 마르코복음 안에 있는 어록
    6. 오클로스의 언어학적 의미
        1) 라오스와 오클로스
        2) 오클로스와 암 하 아레츠
    7. 종합
마르코복음에서 본 역사의 주체
    1. 전제
    2. 마르코의 삶의 자리
    3. 마르코의 민중신학의 기조
        1) 세례자 요한이 잡힌 후(14a절)
        2) 갈릴래아로 가다
        3) 하느님 나라의 도래 선포
    4. 민중의 행태
예수사건의 전승 모체
    1. 문제 제기
    2. 케리그마의 성격
        1) 고린토전서 15장 3~8절
        2) 필립비서 2장 6~11절
        3) 사도행전에 나타난 케리그마
    3. 민중언어의 성격
    4. 수난사
    5. 예수의 행태 일반
        1) 기적 이야기와 예수의 행태
        2) 아포프테그마와 예수의 행태
        3) 로기온(Logion, 어록)과 예수의 행태
    6. 결론
가난한 자 : 루가의 민중 이해
    1. 가난한 자
        1) 통계적 고찰
        2) 루가의 특수자료
        3) 예수의 탄생설화와 나자렛 선언
        4) 마르코와 Q자료
    2. 루가복음서의 청중
    3. 결론
마태오의 민중적 민족주의
    1. 문제 제기
        1) 마태오의 신학적 주제에 대한 논의들
        2) 문제 제기
    2. 마태오가 처한 현실
        1) 마태오와 그의 시기
        2) 민족적 와해 위기
    3. 마태오의 현실인식
        1) 이스라엘 : 길 잃은 양들
        2) 길 잃은 양이 놓여 있는 현실
    4. 민족동일성 재확립
        1) 뿌리 찾기
        2) 바리사이파가 주도하는 라삐 유다교와의 대결
    5. 마태오의 민중 이해
        1) 언어적 성격
        2) 의식화된 민중
    6. 맺는 말
민중신학의 성서적 근거 : 마르코복음을 중심으로
    1. 예수사건의 재발견
    2. 마르코복음과 민중
    3. 민중은 수단이 아니다
    4. 민중은 객체일 수 없다
    5. 십자가는 민중수난의 극치다
민중신학의 어제와 오늘
    1. 독재와 대항하므로
    2. 민중을 만나므로
    3. 민중과 더불어
   
제2부 민중운동사
   
민중사건과 언어사건
    1. 성서에서 본 말의 성격
        1) 그 말의 현장은 어떤 것이었나
        2) 예수의 경우
        3) 예수사건에 관한 전승
        4) 오순절의 말 사건
    2. 무엇으로 말하는 것인가
    3. 해야 할 말은 무엇인가
    4. 우리가 해야 할 말
미래는 가난한 자의 것 : 루가 6장 20~26절
    1. 축복과 저주
    2. 가난한 자와 부요한 자
    3. ‘지금’과 ‘장차’
    4. 우리의 선택
나라가 임하옵소서
    1. 예수의 기도
    2. 그의 기도를 전달받은 자들
    3. 하느님의 나라
고향 잃은 민중
    1. 피난민
    2. 성서에서 본 피난민문제
    3. 게르(GER) 문제 해결의 시도
    4. 이방인에 대한 관용의 한계
    5. 당면한 과제
        1 ) 새로운 인식을 위한 운동
        2) 실천에 대한 몇 가지 제언
이스라엘 민중사
    1. 머리말
    2. 출애굽
    3. 고대 이스라엘 종족동맹
    4. 민중을 배반하고 세워진 왕권
    5. 분단시대의 고난
    6. 민중운동의 여러 계열
    7. 예수의 민중운동
    8. 맺는 말
   
제3부 민중과 체제
   
민중사실의 증언
    1. 민중신학의 전제들
    2. 민중사실의 증언
고난과 고백
    1. 수난자와의 일치
    2. 마르코의 민중
    3. 수난사와 고난
    4. 더불어의 고난
    5. 맺는 말
갈릴래아 민중에 항복한 바울로
    1. 바울로의 위치
    2. 사울은 어떤 사람인가
    3. 그리스도교 박해
    4. 예수를 만남
    5. 전향
    6. 맺는 말
소명(召命)
    1. 바울로의 소명
    2. 사도 됨과 소명
    3. 이방인에게로
바울로와 역사의 예수 I
    1. 머리말
    2. 예수에 대한 바울로의 말
    3. 예수냐 바울로냐
    4. 왜 예수가 아니고 케리그마인가
선택받은 민중: 고린토전서 1장 26~31절
    1. 고린토교회 구성원의 사회계층
    2. 공동체원의 가치 판단 기준
    3. 민중을 보는 눈
    4. 택함을 받은 민중
   
제4부 예수의 희망
   
하늘도 땅도 공(公)이다
    1. 낙원 이야기
    2. 아담一인간
    3. 실락원은 공을 사유화함으로
갈릴래아에서 만나자: 마르코 16장 1~8절
    1. 제3의 자리
    2. 갈릴래아
    3. 갈릴래아에서 만나자
예수의 희망
    1. 새 세계에의 희망
    2. 희망과 세계혁명
    3. 바른 인간공동체의 희망
    4. 맺는 말
   
판권
표지
예수는 논하지 않았다
   
제1부 민중의 언어, 이야기
   
1. 성서라는 책의 성격
2. 성서의 서술양식
    1) 구약성서
    2) 신약성서
    3) 민중언어
   
제2부 예수의 이야기(비유)
   
1. 만성병에 걸린 세대
Board Pagination Prev 1 2 3 4 5 6 Next
/ 6
위로
텍스트를 수정한 후 아래 [수정요청] 버튼을 클릭하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