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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민중의 행태

위의 정치문화경제사적 배경에서 본 마르코 1장 14~15절은 마르코의 민중신학의 주춧돌이다. 그러므로 이 주제에서 마르코 전반을 보려는 것이 이 글의 대전제다. 그런데 또 하나의 대전제가 있다. 그것은 마르코에 서술된 예수, 그의 행태, 그의 운명은 한 개인의 전기가 아니고 한 '사회의 전기'라는 것, '예수'라고 부르거나 '하느님의 아들', '메시아', '인자'라고 부르거나 간에 그것은 나자렛 예수 한 개인의 삶을 지칭하는 것이 아니라 집단성을 지닌 칭호라는 전제이다.

불트만은 그리스도를 한 실존으로 보고 우리와의 실존적 연대성을 내세웠다. 그는 존재론적 시각을 고수한다. 그러나 여기서는 마르코가 본 예수의 집단성을 찾음으로 오늘의 그를 집단 속에서 역사적으로 경험하자는 것이다. 바로 그것이 마르코복음 기자의 의도였다는 전제를 갖게 되는 것은 바로 이 시대의 그런 요청과도 관계가 있다.

예수는 자신을 '사람의 아들'이라고 불렀다. 사람의 아들에도 1인칭, 3인칭의 것들이 있으며, 각기 다른 의미를 갖고 있다. 여기서는 그것을 논하려는 것이 아니고103)M. W. Porteous, Das Buch Daniel, in : ATD, S. 23, 38f., 94. 단지 그것의 집단성을 파악하고, 그 가능성을 찾아보려는 것이다.

신약성서에 나오는 '사람의 아들'은 다니엘서 7장 13~14절에 근거한다는 것이 정론이다. 그런데 여기에서는 그 '사람'과 같은 그의 본질성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그것이 내포한 집단적 성격이 중요하다. 2장 44~44절과 7장 13~14절, 27절은 상호관계에 있는데 '그 사람의 모습 가진 이'와 민(民, 聖民)이 동일시되고 있다. 7장 13~14절에는 인자 같은 이에게 나라를 주고 모든 민과 나라들과 말이 다른 민의 섬김을 받게 한다고 했는데, 27절에는 그런 것이 지극히 높은 이의 만에게 돌아갈 것이라고 한다. 그런데 학자들은 사람의 모습이라는 히브리어는 집단적 해석(korporative interpretation)이 가능하다고 한다.104)M. Noth, Heiligen des Hochsten : in Gesammelte Studien zum A.T, 1960, S. 274ff. 노트는 이것을 집단적 개념으로 받고 있으며, 그 민은 이스라엘이 아니라 천국집단이라고 한다. 침멀리 역시 이런 전제를 갖고 있으나, 그 민은 어디까지나 지상의 야훼의 민이라고 한다.105)W. Zimmerli, 한역, 「구약신학」, 300면. 또 헹겔은 다니엘 7장의 영원한 나라는 하느님의 민의 주권이라고 단정한다. 한(F. Hahn)도 다니엘 7장 13~14절, 27절을 시편 110편 1절과의 관련에서 집단적 개념이라고 하면서106)Ibid. 17. 신약에는 그런 해석이 불가능하다고 본다.

한편 슈바이처(E. Schweitzer)는 '하느님의 아들'은 구약에서는 우선 집단으로서 이스라엘 민을 지칭한 것이라고 전제하면서 다니엘서의 '인자'(仁子)도 집단개념임을 인정하며,107)E. Schweizer, Ermiedrigung und Erhöhung bei Jesus und seinem Nachfolgern, 1955, S. 89. 신약에서는 오직 예수 개인을 지칭한 것이라고 한 데까지는 한의 입장과 같다. 그러나 그가 한과 다른 것은 예수의 길이 그의 공동체의 길이 된다는 것을 승인한다는 점이며, 또 신약에서의 집단적 해석의 부정을 통해 종말에 인자가 그의 민과 깊은 관계에 있게 된다는 사실을 위축시킬 의도는 없다고 하는 점이다. 그는 그것에 관한 자료들을 나열한다.108)Ibid., p, 900, 그리고 한이 인자는 셈언어 영역에서는 집단적 표상으로 받는 것이 일반적이라고 인정하고, 또 마르코 8장 38b, 13장 2c~3절이 다니엘 7장 13~14절에 의지하고 있다면서도109)Ibid., pp.33, 39. 구태여 그 테두리를 피하려는 노력을 하는 것은 잘 납득이 되지 않는다고 덧붙인다. 한의 주장은 '인격'이라는 개념에 사로잡히고 개인주의에 빠진 서구인의 병폐가 아닌가? 한은110)히브리 사고에서는 개체로서의 한 사람과 집단 사이의 한계가 뚜렷하지 않다. 가령 이사야 53장의 고난의 종이 개인인가 또는 이스라엘 집단을 지칭하는가 하는 경우이다. 서구학자들은 이러한 논의를 거듭해왔는데 그것은 그것을 개인으로서의 예수에게 적용시키기 위한 노력이지 그것 자체는 그런 문제를 제기하지 않는다고 보기 때문이다. 야훼는 집단성을 나타내는 것이 아닐까? 그 하느님이 개인이 아니라 집단의 신앙의 대상이고, 집단의 해방자인 경우 그것이 집단적 개념임을 의심할 이유가 없다. 그런데 서구인은 특히 희랍적 계보에 선 계몽주의 이래로 '인격'이라는 개념을 크게 내세우므로 마침내 주객도식에 빠져 헤어나지 못하는데 도대체 인격이란 무엇인가? 히브리적 혹은 동양적 사고에서는―서구적으로 세뇌되지 않는 한―인격이라는 개념이 없는 것으로 안다, 인격이란 결국 Personality를 억지로 번역한 것이 아닌가? 이승훈의 『국어대사전』에서 인격을 "사람의 품격, 개인의 智, 情 意 및 육체적 측면을 총괄하는 전체제 동일체"…… 그리고 종교적으로 "신에 대하여 人性을 갖춘" 품격 운운하는데 이것이 동양적인 것인가? 동양은 오히려 종합적으로 모든 것을 보고 파악하지 않는가? 정치제도가 만든 인위적인 것을 빼고 현자 또는 성자라고 하는 경우 그것은 바로 포괄성에 대한 다른 식의 표현이 아닌가? 동양에는 인격이라는 개념이 없으니 자연과의 구별이 모호하다고 하지만 바로 그것은 어떤 존재를 집단적으로 파악한다는 증거가 아니겠는가? 이러한 기본입장이 없이는 人及天이란 사고가 생길 수 없을 것이다. 이 경우의 '人'은 결코 개인이 아니라 집단이다. 나는 불교의 기본인식도 그렇지 않은지 묻고 싶다. 佛이 어디 싯다르타인가? 그것은 우주론적 용어를 쓰면 普編我이지만 사회적으로 보면 집단성이 아닐까? 분명히 신약은 이 문제에 대해서 고민하고 있다. 바울로의 집단(교회)을 그리스도 또는 그의 몸이라고 풀이해보는 것, 즉 κάτα σάρκα로서 예수를 알려고 하지 않는다는 것 등은 예수를 나자렛의 한 개인으로 볼 수없기 때문이며, 동시에 χριτός라고 할 때 관사를 붙여 예수의 고유명사로 사용하는 것은 그 逆反의 현상이다. 요한의 "너는 내 안에, 나는 네 안에"는 바울로의 χρισώ와 더불어 집단성을 전제할 때만 알수 있는 말이다. 개체(인격)라는 대전제를 가진 서구인은 주객도식에 머물러 일보도 넘어서지 못한다. 마르코 10장 45절을 다니엘 7장과 연관시키면서, 다니엘의 인자는 그 이전 인간들의 고통을 말하고, 그것을 그 인자가 짊어지며, 그가 그 민을 대표하고 대신 고통받는 것이라고 한다.111)Ibid., p. 59. 도대체 그런 결론에 도달하려면 인자의 집단성을 전제할 때 더 현실적이며, 확실한 핵심을 제공하는 것이 아니겠는가? 외계인(外界人)이 개입해서 민의 고통을 대신 짊어지는 것이 무슨 의미가 있겠는가? 도대체 왜 전혀 다른 차원의 남이 고통을 짊어진다는 종교적 고정관념에 그대로 사로잡혀 있어야만 하는 것일까? 오히려 도드(C. H. Dodd)는 인자가 원래 집단개념인데 예수에게 위탁된 것이라고 하며, 그러기에 인자라고 하면 민과 연결시켜야만한다고 한다.112)C. H. Dodd, Eu. Theo, 1952/ 53, p. 499. 맨슨(T. W. Manson)은 공관복음서의 인자를 다니엘서와 연관시키면서 예수는 그의 수난 직전에 제자들이 그를 실망시킬 때 스스로 집단적 기능으로서의 인자로서 수난당할 각오를 했다고 한다.113)T. W. Manson, The Teaching of Jesus, pp. 211ff. 이같이 주장하는 사람들이 비록 약간의 강조점의 차이는 있지만 상당수에 이르고 있다.114)V. Taylor, The Gospel according to St. Mark, 1952, p. 84, "The Elect Community of Which He was to be the Head"; H. H. Rowley, The Relevance of Apokalyptic, 1947, pp. 121, 1(C. MacCown R. pp. 1948, 8ff.; H. Odeberg, The Fourth Gospel, 1929, pp. 39f. 그러므로 이러한 판단을 적극적인 거점으로 삼고 예수의 행태를 보면 아주 다른 측면을 찾을 수 있을 것이다. 그런 전제에 설 때 '예수의 행태'라고 하는 경우 한 개인으로서 그를 추적하는 것이 아니라 그와 함께하는 사람들과 더불어 일어나는 사건 전반을 추적할 수밖에 없다. 그러므로 그를 싸고돈 민중과 그를 주객으로 보고 그 어느쪽에서 민중을 찾자는 것이 아니라 관계 속에서 민중을 찾자는 것이다.115)서남동(「민중의 신학」, 『신학사상』 제24호)은 "민중신학의 주체는 예수가 아니라 민중이다"라고 하는대, 나는 그것을 이분(二分)하면 해결이 나오지 않는다고 본다.

이상의 과제는 이 논문에서 전개하지 못하고 단지 과제로만 제시할 뿐이다. 그 대신 중점적으로 관찰해야 할 몇 가지 주제들을 제시하고 약간의 방향만 제시해두려고 한다.

첫째, 예수는 출신으로나 행태상으로 한 민중이다. 복음서마다 그를 다윗의 후예나창적 권위로 표출시키려는 데 대해 마르코의 예수는 다윗이 난 곳과도, 혈연과도 상관없는 무명의 땅, 요세푸스도 한 번 언급하지 않은 시골 촌구석 나자렛 출신이다. 마르코는 그가 고향에 갔을 때를 기술하면서 그를 한낱 목수이며 하찮은 집안에서 난 자임을 분명히 하고 있다(6, 1~3). 또한 가끔 환자나 예루살렘 군중이 그를 '다윗의 자손'이라고 하지만 오히려 예루살렘에서 메시아는 (마르코는 물론 예수를 전제한다) 다윗의 자손일 수 없다는 것을 변론하는 자료를 전승한다(12, 35~37). 마르코의 예수는 선재설(先在說)116)Gnilka(op. cit., S. 18)도 불트만에 동의하면서, 마르코는 존재설을 수용하지 않았다고 말한다. 그리고 승천사상을 포함한 그리스도론과도 전혀 상관이 없다. 단지 어떤 산에서의 변모설화가 있는데, 그것은 마르코 이전의 전승 자료에서 온 것이다. 예수는 그를 따르는 오클로스와 다를 바 없는 한민중에 불과하다.

둘째, 예수운동의 장(場)은 도시였다는 기록은 없고, 농촌일 따름이다. 그의 언어가 압도적으로 농경문화적인 것이 이 사실을 말한다.117)M. Dibelius, Theol. Literaturzeitung, 52, 1928, S. 529. 예수가 갈릴래아 사람으로 알려졌듯이 그를 따르던 이들도 갈릴래아 사람이라고 했다. 베드로도 갈릴래아 사람이며(14, 70), 예수의 수난과 빈 무덤의 목격자인 여인들도 갈릴래아에서 예수와 함께 있던 이들(14, 67)이라고 한다. 마르크센이 열쇠로 삼는 마르코 14장 28절과 16장 7절에서 "갈릴래아에서 만나자"는 지시는 갈릴래아―민중―새 세계를 밀접하게 관련지운 것이다. 그런데 그것은 새 삶의 자리, 즉 예수―그의 민중―마르코공동체의 삶의 자리가 되는 셈이다. 마르코 편자가 갈릴래아를 13회나 언급하는데, 굳이 문맥과 내용상 언급할 필요가 없는 경우에도 그것을 내세우는 것은 마르코복음서가 민중의 글로서 역사의식과 깊은 관계가 있음을 나타내는 것이라고 보아야 할 것이다.

셋째, 민중과 더불어 예수가 있는 곳에 민중이, 민중이 있는 곳에 예수가 있다. 그런데 그 민중은 비록 무명으로 등장하나 예수를 부각시키는 배경이 아니다. 민중은 예수와 더불어 있을 때, 예수는 민중과 더불어 있을 때 생동한다. 이 둘은 서로가 관계를 가질 때 생동한다.

예수는 이미 헬레니즘화되고 돈이 통용되는 도시(예컨대 사마리아의 수도인 세포리스, 티베리아)에 다닌 기록은 없고, 농촌에서 농촌으로 다녔다. 그를 둘러싼 민중이 가난했듯이 그도 가진 것 없는 떠돌이였다. 그가 제자들을 현장으로 보낼 때 지팡이 외에는 아무것도 갖지 말고 가라고 한 것(6, 7 이하)은 바로 그의 삶의 모습이며118)G. Theissen, op. cit. 참조. 그것이 또 마르코시대의 민중의 강제된 상태와 상통한다.

그는 민중과 무조건 어울리며 저들(민중)의 저력을 일깨워주는 이른바 의식화작업을 하거나 '민중아! 뭉쳐라'고 함으로 저들을 투쟁사관에 비추어 한 기능으로만 보고 몰아붙이려고 하지 않는다.119)김용복, 앞의 글. 그는 다른 것과 관련해서 민중을 목적격화하는 것을 거듭 반대한다. 그는 저들에게 아무런 조건도 제시하지 않고 있는 그대로의 그들을 하느님의 아들과 딸로 받아들였다. 세상이 저들을 죄인으로 낙인 찍은 것을, 이태백이 달만 보고 따라가므로 바닷물을 의식하지 못했듯이, 예수는 묵살해버렸다. 그러므로 예수의 말 중에는 이른바 죄인을 책망하는 곳은 한 곳도 볼 수 없고, 바로 눌린 자와 가난한 '죄인'들을 비판하는 자들을 비판한 것만 전해질 따름이다.

예수가 저들에게 먹을 것을 주고 병을 고쳐주었다는 기사가 마르코에는 중요한데, 그것에서 예수의 초인성을 눈여기기보다는 민중의 소원에 응한, 또한 민중이 지닌 자기 능력의 표출로 보면 안 될까? 그것은 '너와 더불어의 존재'가할 수 있는 탈아적(脫我的) 능력이 아닌가? 그것은 더불어 일어난 사건이지 예수 혼자 한 것이 아니다. 그러기에 마르코에서는 예수가 고향에서 그들이 예수의 능력을 믿지 않기에 "아무 이적을 행할 수 없다"라는 말이 가능했고, "네 믿음이 너를 낫게 했다"는 선언을 할 수 있었으며, 그의 십자가처형까지의 수난사에서 그의 무능이 별 변호 없이 그대로 제시되고 있는 것이다.

예수는 시종일관 민중의 언어를 썼다. 그것이 바로 그의 언어였으리라. 민중언어의 특징은 이야기(Erzahläung)체라는 것이다. 문자도 모르고 논리적 훈련도 받지 않았을지라도 살아 있는 사람이면 누구라도 알 수 있는 말이다. 이 말은 삶 전체에서 나온 말이지 머리에서 나온 말이 아니다.120)안병무, 「그리스도교와 민중언어」, 『현존』 제10호. 1980. 현영학은 "몸으로 사는 민중의 언어"라고 표현하고 있는데, 이것이 더 적당한 표현이다(「한국 가면극 해석의 한 시도―신학적 해석」, 『한국문화연구원 논총』 제36집, 이화여대 참조).

민중언어는 예수의 '존재의 집'이며 마르코의 '존재의 집'이다. 이 민중언어는 구전을 그 특징으로 한다. 그런데 마르코가 잃어가는 이런 민중언어를 수집해서 그것을 언어화한 것은 민중적 삶의 요청에서 나온 것이며, 그런 의미에서 민중적 지혜요, 승리라고 할 수 있다.121)김용복, 「민중의 사회전기와 신학」, 『신학사상』 제24호, 1979년 봄호. 그는 "민중의 사회전기는 기록으로 남은 것이 많지 않다. 따라서 민중의 사회전기는 숨은 기록이 되어버렸다. 우리의 과제는 민중의 사회전기 발굴에 있고 민중의 사회전기에의 참여에 있다"고 했는데, 마르코야말로 그런 선구자가 아닐까? 현영학은 이 작업의 일환으로 민중의 언어를 특히 가면극에서 찾아 "몸으로 사는 천하고 못난 민중"의 통찰력과 지혜를 본다. 현영학, 위의 글 참조.

넷째, 민중의 수난이다. 예루살렘은 예수를 체포해서 처형한 장소이다. 예루살렘은 처음부터 예수를 없애고 싶어한다. 그것도 헤로데 당원과 야합해서(3, 6)! 갈릴래아의 민중이 꼭 그런 처지에 있었듯이 예수의 수난은 철저한 고독 속에서 이루어진다. 그 누구도 그의 편에 있지 않다. 무엇보다 민중에게 버림받고, 제자들도 그를 버리고, 심지어 그중의 하나는 그를 배신하기까지 한다.

이런 일련의 사실에서 예수와 저들을 주객으로 분리시켜보면, 갈릴래아 민중과 예루살렘의 민중이 다르다느니,122)田川建三, 앞의 책, 133면 이하. 가리옷 사람 유다는 이념적으로 예수에게 실망했기 때문이라느니 하는 구구한 설명이 필요하지만 그것이 민중이 당한 억울함의 압축이라고 보면 다른 설명이 필요없다. 그가 당하는 곤욕과 고독한 처형은 바로 그때 민중의 운명을 드러내는 것이다. 여기서 나자렛 예수가 버림받고 부당한 재판을 받고 십자가에 처형되는 것이 아니라 민중(집단)이 그렇게 당한다.123)서남동(「민중신학의과제」, 『신학사상』 제24호, 심포지엄)은 예수를 민중의 상징으로 본다. 이 수난의 예수(인자)는 집단의 표상이다. 마르코는 여기에서 바로 그의 삶의 자리의 민중의 운명을 보고 있다. 아니, 그 민중의 운명에서 예수 수난이 현재화되고 있음을 보았을 것이다. 더욱이 게쎄마니 동산에서부터 십자가처형까지 유신론자들이 기대하던 어떤 일도 일어나지 않았던 것처럼, 치면 맞고, 찌르면 피가 나고, 못 먹으면 굶고, 한계에 도달하면 죽는, 그런 너무나 힘없는 그리고 어떤 '기적'도 일어나지 않는 갈릴래아 민중의 현장에서, 하느님에게까지 버림받은 예수의 십자가는 재생된다. 그렇지 않고서야 어떻게 그토록 삭막한, 철저히 버려진 어둠만 그릴 수 있겠는가!124)안병무, 「수난사에서 본 마가신학」, 『신학사상』 제3호.

이스라엘이 꼼짝못하고 로마에게 죽듯이, 예루살렘이 한 번의 기적도 없이 무너지고 그 성전이 돌 하나 돌 위에 놓이지 않고 무너져 폐허가 되듯이, 여기 한 민중이 그렇게 무력하게 아무런 보호를 받지 못하고 죽는다. 그러니 마르코의 민중은 그 죽음에서 바로 자기들의 죽음을 볼 수 있었고 그 예수가 우리를 대신해 죽는다고 본 것이다. 그런 뜻에서 최후만찬설화가 전승된다. 그러나 십자가에 처형된 예수는 '너희를 위해'라는 대속적인 자세가 아니다. 아니, 슬픔에 빠진 민중처럼 실존적 고투를 하는 것이다. 그것은 영웅의 죽음이 아니다. 버림받은 자의 죽음이다. 그런 뜻에서 마르코가 "나의 하느님, 왜 나를 버리셨습니까"라는 시편의 소리로 예수의 최후의 절규를 삼은 것은 고난당하는 민중의 현장에서만 가능한 이해요 감격이다. 그의 죽음이 초인적이었다면 그를 향한 민중은 버림받은 의로움에서 너무도 절망했으리라. 그러나 더 중요한 것이 있다. 그것은 한 맺힌 처절한 사건으로써, 민중신학자 마르코는 그 버림받은 사건에서 '힘은 힘으로', '폭력은 폭력으로'라는 악순환에 대한 '단'(斷)의 현실을 보았다.125)서남동은 김지하의 斷을 恨과의 변증법으로 말하며, 그것은 사회혁명과 다른 점이라고 한다. 그것은 恨 추구와 더불어 악순환적 폭발을 억제보다 높은 정신적 힘으로 승화하는 斷의 반복이라고 한다.

수난의 예수는 분명히 로마와 그 앞잡이들에 의해서 처형될 처지에 놓였으면서도 마치 하느님이 그를 죽이려 한다는 듯이 하느님과만 대결한다. 이것은 악순환을 '단'(斷)하려는 가장 강력하고 순수한 형태로 볼 수밖에 없다. '칼은 칼로'가 아니라 원수의 칼을 죽음으로 삼켜버림으로써 그리고 그것에 자신을 내맡기고 무덤에 들어가 기까지 포기해버림으로써 그 순간부터 그 칼이나 폭행이 설 자리가 없게 만든다. 이렇게 죽음으로의 대항은 저를 죽이려는 주체들의 추한 얼굴을 폭로할 뿐, 예수는 끝끝내 침묵으로 일관한다. 이 모든 것이 '단'(斷)의 행위의 일환이다.

다섯째, 예루살렘이 예수를 삼켜버렸다. 그러나 그를 가둔 무덤은 그를 토해버렸다. 이 사건은 절망한 베드로를 위시한 갈릴래아 민중의 부활을 의미한다. 예루살렘이 아니라 갈릴래아에서 만나자는 약속(마르 14, 2816, 7)은 그들의 부활을 전제한다. 그런데 마르코는 이미 40년 전에 있었을 그 현장을 소개하지 않고 갈릴래아에서 만나자는 것으로 붓을 내려놓고 만다. 왜? 40년 전에 부활현현했다는 그것은 너무도 엄청난 사건이었고, 그렇게 갈구하던 새 세계의 서막이라고 보았는데실은 그게 아니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그는 그 사건을 과거사로하지 않고 마르코의 민중에게 이제 올 '파루시아'(Parousia, 내림)로 제시함으로써 새 희망의 거점으로 삼는다.126)이것은 Marxen의 견해이다. 그런데 이제 만날 그는 바로 민중의 현장인 갈릴래아로 온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 예수는 이미 '단'(斷)의 대단원을 처리해버린 다음의 그이다. 그는 구름을 타고 오는 이가 아니고 예루살렘에서 처형되었다가 그 곳에서 '단'(斷)의 승리를 거두고 다시 돌아오는 예수이다. 즉 갈릴래아의 예수인 것이다.

 

■ N.C.C. 신학연구위원회 편, 「민중과 한국신학」, 1981년 9월에 수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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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을 말한다 (마르 12, 28-34)
존재 근거 (시편 42편)
우주의 품으로 (시편 8,3 이하)
   
판권
표지
예수의 민중사건 : 『민중과 성서』를 내면서
   
제1부 복음서와 민중
   
예수와 민중 : 마르코복음을 중심으로
    1. 전제
    2. 마르코복음 안의 오클로스
    3. 마르코복음에 나타난 오클로스의 성격
        1) 오클로스의 성격
        2) 오클로스에 대한 예수의 행태
        3) 종합
    4. 예수를 따른 자들
    5. 마르코복음 안에 있는 어록
    6. 오클로스의 언어학적 의미
        1) 라오스와 오클로스
        2) 오클로스와 암 하 아레츠
    7. 종합
마르코복음에서 본 역사의 주체
    1. 전제
    2. 마르코의 삶의 자리
    3. 마르코의 민중신학의 기조
        1) 세례자 요한이 잡힌 후(14a절)
        2) 갈릴래아로 가다
        3) 하느님 나라의 도래 선포
    4. 민중의 행태
예수사건의 전승 모체
    1. 문제 제기
    2. 케리그마의 성격
        1) 고린토전서 15장 3~8절
        2) 필립비서 2장 6~11절
        3) 사도행전에 나타난 케리그마
    3. 민중언어의 성격
    4. 수난사
    5. 예수의 행태 일반
        1) 기적 이야기와 예수의 행태
        2) 아포프테그마와 예수의 행태
        3) 로기온(Logion, 어록)과 예수의 행태
    6. 결론
가난한 자 : 루가의 민중 이해
    1. 가난한 자
        1) 통계적 고찰
        2) 루가의 특수자료
        3) 예수의 탄생설화와 나자렛 선언
        4) 마르코와 Q자료
    2. 루가복음서의 청중
    3. 결론
마태오의 민중적 민족주의
    1. 문제 제기
        1) 마태오의 신학적 주제에 대한 논의들
        2) 문제 제기
    2. 마태오가 처한 현실
        1) 마태오와 그의 시기
        2) 민족적 와해 위기
    3. 마태오의 현실인식
        1) 이스라엘 : 길 잃은 양들
        2) 길 잃은 양이 놓여 있는 현실
    4. 민족동일성 재확립
        1) 뿌리 찾기
        2) 바리사이파가 주도하는 라삐 유다교와의 대결
    5. 마태오의 민중 이해
        1) 언어적 성격
        2) 의식화된 민중
    6. 맺는 말
민중신학의 성서적 근거 : 마르코복음을 중심으로
    1. 예수사건의 재발견
    2. 마르코복음과 민중
    3. 민중은 수단이 아니다
    4. 민중은 객체일 수 없다
    5. 십자가는 민중수난의 극치다
민중신학의 어제와 오늘
    1. 독재와 대항하므로
    2. 민중을 만나므로
    3. 민중과 더불어
   
제2부 민중운동사
   
민중사건과 언어사건
    1. 성서에서 본 말의 성격
        1) 그 말의 현장은 어떤 것이었나
        2) 예수의 경우
        3) 예수사건에 관한 전승
        4) 오순절의 말 사건
    2. 무엇으로 말하는 것인가
    3. 해야 할 말은 무엇인가
    4. 우리가 해야 할 말
미래는 가난한 자의 것 : 루가 6장 20~26절
    1. 축복과 저주
    2. 가난한 자와 부요한 자
    3. ‘지금’과 ‘장차’
    4. 우리의 선택
나라가 임하옵소서
    1. 예수의 기도
    2. 그의 기도를 전달받은 자들
    3. 하느님의 나라
고향 잃은 민중
    1. 피난민
    2. 성서에서 본 피난민문제
    3. 게르(GER) 문제 해결의 시도
    4. 이방인에 대한 관용의 한계
    5. 당면한 과제
        1 ) 새로운 인식을 위한 운동
        2) 실천에 대한 몇 가지 제언
이스라엘 민중사
    1. 머리말
    2. 출애굽
    3. 고대 이스라엘 종족동맹
    4. 민중을 배반하고 세워진 왕권
    5. 분단시대의 고난
    6. 민중운동의 여러 계열
    7. 예수의 민중운동
    8. 맺는 말
   
제3부 민중과 체제
   
민중사실의 증언
    1. 민중신학의 전제들
    2. 민중사실의 증언
고난과 고백
    1. 수난자와의 일치
    2. 마르코의 민중
    3. 수난사와 고난
    4. 더불어의 고난
    5. 맺는 말
갈릴래아 민중에 항복한 바울로
    1. 바울로의 위치
    2. 사울은 어떤 사람인가
    3. 그리스도교 박해
    4. 예수를 만남
    5. 전향
    6. 맺는 말
소명(召命)
    1. 바울로의 소명
    2. 사도 됨과 소명
    3. 이방인에게로
바울로와 역사의 예수 I
    1. 머리말
    2. 예수에 대한 바울로의 말
    3. 예수냐 바울로냐
    4. 왜 예수가 아니고 케리그마인가
선택받은 민중: 고린토전서 1장 26~31절
    1. 고린토교회 구성원의 사회계층
    2. 공동체원의 가치 판단 기준
    3. 민중을 보는 눈
    4. 택함을 받은 민중
   
제4부 예수의 희망
   
하늘도 땅도 공(公)이다
    1. 낙원 이야기
    2. 아담一인간
    3. 실락원은 공을 사유화함으로
갈릴래아에서 만나자: 마르코 16장 1~8절
    1. 제3의 자리
    2. 갈릴래아
    3. 갈릴래아에서 만나자
예수의 희망
    1. 새 세계에의 희망
    2. 희망과 세계혁명
    3. 바른 인간공동체의 희망
    4. 맺는 말
   
판권
표지
예수는 논하지 않았다
   
제1부 민중의 언어, 이야기
   
1. 성서라는 책의 성격
2. 성서의 서술양식
    1) 구약성서
    2) 신약성서
    3) 민중언어
   
제2부 예수의 이야기(비유)
   
1. 만성병에 걸린 세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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