디벨리우스는 사도행전에서 원초적인 케리그마의 원형들을 지적하고 있다. 그것들은 2장 22절 이하, 3장 13절 이하, 10장 37절 이하, 13장 23절 이하이다.25)M. Dibelius, Die Formgeschichte des Evangeliums, S. 15. 디벨리우스는 사도 5, 30 이하도 유사하다고 지적하고 이방인에게 행한 설교인 14, 15 이하와 17, 33 이하도 언급하고 있으나, 그 구절을 일반 케리그마와 구별하고 있다. 불트만 역시 사도행전에서 케리그마의 원형을 사도 2ᆞ22~24ᆞ3, 13~15ᆞ10, 37~41ᆞ13, 26~31에서 본다(R. Bultmann, Die Geschichte der synoptischen Tradition, Göttingen, 1957, S. 396). 도드는 대체로 그를 추종하면서 여기에다 4장 10절 이하를 첨가하고 있다.26)C. H. Dodd, The Apostolic Preaching and Its Development, p. 22. 이들이 지적한 케리그마의 성격을 한마디로 집약하면, 예수의 죽음과 하느님이 그를 다시 살려 일으켰다는 데에 초점이 있다. 그러나 바울로가 전승한 케리그마와 비교하여 특유한 점을 몇 가지 지적할 수 있다.
첫째, 예수의 생애의 일부를 비록 포괄적인 표현으로나마 언급한 것이 있다는 것이다. 가령 도식적인 케리그마 외에 예수가 "권능과 기이한 일과 표정을 행했다"는 것(2, 22), 그의 선교무대가 갈릴래아였으며 거기에서 두루 다니며 귀신을 쫓았다는 것(10, 37~38) 등이다. 13장 23절 이하는 예수의 생애에 관해 좀더 첨가하고 있다. 그것은 예수가 다윗의 자손이라는 것, 세례자 요한의 세례 선포, 예루살렘의 지도자들이 그를 정죄하고 처형했다는 것이다. 이 점과 관련하여 사도행전에 나타난 케리그마에는 복음서에서 볼 수 있는 아람적(Aramaic) 요소가 많이 반영되어 있는 것도 주목할 필요가 있다.27)ibid., p. 19.
둘째, 그 케리그마는 예수의 십자가사건을 언급하는 데 있어서 빌라도의 책임을 변호하고 유다 지도자들에게 그 책임을 돌림으로써 예수의 처형 책임자를 분명하게 지적하고 있다. 가령 유다인들이 그를 십자가에 처형했다는 것(2, 23ᆞ3, 14ᆞ10, 39ᆞ4, 10)과 한걸음 더 나아가서 빌라도는 그를 무죄로 인정하고 그를 놓아주려고 했으나 유다 사람들이 끝끝내 이것을 거부하고 오히려 예수 대신 다른 살인자를 놓아주려 했다(3, 13)는 점이다.
셋째로는 사도행전에 나타난 케리그마에는 '하느님의 아들'이라는 칭호 대신 '다윗의 자손'이라는 칭호가 사용되고 있다는 것을 들 수 있다.28)ibid., p. 25.
사도행전에 나타난 케리그마의 단편들 중에 케리그마의 원형이 있다는 것은 부정할 수 없다. 그러나 역사적 예수의 편모들을 비록 포괄적으로나마 언급한 것은 종말론적 여건 때문29)ibid., p. 31.이 아니라 마르코복음 또는 다른 것에 의해서 예수의 행적과 역사적 사건을 알고 있던 루가가 첨가한 것이라고 보여진다.30)E. Haenchen, Die Apostelgeschichte, Göttingen, 1957, S. 152f. 사도행전의 저자인 루가는 초기의 케리그마에다가 그가 알 수 있었던 예수의 행적ᆞ행태를 가미한 것이다. 이런 전제들을 안정할 때 사도행전에 나타난 케리그마와 바울로가 전하는 케리그마 사이에 일관성이 있다는 주장은 긍정할 수 있다.
이외에 특히 바울로문서에서 전승된 케리그마의 단편들을 많이 찾을 수 있다.31)로마 1, 3 이하ᆞ6, 3ᆞ10, 9; 고전 11, 23~26이 이에 해당한다. 그러나 그 어느 것도 위에서 열거한 케리그마의 내용과 다를 바가 없다. 이런 현상은 바울로가 역사의 예수의 전기적 내용이나 말씀에 관해서 침묵하고 있는 사실과 상동하는 것이다. 바울로는 거의 개념화된 예수의 십자가 또는 그의 죽음을 자주 언급하였을 뿐, 단 한 번(갈라 4, 4 : 그의 아들을 보내셔서 여자에게 나게 하시고……) 외에는 역사적 예수에 관한 언급을 찾아볼 수 없다. 따라서 "이제부터 육으로 그리스도를 알려고 하지 않는다"(고후 5, 16)는 그의 모호한 발언은 이와 같은 맥락에서 이해되어야 할 것이다.32)무엇보다도 '그의 교리'를 형성함에 있어서 바울로가 이미 역사적 예수를 알고 있었기 때문에 그렇게 말했다는 주장은 받아들일 수 없다. 적대자에 대하여 자신의 권위를 세우는 데 지원이 그렇게 필요했음에도 불구하고 바울로가 예수의 말씀을 원용한 일이 없는 경우는 회귀한 일이다.
이상에서 본 케리그마의 성격에 근거해서 다음과 같이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예수의 역사적 사건을 서술하는 대신 재빨리 그 의미만을 표시하는 케리그마의 형태로 옮겨짐으로써, 예수의 사건은 사실상 추상화되었다. 그러면 그 이유는 무엇이었을까?
첫째, 정치적ᆞ사회적 조건들이 중요한 역할을 했을 것이다. 로마제국에 대한 반란자로 십자가에 처형된 예수를 주(主)로 내세워 그리스도교 공동체를 이끌어나가려고 하던 지도층은 예수의 죽음의 실태를 추상화해버림으로써 그 충돌을 회피하려 했다는 것은 쉽게 이해할 수 있는데 그런 노력이 케리그마 형성에 영향을 미쳤다.
둘째, 그 지도층들은 폭력으로 로마제국에 대항해서 싸운 젤롯당과 동일시되는 것을 회피하려고 했을 수 있다. 그러므로 그들은 예수가 로마제국과 유다 지도층에 의해 처형된 것을 표면에 내세우려고 하지 않았다.
셋째, 둘째 여건과 관련해서 지도층은 예수의 처형자들에 대해 예수의 민중이 가지는 적개심을 차원 높은 단계로 유도함으로써 민중의 폭력적 충돌을 피하려고 했다. 이런 점은 예수의 죽음에 대해서 어느 누구에게도 책임을 묻지 않고, 단지 하느님의 뜻이라고 강조한 데서 나타난다.
넷째, 공동체의 지도층은 예수의 사건을 유다교의 틀 안에서 해석 함으로써 유다교로부터 인정을 받으려고 했으며, 동시에 로마제국으로부터 유다교의 한 일파로 간주되기를 원했다. 까닭은 로마는 유다교를 공인했기 때문이다.
결국 그리스도교 공동체의 보존을 위한 이러한 변증적인 노력이 역사적 사건을 재빨리 케리그마의 형태로 옮기게 한 것이다. 그러한 노력은 다음에서 보는 바와 같이 예수의 역사적 사건에 대해서 침묵한 데 그친 것이 아니고 그것이 왜곡되는 결과를 초래했으며, 더욱이 공동체 다수의 뜻을 수렵하지 못했을 뿐만 아니라 그것에 반(反)하는 결과를 초래하게 되었다.
이제는 복음서의 예수사건 전승을 관찰할 단계에 이르렀다. 그것을 위한 전초작업으로 민중언어의 일반적인 성격을 규명하는 데서 출발하기로 하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