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의 기적행위에 대한 보도는 네 복음서 전체에서 29회에 달한다. 특히 마르코복음에는 예수의 말씀보다는 기적이야기에 초점을 모으고 있다. 양식사 연구에서는 이 이야기들이 각기 독립되어 전승된 것이라고 하는 견해가 통념이 되어버렸다. 그러나 기적이야기가 원시 그리스도교회의 설교에서 그 삶의 자리를 가진다는 견해(디벨리우스)나, 원시교회의 변증적인 동기에서 형성되었다는 견해(불트만)에는 동의할 수 없다.
케리그마 신학의 입장에서 보면, 초대교회의 설교에서 그 핵심은 '예수의 십자가의 죽음과 부활'이다. 그리고 그러한 근거 위에서 신앙의 촉구가 불가결한 요소로 되어왔다. 그러나 많은 기적이야기는 극히 제한된 일부의 예외를 제외하면 그렇지 않다.56)타이센은 마르 2, 5; 루가 5, 8; 요한 5, 14이 예외에 해당한다고 지적한다(G. Theissen, "Synoptische Wundergeschichten im Lichte unseres Sprachverständnisses", Wissenschaft und Praxis in Kirche und Gesellschaft, S. 292). 또 기적이야기 중 일부에는 부활사건이 반영되어 있다는 견해에 긍정할 수는 있으나57)타이센은 기적사화 가운데 세 군데에 예수의 부활이 반영되어 있다고 지적한다. 즉 죽은 자를 일으킨 것(루가 7, 11~17), 물 위로 걸은 것(마르 4, 28~31), 떡을 뗀 것(마르 14, 22~26)이다(Theissen, ibid., S. 293; G. Montefiole, The Synoptic Gospel, vol. I, 1927, p. 43). 예수의 고난에 대해서는 어떠한 암시도 찾아볼 수 없다. 뿐만 아니라 기적사건에 신앙이 조건으로 결부된 것은 기적사건 전체에서 단지 세 군데뿐이다.58)마르 5, 34ᆞ9, 23ᆞ10, 52이 여기에 해당한다. 이외에 마태오복음에 두 곳이 있는데 둘 다 이방인들의 신앙을 취급한 것으로 후대에 속한 것이다. 따라서 몇 가지 예외를 가지고 기적이야기를 일관되게 해석할 수는 없으며, 전체의 기적이야기들을 그리스도 케리그마에 흡수시킬 수가 없다.59)G. Theissen, op. cit., S. 292.
기적이야기들은 그리스도론적 신앙이 주요조건이 아니라, 병든 자, 배고픈 자, 귀신들린 자 또는 어떤 곤경 속에 처한 사람들을 그런 것들에서 해방시켜준다는 데 초점이 있지, 예수가 기적행위를 행함으로써 그리스도임을 과시하려는 데 있지 않다. 따라서 위에서 언급한 극히 제한된 예외에서 보는 신앙도 결국 그리스도 케리그마적인 신앙과는 전혀 다른 것들이다. 그러므로 어떤 각도에서 보더라도 이 기적이야기의 모체가 설교(케리그마)라는 주장은 타당하지 않다.
그러면 이 이야기들을 누가 전승했을까? 이 물음에 대해서 먼저 지적해야 할 사실은 기적사건 자체가 이야기체로 되어 있다는 것이다. 위에서 언급한 바와 같이 이야기는가장 민중적인 언어이다. 기적이야기는 하류층에 의해서 쉽게 수용되며, 그들의 신앙내용이 된다고 하는 것이 일반적인 견해이다. 이미 오리게네스(Origenes)는 기적은 교육받지 못한 민중에게서 주로 믿어졌다는 것을 말했으며, 타이센은 초기에는 기적신앙이 주로 민중 사이에 머물러 있었고, 3세기경에야 비로소 그것이 상류층에까지 확대되기 시작했다고 보고 있다.60)G. Theissen, op. cit., S. 294.
우리는 이 기적이야기들에 가난한 자의 경제적 동기, 소외된 자의 사회적 동기, 나아가서는 정치적 염원 같은 것이 반영되어 있음을 볼 수 있다. 우리는 이 기적이야기들에서 지적 욕구나 선교적 관심 또는 그리스도교에 대한 변증적 동기보다는 민중의 애환과 그들이 놓인 처절한 상황에서의 희망이 이 기적이야기를 압도하고 있음을 부정할 수 없을 것이다. 특히 마르코복음에는 귀선들린 자의 치유(Exorcismus) 이야기가 많은데, 사람들은 이것을 종교사학파의 주장대로 종말론적인 동기와 결부시켰을 뿐 사회적 조건과 관련해서는 별로 고려하지 않았지만, 귀신들린 자(정신병자)는 정치적 상황과 깊은 관계가 있다. 이방 민족에 의한 정치적 박해 현장은 귀신들린 자를 낳는 온상이라고 한다.61)W. E. Mühlmann, Chiliasmus und Nativismus, Berlin, 1961, S. 252; 타이센의 위의 논문 S. 294에서 재인용.
종말론, 그리스도론 나아가서는 구원론 등 종교적인 동기를 절대화함으로써 예수와 수난당하는 민중의 관계에 전혀 주목하지 않는 것은 바로 예수의 이야기를 그 현장으로부든터 유리시켜 관념화하는 것이다. 공관복음서의 기적이야기는 요한복음과는 달리 예수가 누구냐라는 데 대한 관심은 별로 없고, 그가 민중에게 무엇을 했는가 하는 것에 초점을 모으고 있다. 고난의 현장에 있는 사람들에게 중요한 것은 일차적으로 그 고난으로부터의 해방이다. 여기서 해방자에 대한 물음은 여유를 가진 자에게나 가능하다. 더구나 해방자에 대한 형이상학적 사변 따위는 그 사건을 객관화시킨 자들이나 하는 일이다.
양식사학자들은 문서화된 기적이야기에서 일정한 양식을 찾아내고 있지만, 그것을 일원화하려는 데에는62)가령 디벨리우스는 기적이야기의 결어에는 항상 송영결어(Chor-Schluss)가 따른다고 보고 있다(M. Dibelius, Die Formgeschichte des Evangeliums, S. 50). 그의 이적사화가 갖는 전형적 형식에 대해서는 R. Bultmann, Die Geschichle der synoptischen Tradition, S. 236~241/ 허혁 역, 『공관복음서 전승사』, 272~282면 참조. 큰 무리가 있다. 그리고 양식화되기 이전의, 즉 구전 전승의 원형이 그 양식에 의존하지 않는 목격자의 진술에 근거한 민중의 전승이라는 점을 간과하는 것은 큰 잘못이다. "예수가 기적을 행했을 수도 있다"63)R. Bultmann, Die Geschichle des synoptichen Tradition, S. 244/ 허혁 역, 라고 만전제하고 기적이야기의 분석에서 그 역사성을 전혀 묻지 않는 것은 신학적 편견에 근거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