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이상에서 예수사건의 전승 주체는 마르코복음에서 보여진 대로, 여인들을 위시한 민중이라는 사실을 논증하려고 했다. 이 민중전승을 수렴하여 그것을 중심으로 해서 최초로 복음서로 문서화한 사람이 마르코이다. 이것은 그 당시 원시교회의 정황으로 볼 때 혁명적인 결단이었으며, 그로 말미암아 비로소 우리는 추상적인 구문으로 된 케리그마의 배후에 감추어졌던 예수사건에 접할 수 있게 되었다.
그러면 마르코는 민중전승을 그대로 전승했다는 말인가? 그렇지는 않다. 마르코는 이미 그리스도 케리그마를 잘 알고 있었던, 적어도 2세대 이후의 그리스도인이었다. 그가 민중전승을 교회 속으로 끌어들인 것은 케리그마화되어가는 과정에서 역사적 예수에게서 일어난 사건들의 진상이 퇴색하거나 사라져버리게 되어, 그것으로 인해서 교회가 교리와 제도만으로 경직화되어가는 데 대해 도전함으로써 새로운 활력소를 제공하려고 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리스도 케리그마와 민중전승 사이에서 있는 자로서 마르코는 예수사건들을 문서로 공석화하는 과정에서 '타협'을 면치는 못했다.
그중에서도 가장 두드러진 것은 예수 처형의 장본인을 모호하게 한 점이다. 예수 처형의 장본인이 로마제국이었음이 분명한 것은 그가 정치범으로 십자가에 처형되었다는 사실 자체만으로도 입증된다. 그런데 예수를 처형한 빌라도에 대한 서술은 마치 빌라도가 여론에 밀려서 마지못해 예수를 처형한 것으로 극히 모호하다.67)마르 15, 9ᆞ15, 12ᆞ15, 14 이하의 서술을 보라. 더욱이 마태오와 루가는 마르코의 보도와 다르다. 마태 27, 15 이하에서 빌라도의 아내(27, 18) 이야기와 빌라도의 손씻음(27, 24 이하)을 삽입함으로써 빌라도를 변호하려 하고 있다. 루가 23, 13 이하도 참조. 이것은 다른 문헌을 통해 알려진 빌라도의 인품으로 보아서도 불가능한 사실이다.68)당대의 헤로데 아그리빠는 빌라도를 성격이 강경하고 안하무인이라고 했고, 그의 통치를 "뇌물을 일삼고 폭력, 약탈, 횡포, 협잡, 재판 없는 살인자행 등으로 이룩한" 것이라고 했다. 이러한 그의 평을 뒷받침하는 자료로서 Jos. Ant., 18. 3f.; 55 ff. Rel 11. 9, 196. 72 등이 있다. 그리고 마르코는 간단히 케리그마적 요소를 삽입하고 있는데, 그 결과는 본래 전승과 조화되지도 않거니와 본래 전승의 모습을 모호하게 만들고 있다.
2. 이상에서 예수사건의 전승 주체가 단일한 것이 아니라, 적어도 둘 내지 셋 이상이었을 것이라는 결론에 도달했다. 그중에서 그리스도 케리그마의 전승 주체와 예수사건의 전승 주체는 뚜렷하게 구별된다. 이미 슈미탈즈는 이 사실을 인지하고 그리스도 케리그마 이해에서 이루어진 원시교회와 예수의 전승을 보존했던 공동체를 구분하고,69)W. Schmithals, Jesus Christus in der Verkündigung der Kirche, 1972, S. 60ff. 단 슈미탈즈는 후자를 "예수의 소종파"라는 이름을 붙여서 격하시킨다(S. 72). 또 마르크센(Marxen)은 이 둘간의 차이를 인정하여 그리스도 케리그마에 대해서 예수 케리그마라는 특수용어를 사용하였다.70)W. Marxen, "Die urchristischen Kerygmata und das Ereignis Jesus von Nazareth", ZThK 73, 1976. 특히 S. 52ff.에서 마르크센은 이 둘의 기본적인 차이점을 그리스도론에 있다고 보고 이 둘이 만날 수 있는 장이 있다면 그것은 구속론에서만 가능하다고 본다.
여기에 대해서 나는 이상의 논술에서, 예수사건의 전승 모체는 어떤 소종파를 이루었거나 또는 예수 케리그마를 보존한 어떤 교회가 아니라, 교회원이라는 의식을 가지기 이전의 예수사건의 목격자였으나 정치적 여건과 교회의 위치 때문에 그 사실을 공적으로 전승할 수 없었던 민중이었으며, 그들이 유언비어의 형태로 예수사건을 전승했다는 사실을 입증하려고 했다.
■ 이 글은 1984년 10월 12일, 전국신학대학협의회가 주최하고 한국신학연구소가 후원한 '한국기독교 100년 기념 신학자 대회'의 발제논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