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들 중에는 루가복음을 현실과 타협하고 있다는 관점에서 과소평가하기도 하는데 거기에는 그럴 만한 근거가 있다.
첫째, 루가는 그의 복음서를 어느 고급관리(로마제국의 관리일 수 있다)에게 증정하기 때문에 로마제국과의 타협을 모색하는 것처럼 보인다는 점이다. 그래서 그 내용도 빌라도의 무죄를 변호하는 경향이 농후하고 갈릴래아보다는 예수를 처형한 예루살렘에 큰 비중을 두고 있다. 이러한 점들이 루가 비판에 곧잘 등장한 주된 근거로 내세운다.
둘째, 그의 종말관이 마르코와 비교할 때 상당히 변질되었다는 점이 지적된다. 루가복음에는 하느님 나라의 도래에 대한 선포가 많이 후퇴한 것은 사실이다. 종말론의 후퇴는 현체제의 승인과 함수관계에 있기 때문에 일반적으로 종말론이 후퇴할 때는 일반윤리가 크게 전면에 나서게 된다.1)H. Conzelmann, Die Mitte der Zeit, 1960, 특히 S. 87~92. 그의 글 「예수 그리스도 R. G. G.」참조.
셋째, 우리의 관심에서 무엇보다 중요한 지적은 루가가 민중의 위치를 격하 내지 변질시켰다는 견해이다. 이런 주장은 가장 중요한 근거를 그의 언어 사용에서 찾는다. 루가는 마르코가 사용한 '오클로스'(ὄχλος) 대신 마르코복음에서는 거의 사용되지 않고 의도적으로 기피했다고 생각되는 '라오스'(λαός)를 많이 사용하고 있다는 점이다.2)田川建三, 『原始キリスト敎史の一斷面』, 128면. 그는 루가가 '귀족적 경향'을 가졌다고까지 터무니없는 전제를 한다. 그는 이 단어를 무려 36회나 사용하며(사도행전에는 48회) 그 중에는 마르코의 오클로스를 의도적으로 라오스로 대치한 부분도 있다. 라오스는 구약의 70인역인 셉두아긴타(Septuaginta)에서 압도적으로 많이 쓰인 것인데, 만일 그가 이 전통에 의거하고 있다면 '하느님의 백성'이라는 뜻으로, 그만큼 유다적 용법을 사용하려 했으며 따라서 마르코의 오클로스의 뜻이 달라질 수 있다. 그러나 그것이 민중의 격하 내지는 무관심이라고 판정하는 것은 피상적 판단이다. 이 사실은 이 논문에서 밝혀질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루가가 기여한 고유한 공헌을 간과할 수는 없다.
첫째로, 무엇보다도 그가 역사가의 입장에서 예수사건을 서술한 최초의 인물이라는 점을 높이 평가해야 할 것이다. 물론 루가는 현대적인 의미의 사가(史家)는 아니지만 예수사건을 세계사(정치사)의 맥락에서 보려고 했다는 것은 중요하다.
둘째는 첫째와 관련해서 그가 일정한 사관(史觀)을 갖고 있었다는 사실을 중시해야 한다. 흔히 사람들은 그의 사관을 '구속사관'이라고 한다. 그는 그의 구속사관을 통하여 예수 행태의 순수성을 전승할 수 있게 했다. 가령 마태오복음은 예수 전승을 마태오의 상황에 맞게 수정 내지 가미하려는 노력이 뚜렷하다. 그런데 루가에는 그러한 고려 없이 대담하게 그대로 전승하고 있다. 그의 구속사관은 '예수시대'와 그후 시대로서 '성령의 시대'를 구분하고 있다. 성령의 시대가 바로 '교회의 시대'인데 그것은 예수 자신의 시대와 엄연히 다르다.3)H. Conzelmann, op. cit.; W. G. Kümmel, Einleitung in das N. T, S. 72~93. 그러므로 루가는 교회의 입장 때문에 예수 전승을 그것에 맞게 수정 또는 처리하지 않아도 되었던 것이다. 그러나 이 말은 결코 루가는 이른바 역사적 예수를 그대로 전승했다는 말은 아니며, 또 그 자신이 속한 시대와 무관하게 예수사건을 전승했다는 말도 아니다. 아니 오히려 그는 교회가 취해야 할 입장과 교회가 해야 할 말들을 예수의 입을 통해서 말한다. 그런 경우 예수의 말씀을 위축하는 것이 아니라 더 철저화시킨다.
이상과 같은 루가의 특성을 고려할 때 위의 루가에 대한 비판은 수정되어야 할 부분이 있을 것이다.
이 논문은 루가의 민중관으로서의 가난한 자에 대해서 고찰하려고 하는데, 이로써 그가 민중을 경시 내지 소홀히 했는지 아니면 오히려 구체화했는지를 가름하게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