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제 위에서 얻은 시각을 가지고 그외의 루가 특수자료들을 보자. 예수의 탄생 이야기 중 이른바 마리아 찬가는 루가의 관심이 어디에 있는가하는 것이 두드러지게 나타난다.
주께서 그의 팔로 권능을 행하시고
마음이 교만한 사람들을 흩으셨으니,
제왕들의 권력을 낮추시고,
낮은 사람들을 높이시고,
주린 사람들을 좋은 것으로 배부르게 하시고,
부한 사람들을 빈손으로 떠나 보내셨도다(루가 1, 51~53).
이 찬가는 교만한 자―제왕―배부른 자에 대하여 낮은 사람―주린 자들을 대립시키고 있다. 이것은 '들의 설교'에서 가난한 자와 부유한 자를 대립시킨 것이나 만찬 초대의 비유에서 기득권자와 소외된 자를 대립시킨 것과 유사하다. 그러나 이것은 '들의 설교'나 만찬 초대의 비유에서보다는 훨씬 혁명적이다.
이 찬가는 본래 유다 묵시문학에서 형성된 시라고 보는 주장도 있는가 하면,25)H. Gunkel, "Die Lieder in der Kindheitsgeschichte", Festgabe für A. von Harnack, Tübingen, 1921, S. 43ff. 마카베오전쟁 때 형성된 진군의 노래라고 보는 견해도 있다.26)P. Winter, "Magnificat and Benedictus-Maccabean Psalms?", BJRL, 37, 1954, pp. 328ff. 그중의 어느 것이 옳든지 간에 이 찬가에는 유다의 민족주의적 염원이 내포해 있다는 말이 되는데,27)I. H. Marschall, op. cit., S. 87. 특히 유다전쟁 동안 젤롯당의 치열한 봉기와 그 비참한 패배를 경험한 청중에게는 결코 추상적일 수 없는 내용이다. 루가가 이러한 노래를 예수의 탄생과 결부시킨 것은 예수사건에 대한 이해와 무관할 수 없다.
다음에 예수 탄생의 장소가 마구간이었다는 것도 루가의 고유한 전승으로서 루가의 예수 이해와 부합한다. 여기서는 마구간 탄생설화가 어떤 이방의 신화와 관련이 있다고 하는 지적28)R. Bultmann, Synoptik, S. 323ff.; H. Schurmann, Das Lukas Evangelium I, 1969, S. 118 참조.은 그렇게 중요하지 않다. 루가는 이 설화를 그런 이방적 전승의 상징으로 독자(청중)가 이해할 것을 기대하지도 않았으며, 청중에게 그런 기대를 한다는 것은 사실상 불가능하다. 예수를 메시아로 전제할 때, 일반적인 통념으로 그가 난 장소를 오히려 궁궐과 연결시킬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마구간은 궁궐과는 대조된다. 궁궐이 권력과 부의 상징이라면, 마구간은 예나 오늘이나 가난의 상징일 수밖에 없다.
그의 탄생 현장에 참여한 자들이 목동들이었다고 하는 것도 루가 적이다. 이것은 마태오복음에서 보는 동방의 현인과는 대조를 아룬다. 목동들은 유다 사회에서 천시를 받았고 또 가난의 상징이기도 했다.29)I. H. Marschall, op. cit., S. 144. 그렇게 볼 때 예수의 탄생을 목동들만 알았다는 것은 바로 예수와 저들 간의 연대관계를 나타내는 것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30)불트만(op. cit.)은 이 이야기에서 종교사학파적으로 유다교적 근거를 찾고 그것의 징표(σημειον)성에 의미를 줄 뿐이다. 슈나이더(Das Evangelium nach Lukas I, Güterslocher Taschenbücher, 1977, S. 65f.)는 대체로 불트만의 입장을 따르면서도 2장 1~5절에서 로마황제를 내세워 예수의 탄생이 초라한 출생으로 대조적으로 부각시키려고 했다는 것이다. 그 이유는 유다 메시아관을 수정하기 위함이라고 한다. 그런데 목동의 경배는 다윗과의 관계를 상징하기 위한 것이라는 모순된 결론에 도달한다. 이에 대해서 마샬은 이 탄생 서술에서 예수가 세상에서 배척받으리라는 사실과 하류층 인간을 용납하리라는 뜻이 나타났다고 했다(op. cit.).
예수가 그의 공생애 출발에 즈음하여 나자렛에서 행한 선언(4, 18 이하)은 전승된 그의 행태와 부합한다. 이 선언은 이사야서를 인용한 것으로서 가난한 자들에게 복음을 선포하는 것을 주목적으로 하고 있다. 또한 그 선언에서 언급되고 있는 "포로된 자, 눌린 자, 불구자……"는 가난한 자와 직결되어 있으며, 또한 주의 은혜의 해가 선포되는데 그것이 희망을 의미한다면 그것은 일차적으로 가난한 자들에게 해당된다.
마르코는 예수의 첫 선언을 하느님 나라의 도래 선포로 요약하고 있다. 이에 대하여 루가에는 이 하느님 나라의 도래 선포가 후퇴하고 그 대신에 위의 선언(4, 18 이하)이 그 자리에 놓인다. 이로써 루가는 예수와 더불어 도래할 하느님 나라의 현실을 훨씬 더 구체적으로 보여준다.31)콘첼만(Die Mitte., S. 105)은 루가는 이로써 하느님 나라가 가깝다는 것을 가르친 것이 아니라 하느님 나라 자체를 가르쳤다고 한다. 즉 그 나라 도래(Kommen)가 아니라 그 나라의 본질(Wesen)을 가르쳤는데 그것이 바로 4장 18~21절이라고 한다. 그러면서 그는 이 메시아적 프로그램은 비정치적인 것으로 서술한다고 한다(op. cit., S. 129). 이것은 그가 루가의 대로마 자세를 획일화하려는 데서 온 부당한 전해다. 그러므로 루가는 무엇보다도 하느님 나라 그리고 예수의 내림의 의미를 피안적으로 해석할 가능성을 봉쇄하고 있으며, 루가에게 있어서 그 나라의 도래는 가난한 자를 주축으로 한 사회변혁을 의미하는 것이다.32)슈나이더(op. cit., S. 108)는 이것이 가난한 자에게 주는 선포임을 시인하면서 해방(ἄφεσις)을 말할 때 '죄에서 놓여남'을 생각했다고 하는 것은 도그마에 의한 본문 왜곡의 전형적 모습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