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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민족적 와해 위기

A.D. 90~100년에 유다 민족과 그 사회에 가장 큰 영향을 끼쳤고, 계속적으로 그들이 생활을 영위해가는 데 있어서 내외적인 상황의 동인(動因)이 되었던 것은 무엇보다도 유다전쟁(A.D. 66~70년)이다. 유다전쟁은 민족운동과 그 구심체 자체가 완전 붕괴되는 결과를 빚었다.

 

(1) 유다전쟁 이후의 로마제국의 박해

유다전쟁 후 로마의 주권은 베스파시안(Vespasian, A.D. 69~79년 재위), 티투스(Titus, A.D. 79~81년 재위), 그리고 도미띠아누스(Domitian, A.D. 81~96년 재위) 3대가 통치한 이른바 플라비우스(Flavius)왕조(69~96년)가 장악했다. 이때가 바로 마태오의 삶의 자리를 결정하는 시기이다. 그러므로 그 정치 권력의 변천과정을 한 단위로 묶어 성찰해야 한다.

A.D. 68~69년에 로마제국에 정변이 일어났다. 그것은 동시에 네 사람이 각 지역에서 자신을 '카이사르'(Kaiser)로 선언했기 때문이다. 로마는 일순간에 혼란에 휩싸이게 되었고, 암살과 음모로 자고 깨면 황제가 뒤바뀌는 상황이 벌어졌다. 이런 와중에서 팔레스틴의 유다전쟁을 지휘하고 있던 베스파시안은 자신의 군대에 의해 추대되어, A.D. 70년에 황제의 자리에 올랐다. 이때부터 베스파시안의 이름을 딴 플라비우스왕조가 형성되어 3대에 걸쳐 군림하였다.16)E. Lohse, Umwelt des neuen Testaments, Göttingen, 1974, S. 152/ 박창건 역, 『신약성서배경사』, 178~179면.

단일 황제가 된 베스파시안은 그 아들을 공동통치자로 임명하는 동시에 유다전쟁을 종결지었으며17)베스파시안때에 예루살렘이 함락됐으나 티투스 때까지 젤롯당이 주도하는 국부적인 전쟁은 계속되었다. 베스파시안은 카이사르가 됨과 더불어(A.D. 69년) 자기의 두 아들인 티투스와 도미띠아누스를 자기 공동통치자로 삼았다. 팔레스틴을 속주로 삼고, 특히 유다주의를 뿌리 뽑기 위한 본격적인 작업에 들어갔다.18)Bo Reicke, Neutestamentliche Zeitgeschichte, Berlin, 1968. S. 218~219. 그 뒤를 이은 티투스는 사람들의 예상을 뒤집고 관용정책을 폈으나 불과 2년 만에 요절함으로써 별 업적을 남기지 못한 채 도미띠아누스에게 제위를 넘겨주었다. 이 도미띠아누스가 바로 마태오복음이 성립된 시대에 군림한 장본인이다.

그는 베스파시안의 정책을 모델로 했으나 훨씬 공격적이었으며, 자신의 정적(政敵)에 대해서 잔인했다. 사상적으로 '국가종교'에 대해 매우 큰 열정을 가지고 있었고, 로마의 전통적인 종교와 황제의 권위에 대해 반론을 용납하지 않았다. 그는 자신을 '주'(κυριος) 또는 '신'이라는 칭호로 부르도록 했으며, 동전에 '신'이라는 칭호를 새기도록 했다. 그리고 모든 속주민들에게 황제제의를 요구했다.19)Suet, Vespa., 28, 4. 이러한 상황은 에즈라묵시록과 요한묵시록에 잘 반영되어 있고, A.D. 2세기의 그리스도교 문필가들은 도미띠아누스를 '제2의 네로'로 묘사했다.

이 당시 로마당국은 그리스도교인들의 범죄행위를 두 종류로 보았다. 첫째는 그리스도교인들의 공동체 설립이 로마의 결사금지법에 위반되고, 둘째는 저들은 하느님에 대한 신앙 때문에 국가 종교화한 형상숭배와 희생제의를 거부했다는 것이다.20)Jos., Bell., 7, 218; Dio Hist., LXV, 7, 21

또한 로마당국은 그리스도교인들의 추종자인 예수를 정치적 반란자로 취급했기 때문에 그 정치범을 신앙의 대상으로 삼고 있는 그리스도교인들을 불온한 집단으로 간주하고 매사에 경계심을 갖고 대처한 것은 자명하였다. 그뿐 아니라 그리스도교인들은 항상 임박한 세계의 종말에 관해 말하고, 로마의 완전한 멸망을 예언하였다.21)de Ste Croix, "Why were the Early Christians Persecuted", G. E. M. Journal of Past and Present, vol. 26, 1963, pp. 6~38/ 지동식 편역, 「기독교도 박해의 원인」, 『로마제국과 기독교』, 한국신학연구소, 1980, 135면. 로마가 세계이고, 로마의 멸망이 곧 세계의 멸망으로 인식되고 있던 당시에 '임박한 종말'과 '로마의 멸망'을 결부시켜 전파하는 것은 곧 반란죄에 해당하는 중대한 범죄행위였다. 이와 더불어 로마의 공개적인 종교정책22)로마당국은 로마에 판테온(Pantheon, 萬神殿)을 세움으로써 모든 신들을 수용하는 정책을 수행하였다. 그리고 사도행전 17장 23절에 보면, 아테네에 '알지 못하는 신에게'라고 씌어진 제단아 있었다는 언급은 당시의 로마당국의 공개적인 종교정책과 로마민들의 종교적 행태에 대한 한 단면을 보여준다.에도 불구하고 그리스도교인들의 '비밀의식'과 로마의 국가종교를 거부한 것은 로마당국자에게는 그리스도교인들의 범죄행위에 대한 확연한 증거로 인식되었다.

한편 도마띠아누스의 박해는 그의 정치적 견해와 맞물려 있었으므로 모든 행정력과 군사력을 동원한 양태로 발전하였다. 그리고 그리스도교뿐만 아니라 유다교, 전통적인 그리스 철학에 이르기까지 박해는 광범위하게 진행되었다.

 

(2) 민족운동의 붕괴―바리사이파의 타협주의와 그리스도교의 박해, 젤롯당의 붕괴

이같은 외압 앞에서 유다내의 동향은 이러했다. 예루살렘과 그곳에 있는 성전을 중심으로 로마권력을 등에 업고 지도권을 행사하던 계층 중에 사제계급은 자연 몰락되었고, 전쟁 통에 살아남은 잔류자 둘은 그들의 재래적인 습성대로 친로마적 행태로써 생존권을 유지하기에 급급했다. 그들 중에 바라사이파만은 그들의 순발력을 발휘하여 비정치적일 뿐 아니라 모든 면에서 로마와 타협할 것을 서약하는 대신 저들이 필생의 목적으로 진행하려던, 구약경전을 완성할 수 있도록 보장해준다는 것을 약속받았다. 그것이 바로 '얌니아(Jamnia) 학파'였다. 이것이 점차 없어진 '산헤드린'을 대신해서 행정과 사법권의 일부를 이양받았다.

로마로 이주한 유다 귀족들은 친로마적이고, 반젤롯당적인 입장을 취했으며,23)Suet., Tit., VII, 1; Dia LXVI, 18, 1. 바리사이파들을 중심으로 한 비(非)유다전쟁파들은 황제의 재가를 받아 황제령(皇帝領)인 얌니아에서 회당을 열고24)A.b.R. Nath, N, 6. 그 회당을 중심으로 한 새로운 유다교의 지도층으로 등장하였다.25)W. Foerster, Neutestamentliche Zeitgeschichte, Hamburg, 1968, S. 84. 한편 팔레스틴의 바리사이파 율법학자들은 황제의 재가를 받아내 두 드라크마의 '학교세'라는 것을 거두었고, 주피터 신전 건축을 위해 로마당국에 냈던 '신전세'를 거두는 데 앞장섰으며, 유다인 회당의 요원들이 그 자금 모금과 송금을 관장했다.26)Phil., Cai., 216; Jos., Ant., XVII, S. 311~313. 한마디로 저들은 로마의 대리인으로 행세하기에 이른다. 이에 반해서 젤롯당을 중심으로 한 하류계급들은 반로마 투쟁을 계속했다. 유다전쟁으로 몰살된 줄 알았던 이들은 2세기초 트라야누스 치하에서 다시 봉기할 때까지 수십 년 동안 묵시사상으로 무장하고 전의를 가다듬었다. 저들은 더 이상 활동할 수 없게 되자 에집트에서 반란을 계속 추진했고, 에집트에 도망갔던 자객들은 이곳에서 여러 차례 소요를 일으켰다. 그리고 요나단의 지휘 아래 키레네에서도 큰 반란이 일어났다.27)Jos., Bell., VII, 252~455.

한편 유다인들에게 제공되었던 성전영지라는 보호막이 철거됨과 동시에 유배 사회에서 밑바닥 상태에 있었던 대부분의 유다인들은 오직 생존을 위한 처절한 싸움판에 내던져졌다. 그리고 성전이 사라진 채 율법만이 남은 상황 속에서 이 율법의 해석도 기득권자들을 위해 이용되었으며, 따라서 이러한 민중적 상태에 빠진 유다 민족을 위해서는 좀더 현실적이며 좀더 근본적인 새로운 율법의 적용과 해석을 필요로 하던 시기였다.28)초대교회의 기록들을 통하여 볼 때, 회당을 출입하던 유다인들 중에 많은 사람 둘이 구약에 근거하여 '새로운 해석'을 주장하고 있는 그리스도교로 개종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조국을 잃은 유다인들 중 상당수가 그리스도교인으로 개종했다. 그것은 가물리엘 2세가 유다교 18개조 기도문에 유다계 그리스도인을 저주하는 항목을 넣게 한 데서 읽어낼 수 있다.29)Just., Dial., 16, 137. 속사도시대인 A.D. 67~100년에 그리스도교인들의 수는 거의 4배로 불어났다.30)Bo Reicke, op. cit., S. 225. A.D. 100년경 교회의 신자들과 동조자들의 총수가 32만 명이 넘었다는 계산도 있다.31)Bo Reicke, op. cit., S. 227. 소아시아와 그리스의 공업도시 들에서는 처음부터 많은 사노예(私奴隸)와 부두노동자, 공장노동자 둘이 복음을 받아들였고, 목회서신과 공동서신들은 여러 가지 점에서 이 프롤레타리아에 대한 관심을 반영하고 있다.32)Bo Reicke, op. cit., S. 229. 그러나 로마는 이 프롤레타리아와 시민계급의 조직을 원칙적으로 소요의 근원지로 파악하여 A.D. 55년에 리키니우스의 법률을 통해 그리고 후에는 황제의 명령을 통해 이런 종류의 새로운 '동업자조직'의 결성을 금지시켰는데,33)Phil., Flacc., 136f. 참고. 교회가 이 결사체와 관련이 있다는 협의를 받기에 이르렀다.34)Plin., Ep., X, 33~34.

 

(3) 구심점을 잃은 이스라엘민의 분산

유다전쟁은 모든 유다인들에게 종교적, 정신적으로나 사회경제적으로 결정적 전환기를 가져왔다. 종교적, 정신적으로는 예루살렘과 그 안에 있는 '성전'의 몰락은 민족의 구심체를 잃은 것이었다. 이것은 체제로서의 이스라엘 몰락을 의미하며 수천 년 동안 그들의 존재를 확인해주었던 거점의 상실을 의미한다. 이러한 이스라엘의 종교적, 정신적 몰락은 곧 정치적, 사회적인 이스라엘의 완전 해체를 의미하는 것이었다.

유다전쟁의 결과 원래 총독 관구였던 팔레스틴은 군안들과 퇴역장 병들을 위한 '로마 식민지'의 한 속주로 전락했다.35)Bo Reicke, op. cit., S. 198~199. 자기 땅에 남아 있던 유다인은 디아스포라 유다인과 똑같은 처지에 놓이게 되었다. 특별한 업적을 이루어 로마시민권을 획득한 극소수를 제외한 '모든 유다인들'은 로마제국내에서 국적을 상실한 '나그네'가 되었다.36)유다전쟁의 포로들은 로마의 승리를 자축하는 축제에 끌려나와 공개적으로 처형되었고, 성전의 기구들은 로마까지 운반되어 로마의 천민(賤民)들에게 공개되었으며, 전쟁배상금으로 모든 유다인 남자들은 해마다 두 드라크마를 주피터 신전의 재건을 위한 신전세로 내야만 했다(Jos., Bell., XV, 218; Dio., Hist., LXN, 7, 2).

이리하여 사회경제적으로 유다 민족은 모두 '민중적 위치'로 돌아 가게 되었고, 약육강식이 지배하는 팔레스틴 밖에서 법적으로 생명의 보장을 받지 못하는 '역사의 미아'로 살아가야만 했다. 이렇게 수백만에 달하는 대부분의 유다인들은 이주와 추방으로 인해 에집트, 키레네, 시리아, 아시리아, 헬라, 이탈리아의 상업도시로 몰리게 되었으며, 이들의 수는 로마제국의 전체 신민의 약 6~9퍼센트를 차지하였다.37)M. Simon, Verus Israel, 1964, p. 53. 저들은 모두 있을 곳 없는(homeless) 유랑 민중이 되었다. 이같은 현실을 마태오는 어떻게 인식했나?


List of Articles
바알 (열상 19, 18)
남은 칠천 명 (19, 7-18)
민중의 손으로 통일되는 날 (아모 9, 11-15)
겨울은 가고 (에제 37장)
에제키엘이 무등산에서 절규한다 (에제 24, 6-8)
포로에서의 탈출 (이사 66, 1-8)
위정자와의 대결 (이사 7, 10-14)
   
제5부 새로운 존재
일상성과 비일상성 (루가 10, 38-42)
그래도 다시 낙원에로 환원시키지 않았다 (창세 3, 1-10)
새로운 인간상 (창세 12, 1-9)
믿음의 조상 (창세 22, 17-18)
두 사이 에 손을 얹을 판결자 (욥기 9, 25-35)
하느님으로부터의 도피 (시편 139편)
하느님의 웃음 (시편 2편)
잠과 신앙 (시편 127편)
교회란 무엇인가 (로마 8, 9-30)
인간을 말한다 (마르 12, 28-34)
존재 근거 (시편 42편)
우주의 품으로 (시편 8,3 이하)
   
판권
표지
예수의 민중사건 : 『민중과 성서』를 내면서
   
제1부 복음서와 민중
   
예수와 민중 : 마르코복음을 중심으로
    1. 전제
    2. 마르코복음 안의 오클로스
    3. 마르코복음에 나타난 오클로스의 성격
        1) 오클로스의 성격
        2) 오클로스에 대한 예수의 행태
        3) 종합
    4. 예수를 따른 자들
    5. 마르코복음 안에 있는 어록
    6. 오클로스의 언어학적 의미
        1) 라오스와 오클로스
        2) 오클로스와 암 하 아레츠
    7. 종합
마르코복음에서 본 역사의 주체
    1. 전제
    2. 마르코의 삶의 자리
    3. 마르코의 민중신학의 기조
        1) 세례자 요한이 잡힌 후(14a절)
        2) 갈릴래아로 가다
        3) 하느님 나라의 도래 선포
    4. 민중의 행태
예수사건의 전승 모체
    1. 문제 제기
    2. 케리그마의 성격
        1) 고린토전서 15장 3~8절
        2) 필립비서 2장 6~11절
        3) 사도행전에 나타난 케리그마
    3. 민중언어의 성격
    4. 수난사
    5. 예수의 행태 일반
        1) 기적 이야기와 예수의 행태
        2) 아포프테그마와 예수의 행태
        3) 로기온(Logion, 어록)과 예수의 행태
    6. 결론
가난한 자 : 루가의 민중 이해
    1. 가난한 자
        1) 통계적 고찰
        2) 루가의 특수자료
        3) 예수의 탄생설화와 나자렛 선언
        4) 마르코와 Q자료
    2. 루가복음서의 청중
    3. 결론
마태오의 민중적 민족주의
    1. 문제 제기
        1) 마태오의 신학적 주제에 대한 논의들
        2) 문제 제기
    2. 마태오가 처한 현실
        1) 마태오와 그의 시기
        2) 민족적 와해 위기
    3. 마태오의 현실인식
        1) 이스라엘 : 길 잃은 양들
        2) 길 잃은 양이 놓여 있는 현실
    4. 민족동일성 재확립
        1) 뿌리 찾기
        2) 바리사이파가 주도하는 라삐 유다교와의 대결
    5. 마태오의 민중 이해
        1) 언어적 성격
        2) 의식화된 민중
    6. 맺는 말
민중신학의 성서적 근거 : 마르코복음을 중심으로
    1. 예수사건의 재발견
    2. 마르코복음과 민중
    3. 민중은 수단이 아니다
    4. 민중은 객체일 수 없다
    5. 십자가는 민중수난의 극치다
민중신학의 어제와 오늘
    1. 독재와 대항하므로
    2. 민중을 만나므로
    3. 민중과 더불어
   
제2부 민중운동사
   
민중사건과 언어사건
    1. 성서에서 본 말의 성격
        1) 그 말의 현장은 어떤 것이었나
        2) 예수의 경우
        3) 예수사건에 관한 전승
        4) 오순절의 말 사건
    2. 무엇으로 말하는 것인가
    3. 해야 할 말은 무엇인가
    4. 우리가 해야 할 말
미래는 가난한 자의 것 : 루가 6장 20~26절
    1. 축복과 저주
    2. 가난한 자와 부요한 자
    3. ‘지금’과 ‘장차’
    4. 우리의 선택
나라가 임하옵소서
    1. 예수의 기도
    2. 그의 기도를 전달받은 자들
    3. 하느님의 나라
고향 잃은 민중
    1. 피난민
    2. 성서에서 본 피난민문제
    3. 게르(GER) 문제 해결의 시도
    4. 이방인에 대한 관용의 한계
    5. 당면한 과제
        1 ) 새로운 인식을 위한 운동
        2) 실천에 대한 몇 가지 제언
이스라엘 민중사
    1. 머리말
    2. 출애굽
    3. 고대 이스라엘 종족동맹
    4. 민중을 배반하고 세워진 왕권
    5. 분단시대의 고난
    6. 민중운동의 여러 계열
    7. 예수의 민중운동
    8. 맺는 말
   
제3부 민중과 체제
   
민중사실의 증언
    1. 민중신학의 전제들
    2. 민중사실의 증언
고난과 고백
    1. 수난자와의 일치
    2. 마르코의 민중
    3. 수난사와 고난
    4. 더불어의 고난
    5. 맺는 말
갈릴래아 민중에 항복한 바울로
    1. 바울로의 위치
    2. 사울은 어떤 사람인가
    3. 그리스도교 박해
    4. 예수를 만남
    5. 전향
    6. 맺는 말
소명(召命)
    1. 바울로의 소명
    2. 사도 됨과 소명
    3. 이방인에게로
바울로와 역사의 예수 I
    1. 머리말
    2. 예수에 대한 바울로의 말
    3. 예수냐 바울로냐
    4. 왜 예수가 아니고 케리그마인가
선택받은 민중: 고린토전서 1장 26~31절
    1. 고린토교회 구성원의 사회계층
    2. 공동체원의 가치 판단 기준
    3. 민중을 보는 눈
    4. 택함을 받은 민중
   
제4부 예수의 희망
   
하늘도 땅도 공(公)이다
    1. 낙원 이야기
    2. 아담一인간
    3. 실락원은 공을 사유화함으로
갈릴래아에서 만나자: 마르코 16장 1~8절
    1. 제3의 자리
    2. 갈릴래아
    3. 갈릴래아에서 만나자
예수의 희망
    1. 새 세계에의 희망
    2. 희망과 세계혁명
    3. 바른 인간공동체의 희망
    4. 맺는 말
   
판권
표지
예수는 논하지 않았다
   
제1부 민중의 언어, 이야기
   
1. 성서라는 책의 성격
2. 성서의 서술양식
    1) 구약성서
    2) 신약성서
    3) 민중언어
   
제2부 예수의 이야기(비유)
   
1. 만성병에 걸린 세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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