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태오는 자기의 본향 팔레스틴을 떠나 이방땅에 거처하는 실향민의 공동체에 들어갔다. 마태오는 이러한 상황 속에서 자기 동족들에게 희망을 주고 용기를 주려는 염원과 그리스도교인을 포함한 동족들에게 예수가 참 메시아라는 사실을 알려주기 위해서 이 복음서를 쓴 것이다.47)그가 유다계 그리스도교인으로 유다 그리스도교인을 청중으로 하고 있다는 것은 대다수 연구자들의 공통된 인식이다(W. G. Kümmel, op. cit., S. 65~66 참조). 물론 이에 대해서 반론도 있다. 그러나 이 논문은 위의 결론을 정당한 것으로 전제하며 그것은 다음의 전개에서 입증될 것이다.
그의 시대는 이미 그리스도교가 폐쇄적 유다주의의 담장을 없애고 속속 세계로 진출하고 있을 뿐 아니라 이방인48)이방인으로 번역된 본 원문은 '민족들'(ἔθνη)로 되어 있다.이 오히려 열성적으로 그리스도교에 가담하고 있는 판국인데, 마태오는 자기 민족문제에 관심을 집중한 것이다. 이방땅에 사는 바울로가 자기의 사명은 이방인에게 그리스도교를 선교하는 데 있다는 사실을 분명히 하면서도 자기 동족의 구원문제를 잊어버리지 않는 것은 물론이고 그의 역사관마저도 이 민족문제와 연계시켜 해석했는데,49)로마 21장은 이상의 그의 입장을 전개시킨 것으로 유명하다. 마태오 역시 바울로와 마찬가지로 자기 민족의 구원을 염원할 뿐만 아니라 한걸음 더 나아가서 그것이 자기의 소명이라고 생각한 것이다.
이 사실은 이 글의 전개에서 더욱 분명해질 것인데, 그가 독자들에게 다른 민족들과는 구별되는 '이스라엘 민족'이라는 사실을 바로 독자들 자신이 분명히 의식하라는 듯이 서술한 예에서 먼저 살펴볼 수 있다. 마르코 13장 13절에 "내게 대한 충성 때문에 너희가 모든 사람에게서(ὓπο πάντον) 미움을 받을 것이다"라는 말을 그대로 전수하면서, '모든 사람'을, '모든 민족들로부터'(ὑπὀ πάντον των ἐθνων)로 수정함으로써(24, 9) 미움을 당하는 자들이 제자들을 포함한 바로 이스라엘 민족임을 분명히 하고 있다.50)E. Schweitzer op. cit., S. 294.
이러한 마태오의 입장은 이미 많이 논의되었으므로 정설로 전제하고, 여기서는 그가 특히 '이스라엘'이라는 단어를 의도적으로 사용하는 것에 주목하려고 한다.
마태오는 물론 로마로 인해서 그 민족이 도탄에 빠진 것을 잘 알고 있다. 그러나 마태오는 정치적으로나 군사적으로 반(反)로마운동을 펴려는 자세는 보이지 않는다. 이미 젤롯당이 군사, 정치적으로 철저히 저항했으나 그들의 전략적 과오는 민족의 황폐를 가져왔다. 예수의 민중 전체가 그랬듯이 마태오 공동체도 젤롯당운동에 가담하지 않았고, 그것을 묵살할 뿐만 아니라 예수와 더불어 처형된 두 사람을 강도(λησταίς)라는 말을 붙임으로써 저들에 대한 부정적 입장을 재확인시키고 있으며, 루가는 그들의 적극적인 면을 평가하려고 했으나 마태오에는 그런 흔적도 없다.51)십자가에 함께 처형된 자들이 젤롯당이었으리라는 일반론을 수용할 때, 그들에 대한 복음서 기자들의 평가가 젤롯당에 대한 그들의 입장을 보여준다. 오히려 마태오는 '저항'보다 '난(亂)을 피하도록' 권고한다.52)마태오 10장 16~23절에 당시의 정치적 박해 상황과 이에 대한 수동적 대처 자세를 반영하고 있다. 산상수훈 안에 있는 보복금지의 항목에서 "5리를 가자면 10리를 가라"고 한 마태오의 첨가구(5, 41)가 이를 잘 반영하고 있다.
그러나 이러한 수동적 자세는 로마와 타협하고 평화공존을 도모하는 입장은 아니다. 10장 16~23절에서 로마제국의 탄압을 전제하고 피해다닐 것을 권고하나 결론으로는 "피하면서 도시들을 다 돌기 전에 인자가 올 것"이라고 한다. 이것은 물론 로마를 일차적으로 염두에 둔 심판을 말한다. 그리고 더 나아가 생각한다면 마태오 고유의 전승자료인 곡식과 가라지의 비유(13, 24~30)도 우회적으로 대(對) 로마 의지를 포함시켰을 수도 있으며 "거룩한 것은 개들에게 주지 말고 진주를 돼지들에게 던지지 마라"(7, 6a)라는 구절은 마태오만 전승하는 것으로 논란을 일으키는 말이다. '개 '나 '돼지'는 이방인 일반을 상징하는 말이지만 로마시대에는 로마인들을 지칭하는 것이 유다인의 인식이었다. 마태오는 이 말로 반(反)로마 감정을 드러내고 있다고 본다.53)스트르 빌(Str-Bill, Kommentar Zum Neuen Testament, 1926, S. 448ff), 루츠(U. Luz, op. cit., S. 381f), 슈바이처(E. Schweitzer, op. cit., S. 108f), 그룬트만(W. Grundmann, Das Evang. nach Mt. Th. H., 1986, S. 221f) 등은 개나 돼지가 이방인 특히 로마를 상징한 것으로 인정하나 루츠는 이 본문이 누구를 지칭한 것인지의 결론을 유보하고, 그룬트만은 28장 19절의 이방인 선교 지시를 들어서 이방인 지칭이 아닐 것이라고 하나 그는 마태오 시대 구분을 간과한 것이며 슈바이처는 이것을 성만찬 참여대상의 한계를 그었다는 Did, 9장 5절에 기울었다(루츠는 이에 반대).
타협거부의 이 입장은 바로 바리사이파와의 대결에서 그 면모가 드러나는데, 그 대결 이유는 일차적으로 유다전쟁이 일어난 후에 저들이 로마에 대한 자세를 탈바꿈한 데 있다. 이것은 다음 장에서 재론될 것이다. 그러면 마태오의 적극적 작업은 무엇이었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