계속 질문을 받는 문제에 대해 언급하겠다. 그것은 '도대체 민중이 무엇이냐?' 하는 것이다. 그러나 나는 이 대답에 직접 응할 흥미가 없다. 까닭은 그것이 민중의 정체를 흐리게 할 뿐 아니라 나아가서는 그렇게 해서 만들어진 개념이 실체로서의 민중을 가둬버리는 게토 역할을 하기 쉽기 때문이다.
어떤 것을 개념화하려는 것은 지식인의 버릇으로서 왕왕 지적 유희에 빠지게 한다. 그 대신 다른 측면에서'이 안에서 찾아보시오'라고 할 수 있는 울타리를 그어볼 수는 있다. 나는 '마르코복음에서 민중을 찾아보시오' 하고 싶다. 나는 전에 마르코의 오클로스를 일일이 찾아서 그 성격을 표출해보려고 했다. 그런데 그 다음 단계에서는 마르코가 전한 예수라는 사건 전체에서 민중의 상을 찾아야 한다는 결론을 얻을 수 있었다. 즉 예수와 오클로스를 주객으로 구별하지 말고 그것을 통째로 더불어 사는 그 관계에서 민중을 찾아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면 '갈릴래아의 민중과 예루살렘의 민중 중 어느 것이 민중이냐?' '예수도 민중이냐?' 하는 따위의 질문은 무의미하다.
마르코복음에 서술된 전기적 요소는 그의 이력서가 아니라 사회전기(social biography)이다. 따라서 마르코복음에 등장하는 예수는 서구에서 발달한 개인(Individium), 인격 등에서 말하는 유아독존적 개체가 아니라 집단성(korporativ, kolkertiv)을 지닌 명사이다. 그러므로 그의 생에서 민중을 떼어놓고 보면 그의 참모습을 알 수 없으며, 반대로 그 민중을 예수와 메어놓고 관찰해도 민중의 참모습을 알 수 없다. 그것만이 아니다. 예수와 민중이 대결하는 그 관계까지도 우리의 관찰에서 제외될 수 없다. 왜냐하면 그 대립관계에도 민중성이 드러나기 때문이다. 통틀어서 그 모든 것이 민중의 장이다. 바로 그렇기 때문에 민중에 대해 고정화되는 개념정립을 거부하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