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에서 언급한 것들의 구체적 예로서 예수의 수난사를 일부러 구별해서 민중신학의 입장에서 암중모색한 한두 가지를 말하겠다.
예수의 수난사는 한 개인의 수난이나 한 개인의 비극이 아니라 민중의 애환을 극적으로 표상한 것이다. 우리는 마르코의 수난사를 읽으면 놀랄 것이다. 이유는 그 안에 어떤 종교적 초월현상도 완전히 결여되어 있기 때문이다. 그 안에서 판을 치는 것은 오직 비리와 물리적 힘이다. 게쎄마니의 장면에서 억지 재판을 거쳐 십자가에 처형 되는 과정에서 나타나는 것은 배신, 배반 그리고 음모, 위증, 야합, 처형이 있을 뿐 예수의 십자가처형을 구경하는 유산론자나 어쩌면 도망친 제자들도 기대했음직한 신의 개입 따위는 전혀 일어나지 않았다. 그렇다고 그것은 희랍문학에 나오는 한 비극적 영웅의 최후로 서술되지도 않는다. 그저 힘 앞에 꼼짝못하고 다소곳이 죽어가되, 오직 하느님만 찾다 죽어간다. 이것이 한 개인, 한 유다 청년의 고유한 우발적 비극인가? 그렇다면 우리와 무슨상관이 있으랴!
아니, 복음서 편자는 그것을 이사야의 수난의 종의 표상으로 해석한다. 그런데 이사야서에 나오는 그 수난의 종은 개인이 아니라 집단 개념이다. 그뿐 아니라 '하느님의 아들', '인자'등 메시아적 칭호도 집단개념인 것이다. 바울로가 아담―그리스도 유형론을 말했는데 근본적으로 그러한 상황에 있는 집단은 역사를 통해 계속 있기 때문에, 그의 죽음은 바로 그런 집단이 당하는 현장에서 현재적 사건으로 살아 우리를 사로잡는 것이다.
이렇게 무능한 죽음, 그 민중의 죽음은 무엇을 의미하나? 아무 저항도 없이 손에 바늘, 돌 하나 갖지 않은 예수, 그가 로마패권을 한 손에 쥔 빌라도 법정에서 초라하게 당하기만 하는 마당에 빌라도가 "네가 유다인의 왕이냐?" 하고 물으니까 침묵을 계속하던 예수는 당당하게 "네 말대로다"라고 대답한다. 그런데 무력한 게 무슨 왕이냐?
아니, 그렇다! 그는 왕이다. '왕'이란 현대적 개념으로 하면 역사를 이끌어가는 주인, 즉 '민중'이라고 번역하면 된다. 그는 '칼은 칼로'의 악순환에 제 목숨을 내댐으로써 단(斷)하는 의미에서 왕인 것이다.
어떤 사람은 악의에서 민중신학은 극동신학이라느니 운운했다는 데 그것은 무지의 소치에서 나오는 것이다. 분명히 말할 수 있는 것은 민중신학은, '눈은 눈으로', '복수가 복수를', '되는 되로'라는 악순환 속에서 고래 싸움에 새우처럼 수난만 당한 민중이 더 이상 그런 도가니 속에서 희생물이 되기 싫어 몸을 내대어 그 악순환을 단(斷) 한 것이 예수의 길, 민중의 길이라고 확신한다는 것이다.
'그 한 일이 옳다!' '이들이 새 역사의 주인이다! "이들이 이겼다!'고 하느님이 저들의 오른손을 번쩍 치켜든 사건이 부활사건이다. 이 사건은 바로 예루살렘이 아니라 갈릴래아에서 일어났다는 것이 민중의 서(書), 마르코복음의 민중ᆞ사회전기의 결론이다.
■ 『교회와 세계』 제3호, 1989년 9~10월호에 수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