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나는 민중신학을 이야기할 때 맨 처음에 꼭 이렇게 시작을 합니다. "민중신학은 서재에서 나온 사변이 아니고, 한국의 정치현장에서 형성된 역사적인 산물이요 신학적인 귀결이다. 구체적으로 군사 정권이 수립된 이래 그들의 탄압 밑에서 그 정체를 드러낸 민중과의 만남과 그들의 고난에 어떠한 형태로든 참여한 결과 민중신학을 낳았다"고 말입니다. 오늘도 역시 이 말을 먼저 전제해야겠습니다.
2. 신학하는 일부 사람들이 군사정권을 통해서 구조악에 대한 인식에 도달했습니다. 정치적인 측면에서 대체로 자유주의자였던 저들이 날로 조여드는 이 구조악을 몸으로 경험하게 되었습니다. 이에 저항하기 위해서 저들은 한동안 재래신학의 틀에서 찾아낸 주제들인 '인권' 혹은 '자유'라는 시각에서 거기에 저항해보려고 했는데, 그것은 아무런 효력이 없었습니다. 이 저항과정에서 이른바 성서에서 말하는 '사탄' 혹은 '악마'라고 하는 것이 다른 것이 아니고 바로 권력적인 구조악이라는 것을 인식하게 되었습니다. 이 과정에서 민중을 만나게 된 것이지요. 그런데 민중을 만나서 비로소 민중이야말로 이 구조악에 철저히 수탈당하고 억압당하면서도 죽지 않을 뿐 아니라, 이 역사의 맥을 이어가는 담지자임을 체험하게 되었습니다. 저들이야말로 생명의 원천이고, 역사의 주체임을 인식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3. 그들과의 만남은 커다란 사건인데, 이 사건은 신학자들을 재래적인 신학에서 해방시키는 연쇄적인 사건으로 이어졌습니다. 이 사건들에서 충격을 받아 저 자신은 일찍이 '기독교의 탈서구화'라는 것으로 그 뜻을 발표했습니다. 그 뒤 민중신학을 본격화하는 과정에서 서남동 교수가 '반(反)신학'(anti-theology)이라는 극단적인 표현을 썼습니다. 신학을 하면서 반(反)신학이라는 모순된 언어를 쓴 것이지요. 그러나 한편에서는 이미 재래신학의 주제들에 흥미를 잃고 비신학적인 것에 관심을 가져 전통신학에서 보면 주변적인 주제들에 대해 관심을 기울인 이들이 있었습니다. 현영학 교수와 문동환 교수 등이 그 범주에 들 수 있을 것입니다.
4. 1970년대부터 1980년대초까지 서구 신학 내지 신학에서의 탈출(exodus)과정은 연속해서 일어나는 민중사건에 참여하는 것과 병행했습니다. 인혁당사건, YH사건, YMCA 결혼식 위장사건 등등이 일어날 때마다 많은 이들이 체포, 투옥되었고 그 가족들의 저항은 고난으로 점철되었습니다. 이런 민중의 수난에 직간접으로 참여함으로써 마침내 대학에서 한 차례 혹은 두 차례씩 쫓겨나고 혹은 감옥에 갇히고 하는 동안에 거리에서, 감옥에서 다른 얼굴의 민중을 만남으로써 신학의 엑소더스 행각은 가속화될 수 있었습니다.
이러한 신학에서의 엑소더스 과정에서 해석학적 혁명이 일어났는데―저는 혁명이라고 봅니다―이것을 대변하면 다음 몇 가지로 초점을 맞춤 수 있을 것입니다. 아래에 언급하려고 하는 것은 연쇄적으로 일어난 것이기 때문에 상호 깊은 관련이 있습니다. 그래서 비록 제목을 달리하더라도 그 내용에서는 중첩되는 것도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