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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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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민중을 만나므로

민중을 만나면서 민중신학이 체험한 것은 디음과 같이 정리할 수 있습니다.

5. 첫째로, 가장 중요한 사건이라고 할 수 있는 것은 시각의 전도입니다. 모든 사물을 위에서부터 아래로 보는 도식에 철저했던 재래 신학적 시각에서 벗어나 모든 사물을 아래로부터 보게 되었습니다. 곧 '신으로부터 인간을'이 아니라 '인간으로부터 신을', '인간에서부터 민중'이 아니라 '민중에서부터 인간', '계시도 하늘에서 오는 것이 아니라 아래, 수난의 현장에서 온다' 등등입니다. 이것은 특별히 제2차세계대전 이후에 형성된 칼 바르트(K. Barth)를 중심으로 한 위기신학 등등에서 본 것과는 정반대입니다. 이것은 성서 자체에서도 역시 '격상된 예수에게서 민중에게로'가 아니라 '그를 둘러싼 민중으로부터 예수를' 조명하는 것이었습니다. 성서를 볼 때에도 지배체제나 특히 다윗왕조 이래로 군림하는 왕조체제로부터 가난하고 눌린 사람들을 보는 것이 아니라, 그 밑에서 절규하고 신음하고 저항하는 민중의 시각에서 왕권을 보는 등등도 모두가 그런 시각의 소산입니다.

이런 시각은 기존의 가치관을 완전히 전도시킴으로써 주변적이었던 것이 중심적인 것으로 탈바꿈되는 무수한 사건들을 연속적으로 일으켰습니다. 가령 예수를 귀족화왕족화하고(예수를 다윗의 자손이라든가 하는) 나아가서 신격화하는 요소들이 그리스도 신학의 중심 관심사였지만, 바로 그런 것들은 낡은 가치관의 산물이고 본래의 예수에 있어서는 그의 천한 신분, 무명성, 한마디로 하면 민중성 이 그의 본질을 이루고 있음을 인식했습니다. 뿐만 아니라 거룩함, 신성함 따위가 높은데, 깨끗한데, 고귀한데 있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저 밑바닥에서 학대받고 천시당하는 현장, 이른바 죄인이나 창기나 사회적으로 매장당한 세리 같은 이들의 행태 속에 있다는 것을 발견했습니다. 즉 교회, 성전 같은 종교적으로 구별된 장소가 아니라 인신매매가 성행하고 매음을 하고 사생아를 낳고 아귀다툼을 벌이고 있는 그런 장소가 거룩함의 산실이라는 인식에 도달하게 되었습니다. 진실은 참 아래, 음지, 주변으로 가면 갈수록 밝혀진다는 확신을 갖게 됨으로써 그런 데서 신학의 주제를 찾기에 이른 것입니다. 이것이 민중신학의 하나의 중요한 측면입니다.

6. 둘째로, 모든 사물의 사건성을 중요시하기에 이르렀습니다. 서구 신학에서는 "태초에 말씀이 있었다"라는 데서 신학의 거점을 찾아내어 '로고스 신학' 또는 '말씀의 신학'이라고 신학의 본질성을 표명하고, 복음서 연구에서도 예수의 말씀에만 비중을 두고 마침내 성서 전체를 말로 선포한 것, 즉 케리그마가 그 중심이라고 보고 있습니다. 그러나 민중을 만남으로써 그 사건성을 체험한 민중신학자들은 "태초에 사건이 있었다"로 로고스 신학에 대항하게 되었습니다.

사건은 행동하는 자들이 맞부딪치게 됨으로써 생기는 결과입니다. 삶은 움직이는 것이고, 그것은 사건이 점철시키는 현실을 말하는 것입니다. 이 사건은 운동과 직결되어 있습니다. 이 사건을 경험한 사람들은 그것을 서술할 때 경험한 내용을 '이야기' 합니다. 그러므로 이 이야기는 사건과 직결된 것으로서 삶을 수식 없이 직접, 가장 생생하게 나타내는 민중언어입니다.

이것은 사변에서 나온 로고스(logos)와는 다른 것입니다. 삶이 뒷받침되지 않는 말은 죽은 말입니다. 삶은 언제나 말보다 앞서며, 거기에 진실이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역사의 예수의 삶을 추구하는 대신에 역사의 예수를 사변화한 케리그마로 그의 삶을 은폐하려는 신학을 전면 거부하고 케리그마가 있기 전의 예수로 돌아가려는 부단한 노력을 해왔습니다. 그러나 이른바 역사학자들의 고고학적인 노력 혹은 복고적인 작업은 역사의 예수의 사건성을 박제화해버리는 것이 됩니다. 그러므로 그런 길을 가는 것은 물론 아닙니다.

역사의 예수를 파악하는 길은 그를 사변의 대상으로 함으로써가 아니라, 그의 삶에 참여함으로써만 가능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론이냐, 실천이냐?'라는 물음 앞에서, 언제나 실천이 앞설 때만 바른 이해와 해석아 가능하다고 확신하게 된 것입니다. 바울로를 연구하려는 경우에도 그의 그리스도론이나 그의 신학적인 이론에만 집착해서는 그를 알 수 없고, 언제나 그의 삶을 전제할 때만 바른 이해에 도달할 수 있을 것이라고 보았습니다. 그는 자신의 고백에서 감옥에도 여러 번 갔고, 관권에 의해 태장형을 여러 차례 받고, 무수히 박해를 당했고, 마침내는 로마세력에 의해 체포되어 로마에까지 압송되었고, 그 다음에는 전설에 의하면 그곳에서 처형된 것으로 되어 있는데, 이런 그를 전제로 할 때에만 그의 편지를 바르게 이해할 수 있습니다. 또 그러한 바울로의 실천을 전제하면서 읽을 때에만 바른 인식에 도달할 것이라고 보는 것입니다.

7. 셋째로, 주객도식의 극복입니다. 서구 신학은 '신과 인간', 혹은 '인간과 자연', 혹은 '자연과 역사', '나와 너', '남자와 여자' 등으로 철저히 이분하고 사람마저도 '영과 육'으로 구분하고 이 둘을 연결시키기 위해서 애를 쓰기는 했지만 한 번도 그것을 이룬 적은 없습니다. 분화된 둘의 관계를 연결시키려고 애를 쓴 대표적인 인물로 마틴 부버나 혹은 에밀 부르너나 불트만 같은 사람을 들 수 있습니다.

마틴 부버의 유명한 책 『나와 너』를 보면, 너와 내가 대등한 파트너가 되어야 할 텐데 주객도식에 의해 나는 주체가 되고 너는 객체가 되어서, 다우(너)가 이스(주물화)가 되는 문제를 한탄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저에게는 고민의 노출이라고밖에는 보이지 않습니다. 불트만 같은 사람도 하느님과 인간의 관계를 문제삼으면서 '하느님을 모르고 인간을 알 수 없다', 또 '인간을 모르고 하느님을 알 수 없다'라는 전제를 안고, 사람을 추구하려니 하느님을 모르니까 추구할 수가 없고, 하느님을 추구하려니 사람을 모르니 불가능하므로 결국 신을 이야기할 수가 없다는 결론에 빠지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이런 현상은 신을 시혜자 혹은 창조자로 보고 인간은 은총으로 산다거나 혹은 피조물로 보는 사고틀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피할 수 없었던 결과입니다. 이런 도그마에서부터 절대적인 신의 은총에 의해서 특별한 권력을 받을 수 있다는 생각이 유도되어서 결국 독재자의 인정이 가능하게 했습니다. 그러니까 특권자로 하여금 자신을 인정 해주는 뿌리를 종교에서 찾게 하는 결과를 가져왔습니다. 아무리 공정해도 평등하지 않고, 주체와 객체라는 중심과 주변으로 나누어지고, 그럼으로써 그 관계를 종속화시키는 결과를 가져왔습니다. 이러한 사고가 집단생활에도 그대로 적용되었고, 그것을 가장 잘 이용하여 형성된 것이 '국가'라는 것입니다. 고대에는 '국가'라는 말이 '왕'과 동의어로 사용되었습니다. 왕은 권력의 모체로서 아랫사람에게 적당히 권력을 분배할 수도 있고, 회수할 수도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이러한 사고는 국가가 유지되고 있을 때 계속되어왔는데, 이것이 교회에까지 침두되어서 사제계급과 평신도의 관계가 이렇게 되어버리고 말았습니다. 그러나 민중사건에서 어떤 계시와 같은 것이 있었습니다. 그것은 '나 없이 너 없고, 너 없이 나 없다. 따라서 실재 있는 것은 나, 너가 아니고 우리뿐이다'라는 것입니다.

한국 말에도 '우리'라는 말이 있는데, 이것은 단수가 모여서 복수가 되는 영어의 'We'와는 다릅니다. '우리'라는 말의 본뜻은 '울타리'(소 우리, 돼지 우리 할 때 그 '우리')인데, '우리'는 숙명적인 공동체, 한울타리 속에 있는 공동체를 말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가족 제도에서 연유된 것이기는 하지만 그 의미는 매우 깊습니다. 비록 개인주의가 발달했지만 지금도 한국 사람은 '우리 집' '우리 아이'라고 하지, '내 아이' '내 집' 하는 사람은 흔치 않습니다. 외국 사람들은 언제나 '내 집' '내 아이' 합니다. 더구나 '내 남편' '내 아내'라고 하는 것은 한국 사람에게는 대단히 쑥스럽습니다. 서양 사람들은 주저없이 '내 남편' '내 아내' 하면서 내 소유물이라는 뜻을 표시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적어도 내게 예속된 종속관계의 언어로 쓰려고 하지 않습니다. '우리'는 참 귀중한 말입니다. 예속관계가 아닌 상관 관계이어야 너와 나의 관계는 옳은 관계로 성립될 수 있습니다.

민중은 지배층의 정책에 물들어서 평소에 이기적이고 탐욕스런 존재로 보여도 수난의 현장 또는 투쟁의 전선에서는 '나와 너'라거나 잘난 놈, 못난 놈이 없고 단지 '우리'만이 있습니다. '우리' 안에는 주역이 따로 있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창조하고 우리가 함께 투쟁하고 노동하고, 우리가 함께 싸우고 세상을 만들어가는 곳이다' 하는 신념으로 차 있는 것을 봅니다. 여기서는 영웅주의 따위가 삽시간에 자취를 감춥니다. 평소에 그렇게 무서워하던 특권층이나 군림하는 관권, 관리에 대해서 일말의 공포도 없는 것을 봅니다. 우리는 '우리' 안에서만 참 해방운동을 경험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우리는 앞서 인간사회를 계급적으로 보는 것은 바로 주객도식을 깨는 데에 적절한 전략이라는 것도 배웠습니다.

성서에는 원래 '나', '너'라는 개체는 모르고 '우리'만이 있습니다. '아담'은 고유명사가 아닙니다. '사람'이라는 뜻이지요. 그것은 동시에 '흙'이라는 어원을 가졌기 때문에 자연과도 주객도식으로 비끄러맬 수는 없습니다. 단지 서구인들만이 주객도식으로 해석해왔을 뿐입니다. 하느님도 '우리'와 같은 형상으로 아담을, 즉 사람을 창조했습니다. 성서는 하느님의 사람 창조의 결의를 '우리와 같은 형상으로 아담을 만들자'라고 표현합니다. 그 하느님도 '우리'입니다. '나'가 아니라 '우리'입니다. 여기에 개인적독점적인 사고는 없습니다.

구약은 왕조사가들에 의해서 편집되는 과정에서 주종관계적인 서술이 많이 도입되었으나, 원래 모습인 민중전승으로서의 구약의 이야기가 그런 것이었으리라고는 생각할 수 없습니다. 유일신사상도 절대자의 사상도 고정된 것이 아닙니다. 하느님은 사람의 탈을 쓰고 세상을 배회하기도 하고, 얍복 강에서 야곱과 씨름하다가 항복하고 손을 드는 그런 모습도 보여줍니다. 이미 창조설화에서 '나' 아닌 '우리'라는 말을 썼듯이, 아브라함의 하느님, 이사악의 하느님, 야곱의 하느님이듯이 그 이름도 야훼, 엘, 엘로힘 등 여러 가지 이름으로 불렸습니다. 그게 그렇게 문제되지 않았습니다. 그의 얼굴은 천차만별이며 절대권력으로 군림하는 면도 있으나 한계존재인 사람과 똑같이 질투하고 분노하고 복수하고 자기 편이 되어주면 즐거워하는 그런 얼굴이 있는가 하면, 우리나라의 도깨비처럼 장난기가 다분히 섞인 그런 얼굴도 보입니다.

구약의 야훼 하느님은 태초에 바벨 여인에게 임신을 시키는가 하면 소돔, 고모라를 탈출할 때 나오다가 뒤를 돌아다보았다고 사람을 소금기둥으로 만들어버린 것 등은 장난기가 섞인 우리의 도깨비와 비슷합니다. 삼손에게 힘을 주어서 초인적인 능력자로 삼았다가 한 여자에게 맥없이 유혹당해서 머리카락을 잘리고 눈알을 뽑히게 하고 맷돌을 돌리게 하는가 하면 갑자기 그의 소원을 들어주어서 불레셋의 주동세력이 모인 신전의 기둥을 무너뜨리는 힘을 주어서 한꺼번에 3천여 명을 죽여버렸다는 것은 장난꾼 도깨비 같은 짓입니다. 크게 말하면, 신도 우리 안에 있으며, 자연과 신이 혼연일체가 되어서 세계를 창조하고 역사를 만들어나가는 그런 세계가 구약의 세계입니다.

구약의 왕조사가들은 유일신을 고집하고, 신을 고립시켜서 절대화하고, 그와 다른 말을 하면 범신론으로 매도하기도 하고, 자연과 역사 일반과 신을 완전히 격리시키고, 신을 절대위치에 정착시키는 듯하지만 실제로는 그를 피안에 추방시키고, 그 이름을 빼앗아 민족을 억압하는 군주제도를 만들었습니다. 그후 식민지시대에는 기독교를 식민지화하는 데 선발대로 파견하였고, 기독교의 교리에서 주객도식을 점점 강화해서 자기들을 주격으로 삼고, 식민지 백성들은 구경하고 떡이나 먹으라는 객체로 만드는 데 이용해왔습니다. 신학이 이런 것들을 뒷받침해왔습니다.

그 증거로 가장 두드러진 것은 민중의 삶인 우리의 민중문화와 그 뿌리를 사정없이 절단, 파괴하려는 시도들이 그것이었습니다. 예수도 그와 마찬가지의 과정을 거쳐 그 모습을 둔갑시켰습니다. 그를 신격화하고 예배의 대상으로 하면 할수록 인간과 자연과도 격리되고 마침내 비역사적인 존재로 무능해지도록 고립시킨 것입니다. 그리고 바로 그 대신에 그 자리에 종교의 귀족계급인 사제계급이 들어와 앉았던 것입니다. 그들은 도스토예프스키의 대심판관처럼 예수를 사실상 완전히 추방하고 자기의 독자적인 왕국을 만들어버린 것이었습니다. 예수 없는 그리스도교를 만들었습니다.

예수는 갈릴래아에서 그의 공생애를 시작하자마자 민중(오클로스)에게 둘러싸여서 그들에게 거의 피동적으로 움직인 것이 그의 짧은 생애의 모습이지 군림하는 생과는 너무도 거리가 멉니다. 그의 생애에서 중요한 것으로 서술된 많은 양을 차지한 병 고치는 이야기, 즉 치유하는 이야기를 보면 놀랄 것입니다. 그것은 결코 예수가 초능력자로 군림하거나 시혜자로서 군림하는 것이 아니라 아래로부터 올라오는 혹은 옆에서부터, 민중에게서 나오는, 민중과 만남으로써 스파크가 일어나듯이 일어나는 사건이 바로 치유사건입니다. 그가 능동적으로 계획성을 가지고 일으킨 것이 아닙니다.

그는 단 한 번도 이른바 그리스도론적인 신앙을 요구한 적도 없고, 어떤 윤리적 또는 종교적 조건을 내세운 일도 없습니다. 오히려 특이한 사건이 일어났을 때, 병이 나았을 때 "네 믿음이 너를 낫게 하였다" "네가 너를 낫게 하였다"라는 언어를 씁니다. 이 믿음은 그리스도론적인 믿음이 아닙니다. '내 믿음이 너를 낫게 하였다', '내가 너를 낫게 하였다'는 것이 아닙니다. 이것이 예수의 진실한 인식이라고 저는 봅니다.

수난사화에서 나타난 그의 모습은 어떤 쪽에서 보든지 어떤 초인의 말로가 아닙니다. 가장 밑바닥에서 권력자들에게 희롱당하고 피살당히는 그런 모습을 재현했을 따름입니다. 그는 홀로 수난을 이겨 나갈 수 없는 듯이 그를 추종하는 민중에게 그의 싸움을 지원해달라고 간청합니다. 이러한 시각들이 모두 민중에 의해서, 민중과의 만남 속에서 터득된 것입니다.

8. 넷째로, 이원론의 극복이 가능하였습니다. 이것은 앞서 말한 주객도식의 극복과 연결되는 것이므로 뛰어넘겠습니다.

9. 다섯째로, 집단성의 재확인입니다. 이것도 위에서 서술한 것과 연관성이 있습니다. 사물의 사건성이나, '우리'의 재확인이나, 이원론을 극복함으로써 총체로의 회귀나 모두 다 집단성과 관련되며, 맥을 같이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집단성을 특히 인식하고 강조하는 데는 개인주의 또는 개인주의적인 이기주의의 극복에 역점을 두고 있는 일면, 집단성과 운동성이 깊은 관계가 있다는 것을 인식함으로써 그 의미가 재확인되었던 것입니다.

민중이라는 것은 물론 집단개념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김용복이 '민중의 사회전기'라는 개념을 사용한 것은 적절합니다. 그런데 그것은 정태적인 개념이 아니라 동태적인 것입니다. 동태적이라는 것은 그 행태의 방어성과 투쟁성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민중은 편파적입니다. 따라서 편파적인 눈으로 볼 때만 민중이 보입니다. 우리 편에 대해서는 무조건 관대하고 포용적입니다. 그러나 적대자에 대해서는 투쟁적입니다. 방목하는 소는 밤에 잘 때는 집단으로 모여서 자는데 머리의 뿔을 밖으로 향하고 뺑 돌려 자고, 말은 반대로 머리를 가운데로 하고 발을 바깥으로 하고 잔다고 합니다. 유사시에 적이 오면 말은 뒷발로 차기 위해서이고, 소는 유사시에 뿔로 막기 위해서 적극적인 자세를 취하고 있는 것으로 보입니다. 이것은 그 자체가 동적인 것입니다. 민중이 그렇다는 말입니다. 이런 면을 민중운동에서 보았습니다.

편파적이라는 것은 바로 전략적인 것입니다. 이것은 바로 생존경쟁의 자세이기도 합니다. 이 집단성은 무명성과도 깊은 관련이 있습니다. 주객도식에서는 유명성이 큰 작용을 하지만, 무명성은 집단의 공동체의 견고성에 큰 작용을 합니다. 편파적인 것은 이전의 당파성과는 다릅니다. 그것은 이해관계에 얽힌 상부층의 이기적인 집단행동인데, 이에 대해서 민중은 생존권 보호의 발판이 된 집단성을 지니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것은 사회학적인 개념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역사적인 전승성을 지니고 있습니다. 그것은 한 세대에 그치는 것이 아니고, 한 경우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역사적으로 맥을 이어서 계승됩니다. 계속되는 민중사건이 폭발할 적마다 맥이 이어져 내려옵니다. 화산맥이 지하에 흐르다가 갑자기 '팡' 터지고, '팡' 터지고 하듯이 민중의 맥이 이어져오다가 '팡, 팡' 터지는 것입니다. 예수도 그런 의미에서 역사적으로 보면 화산맥의 한 활화산으로 터졌다는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닙니다. 그러나 우리는 그의 이전에 폭발된 분화구를 알지 못합니다. 그래서 그의 사건을 기준으로 그의 맥은 계속되어서 오늘에 이어집니다. 비록 그의 이름은 부르지 않더라도 민중운동 속에서 그것이 터져나오는 것을 봅니다. 우리는 그들을 보면서 현존하는 그리스도를 고백해왔습니다.

성서에서 말하는 "아브라함과 이사악과 야곱의 하느님"이라는 것은 바로 이 집단성의 역사적 계승의 맥을 나타낸 것입니다. 그들을 뿌리로 한 이스라엘이 선택된 백성이라는 것은 역시 편파적인 신성을 나타낸 것입니다. 예수도 예루살렘과 대립하는 갈릴래아, 그중에서도 민중을 편파적으로 사랑하고 그들과 제휴합니다. 이 편파성은 바로 투쟁성을 나타내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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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알 (열상 19, 18)
남은 칠천 명 (19, 7-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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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5부 새로운 존재
일상성과 비일상성 (루가 10, 38-42)
그래도 다시 낙원에로 환원시키지 않았다 (창세 3, 1-10)
새로운 인간상 (창세 12, 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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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과 신앙 (시편 127편)
교회란 무엇인가 (로마 8, 9-30)
인간을 말한다 (마르 12, 28-34)
존재 근거 (시편 42편)
우주의 품으로 (시편 8,3 이하)
   
판권
표지
예수의 민중사건 : 『민중과 성서』를 내면서
   
제1부 복음서와 민중
   
예수와 민중 : 마르코복음을 중심으로
    1. 전제
    2. 마르코복음 안의 오클로스
    3. 마르코복음에 나타난 오클로스의 성격
        1) 오클로스의 성격
        2) 오클로스에 대한 예수의 행태
        3) 종합
    4. 예수를 따른 자들
    5. 마르코복음 안에 있는 어록
    6. 오클로스의 언어학적 의미
        1) 라오스와 오클로스
        2) 오클로스와 암 하 아레츠
    7. 종합
마르코복음에서 본 역사의 주체
    1. 전제
    2. 마르코의 삶의 자리
    3. 마르코의 민중신학의 기조
        1) 세례자 요한이 잡힌 후(14a절)
        2) 갈릴래아로 가다
        3) 하느님 나라의 도래 선포
    4. 민중의 행태
예수사건의 전승 모체
    1. 문제 제기
    2. 케리그마의 성격
        1) 고린토전서 15장 3~8절
        2) 필립비서 2장 6~11절
        3) 사도행전에 나타난 케리그마
    3. 민중언어의 성격
    4. 수난사
    5. 예수의 행태 일반
        1) 기적 이야기와 예수의 행태
        2) 아포프테그마와 예수의 행태
        3) 로기온(Logion, 어록)과 예수의 행태
    6. 결론
가난한 자 : 루가의 민중 이해
    1. 가난한 자
        1) 통계적 고찰
        2) 루가의 특수자료
        3) 예수의 탄생설화와 나자렛 선언
        4) 마르코와 Q자료
    2. 루가복음서의 청중
    3. 결론
마태오의 민중적 민족주의
    1. 문제 제기
        1) 마태오의 신학적 주제에 대한 논의들
        2) 문제 제기
    2. 마태오가 처한 현실
        1) 마태오와 그의 시기
        2) 민족적 와해 위기
    3. 마태오의 현실인식
        1) 이스라엘 : 길 잃은 양들
        2) 길 잃은 양이 놓여 있는 현실
    4. 민족동일성 재확립
        1) 뿌리 찾기
        2) 바리사이파가 주도하는 라삐 유다교와의 대결
    5. 마태오의 민중 이해
        1) 언어적 성격
        2) 의식화된 민중
    6. 맺는 말
민중신학의 성서적 근거 : 마르코복음을 중심으로
    1. 예수사건의 재발견
    2. 마르코복음과 민중
    3. 민중은 수단이 아니다
    4. 민중은 객체일 수 없다
    5. 십자가는 민중수난의 극치다
민중신학의 어제와 오늘
    1. 독재와 대항하므로
    2. 민중을 만나므로
    3. 민중과 더불어
   
제2부 민중운동사
   
민중사건과 언어사건
    1. 성서에서 본 말의 성격
        1) 그 말의 현장은 어떤 것이었나
        2) 예수의 경우
        3) 예수사건에 관한 전승
        4) 오순절의 말 사건
    2. 무엇으로 말하는 것인가
    3. 해야 할 말은 무엇인가
    4. 우리가 해야 할 말
미래는 가난한 자의 것 : 루가 6장 20~26절
    1. 축복과 저주
    2. 가난한 자와 부요한 자
    3. ‘지금’과 ‘장차’
    4. 우리의 선택
나라가 임하옵소서
    1. 예수의 기도
    2. 그의 기도를 전달받은 자들
    3. 하느님의 나라
고향 잃은 민중
    1. 피난민
    2. 성서에서 본 피난민문제
    3. 게르(GER) 문제 해결의 시도
    4. 이방인에 대한 관용의 한계
    5. 당면한 과제
        1 ) 새로운 인식을 위한 운동
        2) 실천에 대한 몇 가지 제언
이스라엘 민중사
    1. 머리말
    2. 출애굽
    3. 고대 이스라엘 종족동맹
    4. 민중을 배반하고 세워진 왕권
    5. 분단시대의 고난
    6. 민중운동의 여러 계열
    7. 예수의 민중운동
    8. 맺는 말
   
제3부 민중과 체제
   
민중사실의 증언
    1. 민중신학의 전제들
    2. 민중사실의 증언
고난과 고백
    1. 수난자와의 일치
    2. 마르코의 민중
    3. 수난사와 고난
    4. 더불어의 고난
    5. 맺는 말
갈릴래아 민중에 항복한 바울로
    1. 바울로의 위치
    2. 사울은 어떤 사람인가
    3. 그리스도교 박해
    4. 예수를 만남
    5. 전향
    6. 맺는 말
소명(召命)
    1. 바울로의 소명
    2. 사도 됨과 소명
    3. 이방인에게로
바울로와 역사의 예수 I
    1. 머리말
    2. 예수에 대한 바울로의 말
    3. 예수냐 바울로냐
    4. 왜 예수가 아니고 케리그마인가
선택받은 민중: 고린토전서 1장 26~31절
    1. 고린토교회 구성원의 사회계층
    2. 공동체원의 가치 판단 기준
    3. 민중을 보는 눈
    4. 택함을 받은 민중
   
제4부 예수의 희망
   
하늘도 땅도 공(公)이다
    1. 낙원 이야기
    2. 아담一인간
    3. 실락원은 공을 사유화함으로
갈릴래아에서 만나자: 마르코 16장 1~8절
    1. 제3의 자리
    2. 갈릴래아
    3. 갈릴래아에서 만나자
예수의 희망
    1. 새 세계에의 희망
    2. 희망과 세계혁명
    3. 바른 인간공동체의 희망
    4. 맺는 말
   
판권
표지
예수는 논하지 않았다
   
제1부 민중의 언어, 이야기
   
1. 성서라는 책의 성격
2. 성서의 서술양식
    1) 구약성서
    2) 신약성서
    3) 민중언어
   
제2부 예수의 이야기(비유)
   
1. 만성병에 걸린 세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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