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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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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민중과 더불어

1. 지금까지 1970년대에서 1980년 사이에 민중신학으로 인해 일어난 신학적 사건들에 대해 몇 가지로 나누어 살펴보았습니다. 그런데 이러한 주제들이 투쟁 또는 극복의 대상이 된 것은 계획적이 아니고, 민중사건에 참여함으로써 순차적으로 일어난 것입니다. 자동폭발이 된 것입니다. 그 결과로 서구 신학이 디디고 선 주춧돌들이 모두 무너질 수밖에 없다는 판단이 선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민중신학이 정말 신학의 엑소더스의 발판을 놓았고, 신학 자체의 혁명을 초래하는 결과를 가져왔으며, 가져오고 있다고 봅니다.

따라서 이것은 재래신학에서 파생된 제도교회에 대한 전면적인 도전이 되기도 했습니다. 이런 것을 제거해버리면 서구 신학은 설 자리가 없어집니다. 이상으로 민중신학의 1단계, 첫 세대가 이룩한 발자취(엄밀한 의미에서 이것은 민중신학자들이 한 일이 아니라 민중운동이 반영된 신학적 결과입니다)를 더듬어보았는데, 그것을 가만히 보면 그 단계는 자기 부정적인 성격이 강합니다. 엑소더스라고 하지만 동시에 자기를 부정하지 않고는 안 되는 그런 일들이었습니다. 즉 자기에게서 탈출하는 것이기도 했습니다. 그런 아픔이 여기에 있었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1단계는 세례자 요한의 운동과 비슷한 단계라고 생각됩니다. 즉 회개운동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이것은 소극성을 많아 지녔다고 볼 수 있습니다.

2. 처음 단계를 엑소더스와 연결시켜보면 에집트에서 탈출한 그 단계라고 보겠는데, 그 다음 2단계는 지금 벌어지고 있는 것입니다. 주역이 이미 바뀌었는지도 모릅니다. 광야 40년의 과정에 들어간 것이라 하겠습니다. 광야 40년의 노상이 바로 현재의 민중신학의 단계라고 하겠습니다. 광야 40년의 단계가 이스라엘 민족을 형성하는 과정이라고 본다면, 현재는 민중신학이 자기 정당성을 확인하고 형성하는 단계라고 할 수 있습니다. 첫 단계는 피해자에게 동참함으로, 또 스스로 피해자가 됨으로써 모든 것을 고난의 눈으로 보았기 때문에 객관성을 잃은 주관적 정열이 상당한 역할을 했습니다. 그것은 편 파성과 특수성을 나타냈기 때문에 동시에 객관적인 보편성 등을 잃어버린 면이 있었습니다. 게다가 즉홍성도 부정할 수 없습니다. 탈출한 이스라엘이 40년 광야생활에서 여러 가지 도전을 받으며 자기를 재확인했듯이, 민중신학의 2단계는 자기를 객관적으로 재확인하는 그런 단계입니다. 이 과제가 지금 진행되고 있습니다. 그리고 1단계에 참여했던 주역들이 아니고 벌써 그 주역은 옮겨가고 있습니다. 『80년대 한국 민중신학의 전개』라는 책을 보면 그 주역들과 그들의 문제의식이 드러납니다. 여기서는 많이는 이야기하지 못하고 지금 진행되고 있는 것을 간략히 보고만 하겠습니다.

3. 첫째가 사회과학적인 조명작업입니다. 1세대들이 주역이었던 1970년대에는 그런 것이 없었습니다. 그때는 언제나 투쟁전선에만 서 있는 그런 느낌으로 진행되어왔는데, 사회과학적인 조명작업이 1980년대에 들어와서 진행되고 있습니다. 이 작업은 아직도 계속 진행되고 있고, 진행될 것입니다. 현재까지는 이 작업이 첫 단계의 작업을 심화시키는 방향으로 나아가고 있지 부정적으로 나아가는 것 같지는 않습니다. 이것은 근거를 두고 객관성을 제공하는 그런 싸움을 시작하였습니다. 또 깊이깊이 파고드는 그런 작업을 하고 있습니다.

4. 둘째는 민중교회운동이 전개되고 있다는 것을 들 수 있습니다. 이 민중교회운동은 젊은 목사들이 하고 있는데, 첫 단계의 민중신학의 결과를 실험하는 작업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민중교회운동의 성패는 어쩌면 민중신학에 대한 심판이 될 것입니다.

5. 셋째로 보편성의 인정입니다. 이제까지 민중신학에서는 민중 자체를 정의하는 것을 거부해왔습니다. 또 보편성 따위를 요구하는 것을 의도적으로 거부해왔습니다. 그것은 이른바 학문적 세계에서는 인정될 수 없는 거부입니다. 하지만 그것은 상관없었습니다. 남이 인정하고 안하고하는 것이 문제가 아니라 그것은 우리의 일이라고 생각하고 열심히 투쟁만 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세계 일부에서 그것을 저어도 학문분야로 수용하고 있습니다. 제가 아는 범위에서만 보아도 독일, 일본, 미국, 라틴아메리카 일부에서 민중신학은 한국의 신학으로 그 자리를 인정받고 있습니다. 적어도 10여 편의 학위 논문이 한국 사람들에 의해서가 아니라 본지의 사람들에 의해서 이미 통과되어 있습니다. 저들이 민중신학을 비판적으로 수용하고 있더라도 저들이 그 존재 자체를 인정할 수밖에 없다는 사실은 우리가 이제는 주체적으로 신학을 할 수 있다는 가능성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특히 독일 교회는 교회 자체에 민중신학위원회를 구성하고, 우리와 어떤 면에서 논쟁을 계속한 일이 있습니다. 지금도 그것이 중지되지는 않았습니다. 일본 신학계와도 몇 차례의 세미나를 공동주최했습니다. 미국에서도 비록 수는 적어도 민중신학에 관심하는 진지한 사람들을 만나보았고, 학위논문도 여러 개 나왔습니다. 제가 1989년에 미국에 객원교수로 가서 민중신학에 대해서 강의한 적이 있습니다. 9개 교단에서 학생들이 모여서 강의를 들었는데, 그보다 먼저 현영학 교수는 유니온신학교에서 1년 이상 민중신학을 강의했었습니다. 이 정도로 사회과학적인 전개, 민중교회운동, 보편성을 인정하여 세계로 퍼져나가는 현실 등으로 지금 전개되고 있는 민중신학의 외적 모습을 정리하겠습니다.

6. 민중신학을 하는 데 있어서 언제나 걸리는 것이 있었습니다. 모든 사물을 제대로 인식하는 데 언제나 걸리는 함정이 있었습니다. 제겐 그것이 큰 골칫거리였습니다. 더구나 서구적인 사고방식에서 그것은 굉장히 큰 골칫거리였습니다. 그것은 언제나 상화(像化)한다는 것, 어떤 형태를 만드는 것, 우리말로 '인격'이라고 번역하는 서구의 이른바 페르조나(persona)라는 것, 그게 그렇게 거리껴지는 겁니다. 페르조나를 강조하면 집단성의 의미가 없어집니다. 하느님도 페르조나(像)를 만듭니다. 그런데 상(像)을 만들면, 그 순간부터 그 존재는 부자유해집니다. 구상화하면 제약을 받습니다. 하느님을 상으로 만들어 버렸으니까, 이른바 인격화해버렸으니까 그는 '체포'되어 성전에도 갇히고, 또 그를 독점하기 위한 투쟁이 일어났던 것입니다. 그런 싸움은 결국 교리싸움으로 뒷받침되어야 하기 때문에 신관은 교리로써 박제되어버리는 결과를 가져왔습니다. 그리고 심지어는 유신론, 무신론이라는 어처구니없는 논쟁의 대상으로까지 전락되었습니다. 상을 만들면 공간과 시간의 제약을 받게 됩니다. 그 결과 인간은 자신의 의도와는 달리 보이는 상에게 자신을 내맡기지 못하고, 무의식(無意識), 무위(無爲)로 자기를 내맡깁니다. 오히려 여기서 더 큰 절대적 신앙을 찾아볼 수 있지 않습니까! 이 이야기는 이 정도로 끝내야겠습니다.

동양에는 이런 것이 없습니다. 엄밀히 말해서 동양에는 서구적인 의미의 페르조나로서의 신은 없습니다. 불교에도 없고, 특히 내가 관심하는 노장(老莊)에도 없습니다. 그래서 서구적 사고에 물든 눈에는 동양의 종교나 철학은 무신론으로 보입니다. 그러나 동양에는 신앙이 없다거나 종교가 없다고 단정하는 것은 언어도단입니다. 동양에서는 오히려 어떤 규명도 하지 않고 이름도 짓지 않고 어떤 보장될 만한 교리도 만들지 않고 공(空), 무(無) 등으로 그런 것을 대신하는 데, 저들의 목표는 수도의 목적을 철저한 자기부정에 두어 무, 공이 되게 하려 하기 때문에 마침내는 사람과의 관계가 자꾸 차단이 되어 버립니다.

그리스도교에서는 이 차단되는 관계를 트고 교류시키기 위한 것이 바로 성령의 역할입니다. 그런데 이 성령을 그리스도교 신학은 또 상으로 만들어버렸습니다. 성령을 인격화했습니다. 그래서 '삼위일체'니 뭐니 하는 것을 만들어버렸습니다. 이러한 상을 만드니까 꼭 같이 한계가 생겨버린 것입니다. 하느님과 나 사이에 쉽게 유통할 수 있는 성령이 상이라는 덫에 걸려버렸습니다.

7. 최근에 저는 '기'(氣)라는 것을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기막히다' '기똥차다' 할 때의 그 '기'입니다. 기는 원래 '바람'을 뜻하는 상형문자입니다. 기는 바람, 숨, 힘이라는 뜻으로 우주의 막힌 것을 통하게 하는 기운을 뜻합니다. 그러나 놀라운 것은 기가 구약과 신약에 통한다는 사실입니다. 예를 들면 구약의 '루아하', '하느님이 숨을 불어넣었다' 할 때의 '루아하'는 숨, 바람, 에너지, 힘 등으로 번역될 수 있는데 이것은 기와 똑같은 의미를 지니고 있습니다. 신약의 '성령'(프뉴마)이라는 것도 원래 기로 번역을 해야 맞습니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동양에서는 거기에다가 상을 입히지 않습니다. 그러니까 그것은 절대로 어디에서 막히지 않고 계속 유통을 하고 교류를 자유롭게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왜 우리는 기란 말을 못 씁니까? 우리가 신과의 관계도 차단하고, 사람과의 관계도 차단하고, 자연과도 자꾸 차단하는 서구적인 사고에서 떠나려면 이 동양적인 사고를 엄숙히 재검토하여 받아들여야 할 것입니다.

기라는 말이나 '루아하', '프뉴마'라는 말은 역동적이고 어떤 데도 매이지 않는 그런 경지를 말하는 것인데, 민중신학의 전망과 관련해서 볼 때 기는 본격적으로 물(物)을 원천에서 파악하려는 그런 주체라고 봅니다. 저는 민중이라는 것은 바로 이 기의 담지자라는 가설을 갖고, 어떻게 보면 신념을 갖고 지금 관심을 집중시키고 있습니다. 기는 결코 어떤 상에 비끄러매이지 않는 것입니다. 그런데 언제나 기를 막고, 기를 꺾으려는 것은 늘 권력입니다. 민중신학도 권력과의 투쟁 속에서 형성되었지만, 민중의 기도 그것과의 투쟁과정에서 그 참모습이 드러납니다. 성서나 역사에서 언제나 권력과의 투쟁으로 민중이 질식상태에서 탈출한 것이 그 '기'가 분출한 모습이었는데, 사회주의에서마저도 프롤레타리아가 프롤레타리아의 이름으로 권력화된 체제에 눌려서 신음하다가 폭발한 것이 요새 소련이나 동유럽의 모습인데 그게 바로 '기'의 작용입니다.

민중은 지금까지 정권과 싸워왔습니다. 몇 차례 다른 정권이 들어서도 역시 마찬가지 모습입니다. 그러면 앞으로 군사정권이 다 바뀌면 권력이라는 것의 모습이 달라질까요? 회의적이 아닐 수 없습니다. 요새 이 정권의 극도의 추태를 보면서 절실히 느낀 것은 역시 권력의 악마성입니다. 이것을 그대로 두는 한 민중의 적은 권력입니다. 한 정권이 아니라 권력입니다. 그런데 이 권력을 배태하고 이것을 수용하고 가능케 하는 것은 뭐냐 하면 '국가'라는 개념입니다. 국가라는 것을 자명한 것으로 알고 우리는 그것을 수용하는데, 결국 민중신학은 국가의 이름을 빌린 권력과 싸워야 '기'입니다.

성령은 바로 '기'입니다. 그러므로 민중운동과 성령운동, 즉 '기'는 같은 맥에 속합니다. 이상으로 저의 말도 중단해야 하겠습니다. 시간이 허락치 않습니다. 마지막에 강조하고 실례로 든 것은 우리의 신앙을 우리의 언어로 풀이함으로써 서구 신학에서 해방되어야 한다는 것이고, 그 길을 보여준 것이 민중운동이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끝으로 민중신학이 자성해야 할 과제로서, 그 뿌리를 찾는 작업으로 '생명'과의 관계에서 이야기를 진행하려고 했는데, 이만 줄이겠습니다.


List of Articles
바알 (열상 19, 18)
남은 칠천 명 (19, 7-18)
민중의 손으로 통일되는 날 (아모 9, 11-15)
겨울은 가고 (에제 37장)
에제키엘이 무등산에서 절규한다 (에제 24, 6-8)
포로에서의 탈출 (이사 66, 1-8)
위정자와의 대결 (이사 7, 10-14)
   
제5부 새로운 존재
일상성과 비일상성 (루가 10, 38-42)
그래도 다시 낙원에로 환원시키지 않았다 (창세 3, 1-10)
새로운 인간상 (창세 12, 1-9)
믿음의 조상 (창세 22, 17-18)
두 사이 에 손을 얹을 판결자 (욥기 9, 25-35)
하느님으로부터의 도피 (시편 139편)
하느님의 웃음 (시편 2편)
잠과 신앙 (시편 127편)
교회란 무엇인가 (로마 8, 9-30)
인간을 말한다 (마르 12, 28-34)
존재 근거 (시편 42편)
우주의 품으로 (시편 8,3 이하)
   
판권
표지
예수의 민중사건 : 『민중과 성서』를 내면서
   
제1부 복음서와 민중
   
예수와 민중 : 마르코복음을 중심으로
    1. 전제
    2. 마르코복음 안의 오클로스
    3. 마르코복음에 나타난 오클로스의 성격
        1) 오클로스의 성격
        2) 오클로스에 대한 예수의 행태
        3) 종합
    4. 예수를 따른 자들
    5. 마르코복음 안에 있는 어록
    6. 오클로스의 언어학적 의미
        1) 라오스와 오클로스
        2) 오클로스와 암 하 아레츠
    7. 종합
마르코복음에서 본 역사의 주체
    1. 전제
    2. 마르코의 삶의 자리
    3. 마르코의 민중신학의 기조
        1) 세례자 요한이 잡힌 후(14a절)
        2) 갈릴래아로 가다
        3) 하느님 나라의 도래 선포
    4. 민중의 행태
예수사건의 전승 모체
    1. 문제 제기
    2. 케리그마의 성격
        1) 고린토전서 15장 3~8절
        2) 필립비서 2장 6~11절
        3) 사도행전에 나타난 케리그마
    3. 민중언어의 성격
    4. 수난사
    5. 예수의 행태 일반
        1) 기적 이야기와 예수의 행태
        2) 아포프테그마와 예수의 행태
        3) 로기온(Logion, 어록)과 예수의 행태
    6. 결론
가난한 자 : 루가의 민중 이해
    1. 가난한 자
        1) 통계적 고찰
        2) 루가의 특수자료
        3) 예수의 탄생설화와 나자렛 선언
        4) 마르코와 Q자료
    2. 루가복음서의 청중
    3. 결론
마태오의 민중적 민족주의
    1. 문제 제기
        1) 마태오의 신학적 주제에 대한 논의들
        2) 문제 제기
    2. 마태오가 처한 현실
        1) 마태오와 그의 시기
        2) 민족적 와해 위기
    3. 마태오의 현실인식
        1) 이스라엘 : 길 잃은 양들
        2) 길 잃은 양이 놓여 있는 현실
    4. 민족동일성 재확립
        1) 뿌리 찾기
        2) 바리사이파가 주도하는 라삐 유다교와의 대결
    5. 마태오의 민중 이해
        1) 언어적 성격
        2) 의식화된 민중
    6. 맺는 말
민중신학의 성서적 근거 : 마르코복음을 중심으로
    1. 예수사건의 재발견
    2. 마르코복음과 민중
    3. 민중은 수단이 아니다
    4. 민중은 객체일 수 없다
    5. 십자가는 민중수난의 극치다
민중신학의 어제와 오늘
    1. 독재와 대항하므로
    2. 민중을 만나므로
    3. 민중과 더불어
   
제2부 민중운동사
   
민중사건과 언어사건
    1. 성서에서 본 말의 성격
        1) 그 말의 현장은 어떤 것이었나
        2) 예수의 경우
        3) 예수사건에 관한 전승
        4) 오순절의 말 사건
    2. 무엇으로 말하는 것인가
    3. 해야 할 말은 무엇인가
    4. 우리가 해야 할 말
미래는 가난한 자의 것 : 루가 6장 20~26절
    1. 축복과 저주
    2. 가난한 자와 부요한 자
    3. ‘지금’과 ‘장차’
    4. 우리의 선택
나라가 임하옵소서
    1. 예수의 기도
    2. 그의 기도를 전달받은 자들
    3. 하느님의 나라
고향 잃은 민중
    1. 피난민
    2. 성서에서 본 피난민문제
    3. 게르(GER) 문제 해결의 시도
    4. 이방인에 대한 관용의 한계
    5. 당면한 과제
        1 ) 새로운 인식을 위한 운동
        2) 실천에 대한 몇 가지 제언
이스라엘 민중사
    1. 머리말
    2. 출애굽
    3. 고대 이스라엘 종족동맹
    4. 민중을 배반하고 세워진 왕권
    5. 분단시대의 고난
    6. 민중운동의 여러 계열
    7. 예수의 민중운동
    8. 맺는 말
   
제3부 민중과 체제
   
민중사실의 증언
    1. 민중신학의 전제들
    2. 민중사실의 증언
고난과 고백
    1. 수난자와의 일치
    2. 마르코의 민중
    3. 수난사와 고난
    4. 더불어의 고난
    5. 맺는 말
갈릴래아 민중에 항복한 바울로
    1. 바울로의 위치
    2. 사울은 어떤 사람인가
    3. 그리스도교 박해
    4. 예수를 만남
    5. 전향
    6. 맺는 말
소명(召命)
    1. 바울로의 소명
    2. 사도 됨과 소명
    3. 이방인에게로
바울로와 역사의 예수 I
    1. 머리말
    2. 예수에 대한 바울로의 말
    3. 예수냐 바울로냐
    4. 왜 예수가 아니고 케리그마인가
선택받은 민중: 고린토전서 1장 26~31절
    1. 고린토교회 구성원의 사회계층
    2. 공동체원의 가치 판단 기준
    3. 민중을 보는 눈
    4. 택함을 받은 민중
   
제4부 예수의 희망
   
하늘도 땅도 공(公)이다
    1. 낙원 이야기
    2. 아담一인간
    3. 실락원은 공을 사유화함으로
갈릴래아에서 만나자: 마르코 16장 1~8절
    1. 제3의 자리
    2. 갈릴래아
    3. 갈릴래아에서 만나자
예수의 희망
    1. 새 세계에의 희망
    2. 희망과 세계혁명
    3. 바른 인간공동체의 희망
    4. 맺는 말
   
판권
표지
예수는 논하지 않았다
   
제1부 민중의 언어, 이야기
   
1. 성서라는 책의 성격
2. 성서의 서술양식
    1) 구약성서
    2) 신약성서
    3) 민중언어
   
제2부 예수의 이야기(비유)
   
1. 만성병에 걸린 세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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