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도행전에 의하면 예수사건을 말함과 더불어 박해가 일어났다. "너희들이 잡아죽인 예수를 하느님이 살리셨다"는 증언과 더불어 베드로가 투옥되고, 스데파노가 돌에 맞아 순교당하는 등의 박해가 일어났다. 이것은 그들이 말해야 하는 현장이 어떤 것이었는지를 잘 드러낸다. 예수를 불법으로 죽인 그 앞잡이들이 굶주린 사자처럼 에워싸고 있는 그런 현장이었다. 한마디로 예수사건을 전하면 곧 정치 세력이 박해하고 죽이는 그런 현장이었다. 이런 마당에서 그리스도 인들에게 두 가지 형태의 증언의 줄기가 이루어졌다.
그중 하나는 교회지도층에 의한 것으로서, 교회의 운영을 책임진 지도층은 교회의 존속을 위하여 로마제국과의 정면충돌을 피하면서 그리스도교를 선교하는 길을 모색했다. 그것이 바로 케리그마의 형태가 되었다. 케리그마는 예수의 행태가 어떠했으며 그를 누가, 어떻게 처형했는지 말하지 않고, 단지 그 죽음의 의미를 선포하는 것이다. 가장 초기에 공포된 그리스도교회의 고백으로 알려진 고린토전서 15장 3절에서 7절까지와 필립비서 2장 2장 6절에서 11절까지를 보면 이러한 경향을 뚜렷하게 볼 수 있다. 이 두 곳에는 예수가 왜, 어떻게, 누구에게 처형되었는지에 대해서는 일언반구도 반영되어 있지 않고, 오직 그 모든 것이 하느님의 뜻으로 된 것이며, 성서의 예언이 성취된 것이라고만 한다. 한마디로 말하면 예수의 사건을 말하기는 했으되 그 사건을 비역사화했다. 그러므로 십자가처형의 장본인을 건드리지 않았다.
이에 대해서 그리스도교도들 중에 또 다른 전승이 맥을 이어왔다. 그것은 교회의 전면에 나서서 공적인 책임을 지지 않은 예수의 무명의 민중을 통해서 일어난 '말의 사건'이다. 마르코복음은 빈 무덤을 목격한 여인들에게, 어떤 청년이 예수는 이미 갈릴래아로 갔다는 사실을 제자들에게 말하라고 했는데도 여인들이 겁에 질려서 덜덜 떨면서 무서워서 아무에게도 말을 하지 못했다는 말로 끝낸다. 서구 신학자들은 무서워 떤다는 것을 종교적인 계시경험을 상정한 것이라고 처리해버리나, 나는 그렇게 보지 않는다. 그것이 바로 그들이 선 자리이다. 로마제국이 시퍼렇게 살아 있는 현장에서 그들에 의해서 불법으로 처형된 예수가 부활했다는 사실을 알리는 행위는 생명을 걸어야 하는 엄청난 사실이었기 때문에 저들은 떨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그러나 저들이 결코 말하지 않은 것은 아니다. 저들은 이 사실뿐 아니라 예수사건 전체와 그가 누구에게, 어떻게 십자가에 처형되었는지를 말하되 끊임없이 했다. 그러나 교회의 공식발표로서나 설교로 한 것이 아니라 입에서 입으로, 계속 진원지가 알려지지 않는 방법인 유언비어 형식으로 이 사건을 전승했다. 저들은 십자가사건의 목격자이며 빈 무덤의 목격자들로서 증언했다. 그러나 공적인 교회 고백은 이 여인들을 위시한 예수의 민중의 증언을 공적 고백으로 받아들여 공포하지 않았던 것이다. 이렇게 제도적 교회의 공적 고백인 이른바 케리그마와 민중의 유언비어가 따로 전해지고 있는 것을 합쳐서 문서화한 것이 바로 마르코복음이며, 이로써 우리도 예수의 사건을 알게 되었고 그것을 계속 말할 수 있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