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언자의 말은 하느님의 말씀이다. 역으로 하느님의 말씀일 때 그것이 참 예언자의 말씀이다. 그런데 하느님의 말씀이란 신비의 귀가 있어서 들을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진실 자체이기에 하느님의 말씀이다. 그것은 해도 되고 안 해도 되는 것이 아니라 반드시 밝혀야 되고, 그렇지 않으면 악마의 지배를 지원하는 결과가 되기 때문에 해야만 하는 그런 말이다. 그러므로 하느님의 말씀을 받은 아모스는, "사자가 으르링거리는데 겁내지 않을 자가 있겠느냐? 주 야훼께서 말씀하시는데 그 말씀을 전하지 않을 자가 있겠느냐"고 했다.
성서에 보면 하느님은 그의 말씀을 특정 민족, 특정인에게 의탁했다. 그것을 종교학에서는 '신탁'이라고 한다. 이스라엘 민족, 예언자 등이 신탁자들이었다. 예수는 물론 교회에 그리고 사도들에게 의탁했다.
그 말씀이 의탁될 때는 항상 역사적 사건과 결부된다. 가령 모세가 미디안에서 하느님의 신탁을 받을 때 신비한 환상을 본다. 그러나 신비한 환상 자체가 말씀의 내용이 아니고 역사적 사실이 그 내용이었다. 그것은, "나는 내 백성이 에집트에서 고생하는 것을 똑똑히 보았고 억압받으며 괴로워 울부짖는 소리를 들었다"는 것과, 저들을 구하기 위해 가라는 것이다. 여기서 분명히 밝히고 넘어가야 할 것이 있다. 이런 신탁은 분명히 역사 한복판에서 일어나는 사건인데, 이 하느님의 소리와 모세가 고민하는 내용을 유리시킬 수 없다는 사실이다. 모세가 자기 민족의 수난현장을 생각하고 고민하면서도 행동하지 못할 때 하느님은 빨리 행동으로 옮기라고 지시한다. 이때 모세에게는 자기 민중의 신음소리와 하느님의 말씀이 같은 것이었다. 그리고 그럴 때에만 하느님의 말씀이 행동으로 인카네이션(incarnation, 化肉)되는 것이다.
예언자들의 신탁은 모두 그 민족이 꼭 가야 할 길을 밝힌 것이다. 사실, '진실에 대한 증언!'이것이 허락되지 않는 경우가 허다하다. 어떤 한 생명이 불치의 병에 걸린 것을 알면서도 그 환자에게 그가 죽는다는 사실을 받설하기가 어려운데, 예레미야는 그가 사랑하는 조국 유다왕국이 바빌론에 의해 망한다는 사실을 계속 예언한다. 그 일이 얼마나 어려웠을까! 당시는 '하나냐'같이 민족주의를 등에 업고 왕 앞에서 태평성대라고 읊조리는 패들이 득시글거릴 때이다. 그러므로 망조가 들었다고 말하는 예레미야의 말을 듣지 않는 것은 고사하고 그를 민족반역자로, 국가보안법 위반자로, 유언비어로 민심을 현혹하는 자로 규정하여 마침내 죽이기로 한 것이다.
예수 앞에는 이스라엘의 멸망이라는 사건이 가로놓여 있었다. 세례자 요한에서부터 시작하여 저들에게 무조건의 회개를 촉구한 것은 저들의 살길은 자기 혁명밖에 없다는 것을 선포하는 행위였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유다 지도층은 그의 말을 듣지 않을 뿐만 아니라 그를 소요죄로 처형했다. 예수의 민중은 저들에게 "너희들의 행위는 하느님의 뜻에 대한 반역이다. 너희들에 의해 죄수로 죽임당한 그의 편에, 그의 대열에 이제라도 하루 속히 가담하라" 하고 재촉했다. 그러나 로마와 유다 지도층은 예수의 민중을 로마 그리고 유다 체제의 모반자로 사정없이 처형했다. 그래도 그들은 결코 입을 다물지 않았다. 그것은 바로 그리스도 자신이 살아 움직인 구체적 증거이다. 그들의 주장은 진실이었다. 그 말씀은 꼭 밝혀야 하는 말이었다. 그런 의미에서 예수는 "저들이 잠잠하면 돌들이 소리를 지르리라"고 했다. 꼭 해야 할 말인데, 진실은 밝혀져야만 하는데 그 입을 막거나 또는 말해야 할 자들이 비겁해 그 전실을 증언하지 않으면 돌이 소리친다는 것이다.
이렇게 비겁해서 "말하라"는 것을 안 하거나 또 그 말씀을 교묘히 왜곡하거나 그 명령을 거역한 자들이 하느님의 벌을 받은 이야기가 성서에 아주 많으며, 말씀을 위탁받은 자나 집단이 제 임무를 다하지 않을 때에는 하느님은 엉뚱한 사건을 일으켜서라도 그것을 대행시키는 예가 얼마든지 있다. 불레셋을 하느님의 일꾼으로 사용한다는 것이나 예레미야가 바빌론도 하느님의 도구라고 한 것은 그런 뜻에서 한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