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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우리가 해야 할 말

우리는 하느님이 우리 입에 담아준 말씀을 다했는가? 하고 있는가? 할 것인가?

한국 교회의 역사를 보면 치욕과 영광이 공존한다. 조선조가 망할 무렵 그리스도의 복음이 이 땅에 상륙했을 때 누구보다도 먼저 몰려든 이들은 민중이었다. 저들은 중국이나 일본의 침략과 착취행위의 손발이 되어 세도를 부리던 세도가들에게 짓밟히면서도 나라 사랑하는 일념을 버리지 않고 뼈빠지게 일해왔으나 결국 그때는 나라가 임종을 맞이하고 있을 때였다. 이때 저들은 그리스도의 복음을 자신들의 해방만이 아니라 민중 구원의 복음으로 알고 몰려든 것이다. 그것은 유교에 의해 세워진 낡은 체제에 대한 몸으로써의 저항이기도 했다.

그러나 선교사들이 이끄는 한국 교회는 개인적으로 예외는 있었으나 교회의 공식입장으로는 언제나 정교분리로서 세상사에 간섭 말라는 것이었다. 일본이 구체적으로 침략과 약탈을 일삼을 때에도 그런 것에는 눈감고 저 피안만 쳐다보라는 거짓된 길을 제시했다. 교회의 지도층들인 목사와 장로는 선교사에게 예속되고, 또 교회 존속을 걱정한 나머지 이 민족적 비운에 우는 민중의 한을 교회의 공적인 소리로 대변하지 못했을 뿐더러 오히려 이것을 억제했다.

31운동은 제도교회의 지도층과 무관한 그리스도 민중이 일으킨 사건이며, 저들이 신념으로 한 진실이 천하에 선포된 사건이다. 그러나 일제의 잔인한 탄압은 저들의 소리를 짓눌러버렸다. 그러나 민중, 특히 노동자, 농민들은 결코 진압되지 않았다. 1920년에서 1930년 사이에 노동쟁의가 총 891건 일어났고, 7만 3,450명의 노동자가 참가했다. 농민의 소작쟁의사건이 1920년에서 1940년 사이에 무려 14만 969건이 일어났다. 그렇게 나약하면서 그만큼의 투쟁을 한 것은 저들의 처지가 절실했기 때문이다.

이런 상황에서 우리 교회는 무엇을 말했나? 교회는 각 개인들의 종교적 이기심만 조장하면서 피안으로의 도피만을 설교해왔다. 한국 교회는 이 세상을 '멸망의 마을'로 알고 홀로 구원을 찾아 도망치는 『천로역정』을 거울로, 표본으로 삼았다. 이 통에 버려진 민중의 한과 애환은 사회주의자나 공산당에 의해 조종되었다. 그 사실은 1925년에 조선공산당이 창립됨으로써 노출되었다.

바로 같은 해에 한국민을 무단으로 억누르면서 착취하던 일제가 서울 남산에 이른바 '조선신궁'을 건립했다. 이것은 한국민족의 정신을 말살하려는 신호임과 동시에 그리스도교, 특히 한국 교회가 가장 예민해했던 우상이 군사력을 등에 업고 등장한 사건이다. 그런데 조상숭배까지 우상숭배라고 배격하던 한국 교회는 이런 큰 사건들에 대해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당시의 장로교를 대변하는 신학잡지인 『신학지남』을 보고 놀란 것은, 이러한 엄청난 일이 벌어지고 있는데도 그런 문제에 대해서 일언반구도 언급하지 않고, 청담파나 된 듯이 교회 이야기를 하되 선교사들의 그것을 되풀이할 뿐이었던 것이다.

마침내 1935년에 숭전교장(맥큔, 윤산은)과 숭의여자고등학교 교장 스눅(Snok)에게 60일내로 신사참배를 결단할 것을 요구하는 최후 통첩이 내려졌다. 이 일이 선교부 실행위원회에서 거론되었을 때 한국 목사도 27명이나 참가했으나 불참한다는 가결 외에 다른 어떤 소리도 나오지 않았다. 그러다가 결국 1938년 강제로 결행된 총회에서는 꼼짝없이 항복하고 말았다. 이것은 결국 할말을 안 한 한국 교회에 내려진 심판이다. 해야 할 말을 하지 못한 한국 교회! 한국 교회는 주기철 목사를 신사참배를 반대하다가 순교한 상징처럼 떠받든다. 그러나 주기철 목사가 체포된 후 그가 시무하는 교회에서는 한 번의 당회도, 제직회도 모인 일이 없었다는데, 그게 사실이라면 살았으나 이미 죽은 교회이다. 이렇게 해야 할 말을 그때 그때 말 안 한 한국 교회는 마침내 일제의 마지막 탄압에 사실상 와해된 상태에서 시체처럼 끌려다녀야만 했던 것이다.

그런 상태에서 해방을 맞은 한국 교회에 무슨 힘이 있었겠는가? 해방은 잃었던 자신을 찾고 이 백성을 위한 하느님의 말을 해야 할 절호의 기회였고, 또 갈 바를 모르는 민중이 교회로 구름같이 모여들었는데, 교회가 할말을 하지 않으므로 모여들던 저들은 실망하여 교회를 떠났다. 이 땅에 38선이 그어지고, 강대국의 놀잇감이 되고, 군정이 이 민족을 멸시하며 군림하고, 마침내 이승만을 내세워 민족의 영구분단이 결정되어도 한국 교회는 그저 구령운동만이 제일이라는 자세로 일관했다. 그 결과 우리 민족은 또다시 625라는 재앙을 맞이하게 되었다. 그 판에도 한국 교회는 구호물자를 둘러싼 싸움과 교파 싸움에 몰두했고, 이승만 독재가 횡포를 거듭해도 단 한마디 말도 못하다가 419라는 엄청난 사건을 맞았다. 또한 516 군사쿠데타가 일어나도 여전히 한국 교회는 벙어리였다.

그 동안에 '한국기독교장로회'가 탄생했다. 이 교단은 새로운 말씀을 의탁하기 위해 새롭게 만든 하느님의 공동체로 안다. 이 공동체의 30년 역사의 전반은 하느님의 말씀을 해석하는 신학의 자유를 위한 투쟁에 빠졌었다. 그것은 선교사들이 군림하는 교권에서의 엑소더스운동이다. 그리고 후반기에는 인권과 사회정의를 위한 하느님의 말씀을 증거하는데 바쳐왔다.

그것은 다음과 같은 과정으로 이루어졌다. 1970년대초 군사독재 하에서 유린되는 인권을 위해서, 또 무모하게 추진하는 산업화의 그늘에서 희생되어가는 노동자와 피폐해가는 농촌에서 살 길 없어 도시로 몰려든 빈민들의 신음소리에서 하느님의 명령을 듣고 투신하는 일꾼, 예레미야의 후예, 예수의 종들이 나타났다. 그리고 마침내 저들이 체포되는 파동이 하느님의 말씀이 되어 잠든 교회를 일깨웠다. 이때 교회 일반은 저들을 차디찬 눈초리로 대응하고 있을 때였고, 이 사건에서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자신을 개방한 공동체가 바로 한국 기독교장로회이다. '하느님의 선교'(missio Dei)를 신학의 정도로 받아들인 이 교단은 이 말씀을 교단 전체로, 몸으로 증거했는데, 그것이 1970년 후반기였다. 이 공동체의 집요한 말씀의 사건은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NCC)를 중심으로 하여 확산되어 마침내 한국 교회가 이 민족사에서 맡은 '신탁'을 다하는 그리스도교 공동체로서 세계의 관심의 대상이 되게 하였다.

그러나 우리의 책임은 끝나지 않았다. 아니! 이제부터 정말 감당하기 어려운 말씀을 해야 할 현장이 눈앞에 보인다. 오늘의 학원문제가 발등에 떨어진 불이며, 자본가의 비리 속에서 폭발 직전에 있는 노동자들의 문제, 빚더미에서 시들어가는 농촌 문제, 억압된 언론, 부정부패와 권력횡포, 민(民)이 직접 선택하는 정권의 평화교체라는 과제, 맹목적으로 악마시만 하던 이북과의 대화에서 해야 할 우리의 과제, 무엇보다도 절실한 민족분단시대의 극복이라는 큰 과제가 눈앞에 있다. 외채문제, 강대국들의 횡포, 국민의 불신풍조와 물질지상주의에 물들어 날로 썩어가는 민심을 어떻게 해결하는가? 이런 마당에서 하느님이 우리에게 주신 말씀을 우리는 말해야 할 입장에 있다.

이제 또 1970년대와 같은 박해와 수난의 악순환이 벌어질 수 있다. 어떻게 보면 우리의 할 일은 과거와 꼭 같지 않나 하는 생각이 든다. 그러나 아니다. 우리는 분명히 제3단계에 들어섰으며, 그것을 의식해야만 이러한 싸움에서 새로운 말씀을 들을 수 있다. 제3단계란 바로 우리가 해야 할 말, 우리의 책임이 우리만을 위하는 일이 아니라 역사를 통치하시는 하느님의 일에 참여하는 것이라는 투철한 의식을 갖는 것이다.

오늘의 세계문제의 근본은 동서간의 대립보다 남북간의 대립이다. 이른바 제3세계가 식민지로서 착취의 대상이 된 식민지시대의 종언을 내세운 이 마당에도 그런 현상은 계속된다. 과거에는 자본주의국가들을 제국주의국가들이라고 불렀으나, 지금은 이른바 프롤레타리아 해방을 내세운 공산국가들도 꼭 같이 강대국으로서 제3세계를 무기판매장으로 삼고 폭력으로 굴종을 강요한다. 그러므로 하느님의 말씀을 받은 우리에게는 정치나 이데올로기로 이 세계를 분단한 분계선이 적용되지 않는다. 그러므로 지금은 제3세계의 해방과 자주가 이 세계에 정의를 실현하는 가장 중요한 첫 과제이다.

우리도 바로 제3세계의 민족으로서 하느님의 말씀을 받아왔다. 그런데 우리는 우리 자신들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수난당하는 동안에 우리가 한 증언이 놀랍게도 세계, 특히 제3세계에 하나의 좌표를 주는 결과를 가져왔다. 이것은 하느님이 하시는 일이다. 따라서 이제부터는 제3세계의 길을 앞장서는, 신탁을 받은 교단이라는 사실을 자각할 때가 되었다. 이러한 확신이 우리를 모든 속박에서 해방시킬 뿐 아니라 현금의 세계의 엉킨 문제를 푸는 열쇠가 될 수도 있을 것이다.

이러한 사명을 다하기 위해서 다음 두 가지 사실들을 재삼 명심하고, 실천할 수 있는 방안을 찾아야 할 것이다.

첫째는 저 민중의 말을 막으면 돌들이 소리를 지르리라는 말씀에 대한 역사적 인식이다. 이 말씀은 저 민중은 꼭 해야 할 말을 하고 있다는 말씀이다. 꼭 해야 할 말은 바로 하느님의 말씀이다. 따라서 우리는 하느님의 말씀을 교회당이라는 공간에 가두지 말 것이며, 하느님의 말씀을 목사만이 독점하고 있다는 생각에서 탈피해야 한다. 예레미야가 하느님이 그의 무대를 성전에서 삶의 현장으로 옮긴 것을 증언했듯이, 세례자 요한이 하느님은 저 돌들로 아브라함의 자손을 만들 수 있다고 했듯이, 하느님은 제도교회가 맡은 말을 제대로 안 할 때는 그의 말씀의 현장을 옮길 수도 있으며 목사나 신학자들의 귀를 어둡게 하고 이름없는 평신도, 나아가서는 예수의 아름도 제대로 부르지 못하는 버려진 자들에게 진실을 신탁할 수도 있다는 것을 직시해야 한다. 그러므로 현금에는 세계에서 일어나는 사건, 특히 민중의 절규에서 하느님의 명령을 듣는 것이 세뇌되지 않은 눈과 마음으로 성서를 읽고 이해한 것보다 오히려 진실을 들을 수 있을 것이다. 그러므로 저들을 가르치기보다는 오히려 저들에게 알려준 주님의 뜻을 들어야 하는 자세가 중요하다.

둘째는 하느님은 사건으로 말씀하신다는 사실을 재삼 명심하고, 그것에 대한 증인이 되는 것이 우리의 큰 과제이다. 바울로는 "하느님의 말씀은 네게 가까이 있다. 네 입에 있고 네 마음에 있다"고 하고, "들은 일이 없는 분을 어떻게 믿겠습니까? 전하는 사람이 없으면 어떻게 들을 수 있겠습니까!"(로마 10, 8~41)라고 한다. 이것은 말씀을 입으로 전하는 일, 즉 '전도'를 중요시한 것이다. 그러나 바울로는 필립비서에서 새로운 사실을 경험한 것을 증언한다. 그것은 그가 감옥에 갇혔다는 사건이 '복음의 전진'을 가져온다는 사실이다(필립 1, 12). 이것이 바로 '말씀의 신학'에서 '사건의 신학'으로의 방향전환이며, '하느님의 선교'(missio Dei)의 경험이다.

이러한 바울로의 체험을 우리는 몸으로 했다. 그런데 이러한 '사건'들이 특히 제3세계 도처에서 일어나고 있다. 그러므로 우리는 저들에게서 일어나는 사건과 우리가 경험하는 사건에서 하느님이 말씀하신다는 것을 증거할 때인 것이다.

 

■ 1985년 기독교장로회 총회에서의 주제강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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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정자와의 대결 (이사 7, 10-14)
   
제5부 새로운 존재
일상성과 비일상성 (루가 10, 38-42)
그래도 다시 낙원에로 환원시키지 않았다 (창세 3, 1-10)
새로운 인간상 (창세 12, 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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판권
표지
예수의 민중사건 : 『민중과 성서』를 내면서
   
제1부 복음서와 민중
   
예수와 민중 : 마르코복음을 중심으로
    1. 전제
    2. 마르코복음 안의 오클로스
    3. 마르코복음에 나타난 오클로스의 성격
        1) 오클로스의 성격
        2) 오클로스에 대한 예수의 행태
        3) 종합
    4. 예수를 따른 자들
    5. 마르코복음 안에 있는 어록
    6. 오클로스의 언어학적 의미
        1) 라오스와 오클로스
        2) 오클로스와 암 하 아레츠
    7. 종합
마르코복음에서 본 역사의 주체
    1. 전제
    2. 마르코의 삶의 자리
    3. 마르코의 민중신학의 기조
        1) 세례자 요한이 잡힌 후(14a절)
        2) 갈릴래아로 가다
        3) 하느님 나라의 도래 선포
    4. 민중의 행태
예수사건의 전승 모체
    1. 문제 제기
    2. 케리그마의 성격
        1) 고린토전서 15장 3~8절
        2) 필립비서 2장 6~11절
        3) 사도행전에 나타난 케리그마
    3. 민중언어의 성격
    4. 수난사
    5. 예수의 행태 일반
        1) 기적 이야기와 예수의 행태
        2) 아포프테그마와 예수의 행태
        3) 로기온(Logion, 어록)과 예수의 행태
    6. 결론
가난한 자 : 루가의 민중 이해
    1. 가난한 자
        1) 통계적 고찰
        2) 루가의 특수자료
        3) 예수의 탄생설화와 나자렛 선언
        4) 마르코와 Q자료
    2. 루가복음서의 청중
    3. 결론
마태오의 민중적 민족주의
    1. 문제 제기
        1) 마태오의 신학적 주제에 대한 논의들
        2) 문제 제기
    2. 마태오가 처한 현실
        1) 마태오와 그의 시기
        2) 민족적 와해 위기
    3. 마태오의 현실인식
        1) 이스라엘 : 길 잃은 양들
        2) 길 잃은 양이 놓여 있는 현실
    4. 민족동일성 재확립
        1) 뿌리 찾기
        2) 바리사이파가 주도하는 라삐 유다교와의 대결
    5. 마태오의 민중 이해
        1) 언어적 성격
        2) 의식화된 민중
    6. 맺는 말
민중신학의 성서적 근거 : 마르코복음을 중심으로
    1. 예수사건의 재발견
    2. 마르코복음과 민중
    3. 민중은 수단이 아니다
    4. 민중은 객체일 수 없다
    5. 십자가는 민중수난의 극치다
민중신학의 어제와 오늘
    1. 독재와 대항하므로
    2. 민중을 만나므로
    3. 민중과 더불어
   
제2부 민중운동사
   
민중사건과 언어사건
    1. 성서에서 본 말의 성격
        1) 그 말의 현장은 어떤 것이었나
        2) 예수의 경우
        3) 예수사건에 관한 전승
        4) 오순절의 말 사건
    2. 무엇으로 말하는 것인가
    3. 해야 할 말은 무엇인가
    4. 우리가 해야 할 말
미래는 가난한 자의 것 : 루가 6장 20~26절
    1. 축복과 저주
    2. 가난한 자와 부요한 자
    3. ‘지금’과 ‘장차’
    4. 우리의 선택
나라가 임하옵소서
    1. 예수의 기도
    2. 그의 기도를 전달받은 자들
    3. 하느님의 나라
고향 잃은 민중
    1. 피난민
    2. 성서에서 본 피난민문제
    3. 게르(GER) 문제 해결의 시도
    4. 이방인에 대한 관용의 한계
    5. 당면한 과제
        1 ) 새로운 인식을 위한 운동
        2) 실천에 대한 몇 가지 제언
이스라엘 민중사
    1. 머리말
    2. 출애굽
    3. 고대 이스라엘 종족동맹
    4. 민중을 배반하고 세워진 왕권
    5. 분단시대의 고난
    6. 민중운동의 여러 계열
    7. 예수의 민중운동
    8. 맺는 말
   
제3부 민중과 체제
   
민중사실의 증언
    1. 민중신학의 전제들
    2. 민중사실의 증언
고난과 고백
    1. 수난자와의 일치
    2. 마르코의 민중
    3. 수난사와 고난
    4. 더불어의 고난
    5. 맺는 말
갈릴래아 민중에 항복한 바울로
    1. 바울로의 위치
    2. 사울은 어떤 사람인가
    3. 그리스도교 박해
    4. 예수를 만남
    5. 전향
    6. 맺는 말
소명(召命)
    1. 바울로의 소명
    2. 사도 됨과 소명
    3. 이방인에게로
바울로와 역사의 예수 I
    1. 머리말
    2. 예수에 대한 바울로의 말
    3. 예수냐 바울로냐
    4. 왜 예수가 아니고 케리그마인가
선택받은 민중: 고린토전서 1장 26~31절
    1. 고린토교회 구성원의 사회계층
    2. 공동체원의 가치 판단 기준
    3. 민중을 보는 눈
    4. 택함을 받은 민중
   
제4부 예수의 희망
   
하늘도 땅도 공(公)이다
    1. 낙원 이야기
    2. 아담一인간
    3. 실락원은 공을 사유화함으로
갈릴래아에서 만나자: 마르코 16장 1~8절
    1. 제3의 자리
    2. 갈릴래아
    3. 갈릴래아에서 만나자
예수의 희망
    1. 새 세계에의 희망
    2. 희망과 세계혁명
    3. 바른 인간공동체의 희망
    4. 맺는 말
   
판권
표지
예수는 논하지 않았다
   
제1부 민중의 언어, 이야기
   
1. 성서라는 책의 성격
2. 성서의 서술양식
    1) 구약성서
    2) 신약성서
    3) 민중언어
   
제2부 예수의 이야기(비유)
   
1. 만성병에 걸린 세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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