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 가난한 사람들은 복이 있다. 하느님의 나라가 너희의 것이다.
지금! 너희 부요한 사람들은 화가 있다. 받을 위안을 이미 받았다.
이 말씀을 어떻게 받아들일까? 이것은 오늘 우리가 추구하는 것과는 너무나도 상반되는 역설이 아닌가? 오늘의 사회구조에서는 부강한 국가나 민족이나 개인은 선망의 대상이요, 가난한 민족이나 개인은 명시를 받고 있다. 그래서 이른바 후진국들은 경제성장을 위해 안간힘을 다하고 있으며, 개인들은 빈곤에서의 탈출만이 아니라 보다 더 잘살기 위해서 수단을 가리지 않는다. 또한 이 시대의 정의를 위한다는 사람들도 그 최대의 목표를 가난에서의 해방에 두고 있다. '보다 더 잘살자!', '보다 더 잘살게 하자!' 이러한 노력이나 주장에 반대 의견을 가진 사람은 없을 성싶다.
그러면 우리는 이 말씀을 거부한 것인가? 그리스도교는 니체의 말 대로 노예의 도덕경인가? 이 말은 가난한 자에게 불평없이 자기가 처한 상태를 감수하라는 아편 아닌가? 그러나 이 말씀은 지금 부요한 자에게 화(禍)를 선언한다. 이것은 부요한 자들의 편에서 가난한 자들을 무마하는 따위의 말씀은 아니다. 오늘의 사회구조 안에서 자본주의와 결탁한 기독교는 그렇게 설교했는지 모른다. 그러나 이 말씀은 부요한 자들이 지배하는 사회의 종결을 선언한다. 그러면 이 말씀을 어떻게 이해할까? 이것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다음의 뜻을 분명히 해야 한다. 즉 가난한 자와 부요한 자란 어떤 사람들을 말하는가? 복이란 무엇인가? 그가 약속한 하느님의 나라란 무엇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