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말씀은 마태오복음에도 있다(5, 3). 그러나 루가의 것과는 약간 다르다. 마태오는 가난한 자란 곧 마음에 있어서(τῳ πνεύματτ) 가난한 자이다. 즉 가난을 정신화했다. 따라서 굶주린 자란 배가 고파서가 아니라 의(義)에 굶주린 자라고 한다. 또 우는 자란 바로 이 세상의 꼴을 걱정해서 우는 자이다. 그것은 그가 온유하고 자비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이 세계 안에 일어나는 모든 싸움 때문에 운다. 그래서 평화운동을 한다. 그러나 이것이 예수의 본뜻인가? 정말 가난이란 정신적인 가난을 말하는 것인가?
서구 기독교의 정통파에서는 마태오를 그렇게 이해함으로 위의 입장을 취했다. 즉 가난을 정신화했다. 그리하여 물질적으로 가난하기 때문에 사회에서 멸시를 받는 자들에게 인내와 굴종을 미덕으로 설교했다. 그럼으로 물질적인 빈부의 차 때문에 야기되는 사회의 모순에 눈을 감아버렸다. 가난한 자들에 대해 아무런 책임을 느끼지 않고 오히려 정신적 '체념'을 설교했으며, 이 사회구조를 조종하는 부유층의 특권에 간섭하지 않을 뿐 아니라 그 특권을 마치 하느님이 주는 은혜인 것처럼 설교했다. 따라서 기독교는 자본주의의 앞잡이라는 빈축을 샀다. 이것은 결국 오늘의 사회구조를 그대로 인정하고 그것을 정당화하는 이원화의 윤리설교이다. 그러나 이것이 정말 옳은가?
한편 루가복음에는 '마음에'라는 단서가 없다. 그저 '가난한 자들'이다. 문자 그대로 말한다면 물질적으로 가난한 자라는 뜻이다. 따라서 정말 배고픈 사람들이다. 또 우는 자란 물질적 빈곤에서 오는 슬픔 때문이며, 이 사회에서 멸시받고 모욕을 당함은 물질적으로 가난하므로 사회에 설 자리가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렇게 이해하는 것이 옳은가? 기독교 안에서 개혁적 진취성을 가진 그리스도교인들은 루가를 그렇게 이해하고 그의 편에 섰다. 가난한 자란 바로 공산주의에서 말하는 프롤레타리아들이고 물질적인 궁핍에서 오는 굶주림, 그것에서 온 소외자로서의 울음, 그렇게 멸시와 박해를 받은 자들이 바로 축복의 대상이라고 했다. 이런 이해는 사회주의운동이 휘몰아올 때 더욱 구체화되었다. 그리고 이런 이해를 바탕으로 할 때 부유한 자란 물질적인 부르주아들이 된다. 저들은 물질의 부에서 웃고, 그것으로 구축된 사회구조에서의 지위와 명성에 기뻐하고 섬김을 받는 위치에 안주하는 자들이다.
그러나 정말 예수의 뜻은 그런 것이었을까? 이러한 이해에는 문제가 없는가? 이것은 사람의 삶을 물질주의적인 측에서 평면적으로, 일원화한 게 아닌가? 이런 이해는 어쩔 수 없이 예수를, 물질의 균등 분배를 사회정의의 지상과제라고 생각하는 사회주의의 선구로 규정할 수밖에 없게 할 것이다.
그러나 위의 이해들은 모두 옳지 않다. 루가를 그렇게 해석한다면 지금 가난한 자가 복이 있다는 것이 장차 물질적으로 부유하게 된다는 말이 된다. 까닭은 부유함만이 복일 터아니까! 그러면 하느님의 나라란 물질적으로 충족한 현실이 된다. 그렇다면 지금의 부요한 자는 왜 화가 있다고 했나? 부유하기 때문에 화가 있다면 지금 가난한 자가 복 받는 순간 곧 저주의 대상이 될 게 아닌가? 그러면 이 말씀은 소유에 의해 형성된 계급투쟁을 선동함으로써 한번 가진 자와 안 가진 자의 위치를 바꾸어보자는 혁명을 종용한 것이 된다. 그러나 예수의 말씀 중에는 그 어디에도 물질적인 재분배를 위한 사회변혁을 시사한 곳은 한 군데도 없다. 물론 부자에게 그 재산을 가난한 자들에게 나누어주라고 한 데는 있다. 그러나 그것을 절대조건으로 하거나 일반화하지는 않았다. 단지 예수는 물질적인 욕심이 사람의 자기 상실의 가장 중요한 요소의 하나임을 말할 뿐이다. 하느님과 맘몬(돈)을 겸해서 섬길 수 없다(마태 6, 24)는 말씀은 그 단적인 표현이다. 더욱이 우리는 다음의 주목할 만한 말씀을 가지고 있다. 예수는 형제에게 유산을 분배해주도록 도와달라는 청에 대해서 이렇게 말한다.
이 사람아 누가 나를 너희의 재판관이나 분배인으로 세웠느냐? …… 너희는 조심하여 모든 욕심을 물리치라. 재산이 아무리 많아도 그의 재산이 그의 목숨을 늘려주지는 못하리라(루가 12, 14~15).
그는 재산분배를 활동의 목적으로 하지 않았고 물질에 대한 욕심을 경계한다. 더구나 재산증대가 삶을 보장하지는 못한다고 한다. 이것은 유물적 사회주의자의 입장을 정면으로 거부하는 말씀이다. 그렇다고 물질적으로 부유하거나 가난한 게 문제가 아니라 모든 것은 오직 마음에 달렸다고 이해할 수도 없다. 부자가 하늘나라에 들어가는 것보다 낙타가 바늘구멍으로 들어가는 일이 쉬우리라고 한 것은 글자 그대로 부자에게 대한 비판의 말이다. 예수는 물질적인 가난을 관심했기에 그 단순한 기도문에 일용할 양식을 구하라고 가르쳤고 부자에게 재산을 가난한 자들에게 나누어주라고 했으며 가난한 자들을 구제할 것을 권고하고 주린 자, 목마른 자, 헐벗은 자에게 한 일을 곧 '내'게 한 것으로 인정한다(마태 25장; 최후심판 비유).
예수는 먹지 않고도 살 수 있는 방법을 가르쳐준 일은 없다. 그는 물질적으로 가난하기 때문에 굶주리며 우는 자에게 마음으로 가난해라, 그러면 하늘나라에 참여할 수 있다고 하지 않았다. 만약 그렇게 말했다면 그 나라는 유심왕국(唯心王國)일 것이다.
'정신의 가난'과 '물질의 가난'을 나누는 것은 성서적 사고가 아니다. 성서의 전통은 '정신'과 '육체'의 구분을 모른다. 유심, 유물 따위의 분류는 성서에서는 생소한 것이다. 단지 성서는 전체로서의 인간을 알 따름이다. 그러므로 가난하거나 아니면 부한 것이지, 그것이 물질적이냐 또는 정신적이냐 따위의 구분을 하지 않는다. 그런 식의 사고방식은 비성서적인 것이다.
가난한 자와 부요한 자의 구분은 그 존재 자체로 규정된다. 그런데 그것은 사회학적인 이해로써 알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오고 있는 새 세계(하느님의 나라) 앞에서 비로소 그 진상이 드러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