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축복과 저주는 '지금'과 '장차'라는 두 세계의 긴장 속에서 내려진 약속과 선언이다. '지금' 가난한 자, '지금' 굶주린 자, '지금' 우는 자, '지금' 박해를 받는 자가 '장차' 하느님의 나라에 참여할 것이며, 그들은 배부르고 웃고 기뻐하게 될 것을 약속했다. 그리고 '지금' 배부른 자, '지금' 기뻐 웃는 자는 '장차' 굶주리고 슬퍼 울게 될 것이라고 한다. 까닭은 그들은 '지금' 이미 받을 위안을 받았기 때문이라고 한다.
그러면 이 '장차'는 어떤 현실인가? 하느님의 나라는 어떤 것인가? 그 문자의 뜻대로 하면 '하느님의 왕국'이다. 그것은 하느님의 주권이 완전히 지배할 미래이다. 그러나 그것이 실제로 어떤 것인지에 대해서는 아무런 설명이 없다. 그러므로 우리에게 그 나라 자체의 청사진을 그리는 것을 허락하지 않는다. 그러나 단 하나 확실한 것은 그 나라는 가난한 자가 참여할 수 있고, 부유한 자에게 닫힌 세계라는 것이다. 이것은 '지금'의 인간의 진상을 폭로함과 동시에 인간이 어떻게 존재해야 할 것인지를 드러낸다.
그 나라는 '영' 또는 '정신의 세계'라는 규정은 구약의 예언자에서부터 예수에 이르기까지 전혀 볼 수 없다. 그렇다고 그 나라는 물질적으로 점점 진화되어 성취될 그런 현실도 아니다. 그러기에 그것은 이른바 복지사회가 아니다.
그 세계는 인간을 전체로서 규제하며, 전체로서만 받아들일 수 있는 세계이다. 그 나라는 사람이 자기 노력으로 더듬어 올라가 도달할 수 있는 현실이 아니라 오고 있는(the comming) 현실이다. 그러므로 전적으로 새로운 가능성이다. 그리고 그것은 인간의 마래이기 전에 하느님의 미래(Zukunft)인 것이다.
사람은 본래 희망에 의해서 현재를 산다. 그러나 희망에는 두 가지 뚜렷한 차이가 있다. 하나는 지금보다 나은 미래에 대한 동경이다. 그런 동경에는 '발전'이라는 생각이 중심을 이룬다. 여기서의 '발전'은 이미 주어진 것들이 이루어내는 점진적인 성취를 뜻한다. 이미 내포되어 있는가능성이 실현되고 완성되는 그때, 그 상태가 여기서 말하는 궁극적인 희망이다. 이러한 의미의 희망은 순수한 새 미래는 아니다. 아무리 풍부한 상상력으로 생각해낸 미래에 대한 희망이라고 할지라도 그것은 여전히 지금의 연장밖에 될 수 없다. 까닭은 그것은 여전히 현재와 꼭 같은 가치관 위에서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또 하나의 희망은 전혀 새로운 미래에 대한 동경이다. 그것은 현재와는 전혀 새로운 미래이기 때문에 거기에는 어떤 상상이 허락되지 않는다. 미래가 상상될 수 있거나 측정할 수 있으면 그것은 벌써 새로운 미래는 아니다. 따라서 이러한 희망에서 사는 사람은 그 미래를 향해 자기를 개방하며 기다리는 길밖에 없으며, 동시에 기존의 어떤 가치나 질서에도 그 절대성을 인정할 수 없게 된다.
예수가 말하는 '오고 있는 그 나라'란 바로 지금의 사람의 영역 밖에 있는 미래, 전적으로 새로운 미래, 지금 안에서가 아니라 밖에서 들어울 미래를 말한다.
"전적으로 새로운 가능성의 세계가 온다!"
이 선포 앞에 가난한 자와 부요한 자의 모습이 폭로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