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라가 임하옵소서."
이것은 주의 기도의 핵심을 이루고 있는 것으로 하나의 기원이다. 이 기원에서 그 나라가 어떤 것인가를 묻기 전에 어떤 사람이 정말 이런 기도를 할 수 있는지부터 물을 필요가 있다. 이런 물음은 사회 심리적 물음이 될 것이다. 그러면 그 대답을 공관복음서 중 특히 루가복음의 자료에서 찾아보기로 한다.
루가복음에만 있는 자료에 기도와 관련된 몇 가지 비유가 있다. 친구를 위해 구걸하는 자(11, 5~8), 애걸하는 과부(18, 1~5) 그리고 바리사이와 세리의 기도(1 8, 9~14)의 비유 등이 그것이다.
이 세 비유는 색다른 세 가지 형의 인간을 그리고 있다. 처음 사람은 밤중에 찾아온 친구에게 저녁밥을 지어줄 수 없을 만큼 찢어지게 가난한 자이다. 둘째 경우는 한 과부다. 과부라면 예나 지금이나 가난하거나 억울함의 상징이다. 이 과부는 우리 번역에 따르면 '원한에 찬' 여인이다. 그런데 원문의 뜻대로 보면 "권리를 뺏긴 여인"이다. 그는 폭력에 의해 능욕을 당했을 수도 있고, 재산을 사기당했을 수도 있다. 셋째는 세리이다. 세리는 민족감정에서 보면 배신자요 반역자다. 그러나 사회적 측면에서 볼 때는 철저히 소외당한 계층의 상징이다.
첫번째 사람은 찾아온 친구에게 먹을 것을 주고 싶으나 한 끼니의 여유도 없을 만큼 가난해서 다른 친구를 한밤중에 찾아가 문을 두드리면서 애원한다. 그리고 저 과부는 불법자에게 저항하기에는 너무도 힘없는 존재이기에 비록 "하느님을 두려워하지 않고, 사람을 사람같이 여기지 않는 재판장"이지만, 그에게 매달려 자기의 한을 풀어달라고 조른다. 한편 세리는 그 사회에서 완전히 소외되어 사람으로 취급되지 않았다. 그는 법정에서 증인 되는 것을 거부당했으며, 그의 선의의 헌금도 거부당하는 비인간적 대우에 고통당하는 자이다. 그렇기 때문에 그는 감히 얼굴도 쳐들지 못한 채 가슴을 치며 "오 하느님, 이 죄인에게 자비를 베풀어주소서"라는 가슴에서 우러나오는 기도를 할 수 있었다.
위의 세 인간은 각기 다른 처지에 있으나 공통점이 있다. 그것은 정말 진정으로 기원할 수 있다는 것인데, 그것은 그들에게 실존적인 고뇌와 요청이 있기 때문이다. 정말 진정한, 그리고 속에서부터의 기도(원)는 인간에게 가장 중요한 것을 뺏긴 자에게만 가능하지 배부른 자, 자리를 잡은 자에게는 가능하지 않다. 그것은 세리와 대조시킨 바리사이인의 기도의 자세가 잘 보여준다. 그는 기도를 한답시고 중얼거리나 그것은 실은 기도가 아니라 자기 시위요, 자기 자랑을 늘어놓는 것이다. 그는 종교적으로나 사회적으로 호화로운 상태에 있기 때문에 참 기도가 불가능했다. 그러므로 '나라가 임하옵소서'라는 기도는 바로 가난하고 눌린 상황에 있는 사람만이 진정으로 할 수 있는 것임을 분명히 해둘 필요가 있다.
그러나 가난하거나 사회에서 어떤 동기에서든지 소외된 약자라면 누구나 나라가 임하기를 기원하는 것은 필연적이라 단정하면 안 된다. 오히려 가난이 그리고 억압아 부와 권력을 갈망하는 이유가 될 수도 있다. 가령 "너희는 오히려 그 나라를 구해라, 그러면 그런 것들을 너희에게 더하여주실 것이다"(루가 12, 1)라는 예수의 말이 있다. 이것은 바로 의식주 때문에 고생하는 계층에게 하는 말로서 그들 이 그런 것에 대한 염려의 노예가 될 수 있는가능성을 전제로 한 경고인 것이다. 가난하기 때문에, 그리고 약한 위치에 있기 때문에 부나 권력 앞에서 위축될 가능성은 얼마든지 있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가난하고 무력한 상태와 하느님 나라를 직결시켜서도 안 된다. 하느님의 나라는 가난의 극복이나 가난과 상반된 현실은 결코 아니다. 그러므로 "먼저 그 나라를 구하라"는 데 머물지 않고 "그리하면" 저들이 염려하는 것이 오히려 풍부하게 주어지리라고 한다. 이러한 사실과 관련해서 주의 기도의 내용을 다시 주목하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