끝으로 그 나라는 어떤 것이냐 하는 물음이다. 그런데 공관서에 전승된 예수의 말씀에서 직접 그 대답을 찾는 것은 불가능하다. 까닭은 그는 그 나라의 도래 앞에서의 인간의 행위 또는 결단을 촉구했지 그 나라에 대한 사변을 허락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비록 그 나라에 대한 여러 비유가 있기는 하지만 하나같이 그 나라 전체를 직접 이야기한 것은 없다. 이것이 묵시문학파의 종말론과 다른 점이다. 그러므로 이런 관심을 추구하려면 다각도로 간접적인 자료를 찾아 접근하는 길밖에 없다. 가령 하느님 나라가 예수의 행태와 불가분의 관계에 있다고 전제할 때 예수의 행태에서 그 나라를 추리해보는 것 등이 그중 하나의 가능성이다. 이 글에서는 그런 시도는 불가능하고, 단지 루가복음 기자가 제시한 한 항목을 제시하는 것으로 그치려고 한다.
루가가 제시한 것은 저 유명한 예수의 선언이다. 그것은 구약을 인용한 것으로 요는 자기는 가난한 자에게 기쁨을, 포로된 자에게 해방을, 눈먼 자에게 빛을, 눌린 자에게 석방을 이루기 위해서 세상에 보냄을 받았다는 것이다. 그런데 이러한 것들도 그 나라 도래 전야에 처리되어야 할 일이라고 볼 수 있고, 그것이 곧 그 나라의 프로그램 자체는 아닐 수 있다고 주장할 수 있다. 그러나 그런 것이 그 나라의 현실과 무관하리라는 단정도 불가능하다. 그 나라가 정말 임하는 것(comming)이라면 어떻게든 역사적 형태를 떨 것이며, 이 역사의 과정에 개입해 들어올 것임이 틀림없는 한, 그 나라는 우리의 기대와 완전히 단절된다고 할 수 없을 것이다. 그런 전제에서 예수의 선언에서의 마지막 말은 비중이 크다. 그것은 "주의 은혜의 해 선포"라는 말이다.
루가에서는 마르코(마태오도)에서 가장 중요한, 예수의 설교가 집약된 "하느님 나라가 임박했다……"는 구절을 뺐다. 그 이유가 무엇일까라고 보았을 때, 루가만이 고유하게 사용한 '주의 은혜의 해'를 선포하기 위해 왔다는 예수의 말씀은 주목할 만하다. 단적으로 말해서 루가는 그 나라를 바로 '은혜의 해'로 대치시키지 않았나하는 것이다. 만일 그런 짐작이 사실이라고 하면, 이 대치된 표현은 우리에게 중요한 열쇠를 던져주는 셈이다.
'은혜의 해'란 다름 아닌 희년을 말하는 것이다. 희년이란 단순히 기쁜 날이 아니다. 그것은 구체적 프로그램을 실현하는 해이다. 그 프로그램은 모든 것의 원상회복이라는 것이 중추적인 정신으로 되어 있다. 즉 노예 해방, 포로 석방, 빚에서의 해방, 편중된 토지의 재분 배, 심지어는 자연(土地)의 회복을 위해서 그 경작을 금지할 정도로 역사가 흐름에 따라 인위적으로 축적된 일체의 비리와 악순환의 요소를 완전히 청산하기 위해서 원상복귀시키자는 것이다.
이것이 구약에 이미 제정된 제도였다. 그러나 그것이 제대로 실현된 일이 없다. 그 까닭은 언제나 가진 자, 강자들이 기득권을 고집하여 그것에 반발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역사는 악순환을 계속했으며 가난한 자는 점점 더 가난해지고, 악한 자는 점점 더 교활해지기만 했다. 이런 긴 한의 역사에 지친 민간 속에서 메시아 대망의 싹이 터서 점점 강렬해졌다. 그 대망이 행동으로 옮겨지거나 그 메시아에 의해서 이루어질 그 나라에 대한 사변이 날로 발달했다. 전자는 민중에게서, 후자는 지식층에게서 발달했다. 그 메시아는 처음에는 패왕적 인간이었다. 그러나 기존세력이 강할수록 문제가 복잡해짐에 따라서 절대능력이 필요하다고 보았기 때문에 메시아는 점차 산격화되었다. 그래야만 기존의 부조리를 깨끗이 청산하고 "정의가 강같이 흐르는 세상"(아모 5, 24)을 구현할 수 있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루가는 바로 예수가 이러한 메시아라고 본 것이다. 그리고 그 나라도 예수가 온 목적과 무관하다고 보지 않았다. 그렇다고 하면 예수가 자기의 사명을 제시한 내용이 그 나라의 성격과 완전히 무관하다는 주장을 하기는 어렵다. 그러나 그 나라를 기존의 어떤 것과 함부로 일치시키면 그것은 또 하나의 우상으로 전락하기 쉽다. 그러므로 그 나라는 유토피아와는 엄격히 구별해야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