첫째, 국가에 대한 새로운 인식이다. 국가는 땅과 직결되어 있다. 그 땅은 기득권의 상징이요, 기반이다. 그러므로 기득권의 많은 나라일수록 국경도 높다. 여기서 땅은 소유의 대상이 아니라는 성서의 기본입장으로, 즉 땅은 하느님의 것이고 너희는 나그네요(ger), 식객에 불과하다는 인식전환운동이 절실하다.
예수의 하느님 나라 선포는 바로 이러한 인식과 밀접한 관계가 있다. 하느님의 나라에는 국경이 존립할 수 없다. "많은 사람이 동쪽과 서쪽으로부터 와서 하늘나라에서 아브라함과 이사악과 야곱과 함께 잔치에 참가한다"(마태 8, 11)고 한다. 이것이 하느님의 나라라고 한다. 이것은 국가초월을 의미한다. 사실상 예수시대는 이미 유다의 배타주의적 민족주의가 발판을 잃은 때이다. 그래도 저들은 토라를 저들의 이데올로기로 고수하려 했다. 반면 이에 대해 예수운동은 이미 국경을 넘어선 새 운동으로 퍼져나갔다. 바울로는 그리스도 안에서 이방인과 유다인, 자유인과 종, 남자와 여자 사이의 담이 헐렸다(갈라 3, 8; 골로 3, 11)고 선언했고, 그 자신은 이방인을 위해 보냄 받은 사도로 자처했다. 이것은 국가주의의 담을 넘어선 선언이다. 국가는 강하면 강할수록 게르를 만든다. 그러므로 동양의 반국가주의자인 노자는 인간의 평화의 길로서 "小國寡民"(『도덕경』 80)이라는 대안을 내세운다.
둘째, 독재자 또는 체제와의 싸움은 정치문제이기 이전에 하느님의 영역을 침범하는 악마와의 싸움이라는 확고한 인식이 필요하다. 루터의 '두 나라설'은 기독교를 세상에 대해 무책임한 집단으로 만들었다. 성과 속을 두부모 자르듯이 잘라내어 속을 만지면 마치 더러운 오물 만지는 듯이, 닭살 돋듯이 거부반응을 일으키게 하고, 성을 만지작거리면서 마치 천국을 소유한 듯이 만족해하는 것을 기독교라고 생각하게 하였다.
그러나 애초에 그런 식의 사고방식은 있을 수 없고 성이든 속이든 이것은 히사의 두 부모, 즉 하느님이 창조하신 세계 안에 있는 것이다.
따라서 정치적ᆞ종교적이라는 구분은 힘있는 자들이 자신의 기득권을 지키기 위해 설정해놓은 철조망일 뿐이다. 오늘 우리가 가져야 할 새로운 인식은 하느님의 나라관(Mono-Yahwism)의 철저화이다. 즉 하느님만이 온 땅의 유일한 주권이라는 선언이다(시편 47, 8; 여호 3, 11 등)
셋째, 어떤 이데올로기도 인간 위에 둘 수는 없다. 예수는 이미 이데올로기화된 토라의 해석에 도전하여 "안식일이 사람을 위해 있지 사람이 안식일을 위해 있지 않다"(마르 2, 27)고 선언한다. 이것은 바로 인간을 노예로 하는 이데올로기화된 종교의 뿌리를 뽑는 선언이며, 인권의 첫 선언이다.
종교는 이데올로기로써 게르를 만드는 데 큰 역할을 하고 있다. 종교다원화 사회에서는가령 그리스도의 절대주의가 다른 것과의 대화의 길을 가로막는다. 그중에서 인격(persona)이라는 사고의 고집은 타종교와의 이해를 가로막는 큰 장벽이다. 정의된 신의 이름을 부르지 않으면 무신론자라는 발상은 서로 함께 살면서 게르가 되게 하는 큰 착오다. 공이나 무를 내세우는 힌두교, 불교 그리고 노장의 사상은 기독교의 교리가 말하는 신앙 이상의 전폭적 신뢰를 의미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