첫째, 예수는 갈릴래아에서 민중과 더불어 행동했고 바로 그들을 위한, 그들의 해방을 위한 것을 그의 사명(Mission)으로 삼았다. 그 민중은 세상에서 소외된 계층인데, 우리의 주제에서 보면 바로 게르이다. 여기서 주목할 것은 십계명에서 안식일법에 노예와 더불어 식객(ger)을 함께 열거하며, 마태오의 최후심판 비유에서는 모든 수난 당하는 민중과 게르를 언급하고 심판자가 그들과 자신을 일치시킨다는 사실이다.
예수 당시 갈릴래아의 이스라엘 사람들은 이스라엘 사람들이면서 유다(예루살렘) 쪽에서 이방땅에 사는 버려진 자들로 취급받았다. 저들은 '죄인'이라고 규정되었는데, 예수는 바로 그 '죄인'들을 위해 세상에 왔다고 선언한다(마르 2, 17).
먼저 민중의 입장에서 민중의 편에 서는 것이 게르가 없는 세계를 만드는 구체적 실천의 초석일 것이다. 그것은 국가주의의 장벽을 없애는 데도 절대 중요하다. 칼 마르크스는 국가 없는 세계의 유토피아를 꿈꾸었다. 그러나 신 없이 폭력으로 강제로 한 것이 그의 치명적인 잘못이다. 그러나 그가 국경을 초월하여 '세계의 노동자'에게 호소한 것은 그리스도와 같은 차원이다.
둘째, 피난민문제는 땅과 직결되어 있다. 저들에게 고향 될 땅을 장만해주어야 한다. 그렇지 않는 한 저들은 언제나 평화를 깨는 원인이 될 것이다. 테러리스트가 되거나 기회만 오면 봉기할 것이다. 고향으로 돌아갈 수 있는 길을 여는 것, 어느 나라의 법적 국민이 되었으면서 사실상 게르가 되어 있는 이들에게 자치지역을 설정해주는 것, 그리고 그런 것도 불가능한 더 많은 수의 피난민에게 땅을 제공할 의무가 있다. 팔레스타인들, 쿠르드족, 중국의 티베트족 그리고 강제로 연방에 묶여 있는 큰 나라 안의 종족들에게 땅을 장만해주는 운동을 펴라!
산상수훈에 "화평케 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땅을 차지할 것이다"라는 말은 중요한 의미를 시사한다. 그것은 평화의 민중은 땅을 차지할 권리가 있다는 뜻도 되겠지만, 그들이 땅을 차지할 때만 이 평화가 올 것이라고 이해할 수 있다.
셋째, 이런 일들을 위해서는 조직이 필요하다. 기존의 유엔이나 WCC를 최대한으로 이 문제에 집중하도록 설득 또는 이용해야 하고 또 개체주의와 종교적 이기주의에 물든 대다수의 교회를 의식화하여 이의 동원에 총력을 기울여야 한다. 교회는 억압적 정부에 대처하고, 또 섬기기 위해 탄생한 단체 아니냐!(마르 10, 42~43)
넷째, 이상의 제안은 거창한 것 같아서 추상적으로 들릴 것이다. 그러나 그렇게 생각되면 예수의 하느님 나라 운동부터 비웃어야 한다. 예수는 "나를 따르려거든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르라"고 했다. 이 말을 통해 우리의 방향은 예수를 따르는 것으로 결정되었다. 그런데 '제 십자가를 지라'는 데서 우리는 꽉 막혀 있다. 더욱이 '예수의 십자가'가 아니라 '자기 십자가'라고 한다. 그런데 우리의 주제에서 보면 피난민문제 해결이 예수를 따르는 길이요, 그것을 위해서 제 십자가를 지는 일이다.
이 일을 위해 교회 안의 소수의 사람들이 지금까지 싸워왔다. 그러나 교회 자체는 그것에 등한했다. 그래서 그들의 활동에는 한계가 있었다. 무엇보다도 경제적 능력이 그 구체적인 것일 것이다. 이 점에서 볼 때 물질적 희생의 각오 없이는 우리의 모든 이론이 공론에 불과하다는 것을 알아야 하겠다.
예수는 경우에 따라서는 "네가 가진 재산을 다 팔아 가난한 자에게 주라"고 했다. 그의 말씀대로 사는 사람들이 있다. 그러나 대다수의 교회에 이것을 요구할 수는 없다.
나는 거창하게 출발한 데 비해 아이러니컬하게도 실천 가능성에 대해서는 오늘의 교회나 크리스천의 상태를 보고 크게 양보하여 다음과 같은 초라한 제안을 한다. 여러분은 애완동물을 해방시켜라! 여러분이 사랑하는 애완동물에게 쓰는 비용은 피난민 여러 사람을 먹여 살릴 수 있다. 나는 구미에서 기르는 고양이가 '6천만'이란 말을 들었고, 저들을 사육하는 비용이 어린이 하나 키우는 것에 맞먹는다고 들었다. 그러면 개는 얼마나 될까? 동물애호를 제발 휴머니즘에 돌리지 마라. 그들의 성대를 수술하고 발톱을 모두 잘라버리면서 그것을 사랑이라고 하는가? 그것은 결국 인간과의 관계를 차단한 고독의 표현 아닌가! 사람에게 관심을 돌리기 위해서도 이런 이기주의에서 해방되어 민중(피난민)을 살리는 일로 돌아서면 그 일에서 큰 몫을 차지할 수 있을 것이다. 이런 제안이 불가능하게 들리는가! 그러면 우리의 할 일은 아무것도 없다.
■ 글은 1991년 10월 8일 스위스의 W.A.R.C.대회의 주제강연 내용임. 원제는 '피란민에 대한 성서적 조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