솔로몬의 타락통치에 하닷(열왕상 11, 14), 르손(열왕상 11, 23) 그리고 여로보암 등(열왕상 11, 26)이 반기를 들었다. 그들의 뒤에는 언제나 절대권력에 반항하는 민중의 의지가 작용하고 있었다. 그 민중은 대부분 이스라엘계로서 농민들이었다.
이미 내적 분열이 가시화되었을 때 솔로몬은 죽으면서 그 왕위를 그의 아들 르호보암에게 넘겼다. 그런데 다윗 때부터 통일이스라엘국이라고 했지만, 솔로몬이 예루살렘을 중심으로 하는 남유다에 치중하고 반북이스라엘 정책을 폈기 때문에 남북간의 내적 분열은 있어왔고, 왕국의 분열은 이미 예견된 일이었다.
왕위를 이어받은 르호보암은 명실공히 통일이스라엘의 왕이 되기 위해 북이스라엘지방의 인심을 살 필요가 있었다. 마침내 북이스라엘지방의 성지인 '세겜'으로 가서 저들에게서 그의 왕권을 인정받으려고 했으나 강경한 거부를 당하여 뜻을 이루지 못하고 빈손으로 돌아와야 했다. 이윽고 솔로몬의 후계자인 르호보암을 거부한 북이스라엘의 민중은 솔로몬왕권에 저항해 온 여로보암을 왕으로 추대함으로써 마침내 통일이스라엘국은 남북으로 분단되고 말았다.
그런데 북이스라엘은 이스라엘의 고대 종족동맹의 본뜻을 계승할 때만 그 의미를 가진다. 민중은 바로 그것을 희구했는지 모른다. 그러나 여로보암은 그런 전통을 살리는 일보다 남유다와의 경쟁에 더 주력했다. 그러한 그의 방향을 이렇게 서술하고 있다.
어쩌면 나라가 다윗의 왕가로 넘어갈지도 모른다. 이 백성이 예루살렘에 있는 야훼의 전에 제사하러 올라가다가 마음이 정통성전인 유다왕 르호보암에게로 쏠리는 날에는 나를 죽이고 유다왕 르호보암에게로 돌아갈 것이다(열왕상 12, 26~27).
이런 경쟁심은 결국 모방을 낳을 수밖에 없다. 그는 예루살렘 성전과 대결하기 위해 또 하나의 성전을 베델에 세웠다. 그러므로 결국 다윗왕가가 종교를 왕권 수호를 위한 이데올로기로 삼은 것처럼 여로보암도 에집트를 탈출하여 광야에서 전진하는, 선봉에 선 신의 상징인 법궤의 정신을 버리고, 하느님을 기득권 옹호의 수호신으로 만들려고 한 것이다. 이 여로보암의 실책은 솔로몬의 반민중적 정책에 못지않게 큰 것이다. 이러한 민족적 분단은 종교를 이데올로기로 함으로 더 심화되어 통일의 가능성은 멀어져만 갔다. 이러한 분단상황에서 민중을 대변하는 예언자들은 자기의 소속을 상관하지 않고 남 또는 북에서 왕권과의 격렬한 투쟁에 앞장섰으며, 그중의 일부는 이른바 '불구원의 예언자'라는 별명이 붙을 만큼 왕권을 저주하고 영원히 망할 것을 예고 했다. 그것은 신과 더불어 민중을 배반하는 정권 이유지하는 나라라면 차라리 이 땅에서 영원히 자취를 감추는 것이 옳다는 냉엄한 판단 때문이다.
이 분단시대에 남북 왕국은 신흥제국들에게 침략당할 뿐 아니라 대거 포로로 잡혀가는 비극을 거듭 당했다. 그러므로 전쟁의 와중에서 팔레스틴내의 이스라엘 사람들은 고향을 떠나서 사면으로 흩어져 에집트의 알렉산드리아 시를 위시해서 소아시아 일대는 물론 유럽 일부에까지 퍼져나갔다. 메소포타미아, 하골, 고산, 그발 강 주변 그리고 텔아비브 등이 그런 곳들이다. 이스라엘의 마지막 점령국이며 이스라엘의 주권을 완전 박탈한 로마시대에는 자그마치 80여 개국의 400여 만 명이나 고향 없는 민중으로 배회했다는 기록이 있다. 이렇게 글자 그대로 저들은 고향을 잃은 민중이 되어 생존을 위한 싸움을 계속해야만 했다. 자기 부족을 떠나고 본거지를 잃은 당대인들은 누구를 막론하고 생명보장을 받을 수 없는 민중이 될 수밖에 없었다.
결국 저들의 운명은 완전 국권상실이라는 비극으로 끝났다. 북이스라엘은 민중에 의한 공동체 정신과 군주제 사이를 갈팡질팡하는, 힘없는 정권이 이끌고 있었기 때문에 계속 정변을 겪다가 B.C. 721년에 멸망하고, 남유다국은 다윗의 이름을 팔아 군주국가적인 뿌리를 내린 탓으로 비교적 정변은 덜 겪었으나 민중의 지지를 받지 못하였고 외세의 침략을 거듭 받으며 가느다란 목숨을 이어가다가 B.C. 586년에 멸망하고 그 다음은 세계제국들의 판도 안에서 속국으로 연명해야 했다.
이러한 와중에서 남유다에 잔류한 상부층은 괴뢰정부를 청부받아 침략국의 앞잡이 노릇을 하거나 저들과 철저히 야합함으로 자신들의 입지를 지켜나가는 데 급급했지만, 이 틈에서 정치ᆞ경제적으로 이 중의 고통에 신음하고 있는 민중은 이 민족의 명맥을 이어가는 데 결정적 역할을 했다. 그중에 두 가지 중요한 사실을 지적해야 할 것이다. 하나는 그들이 어디로 가든지 가능한 한 거주지를 함께했으며, 그 중심에 시나고게(συναγωγή, 회당)를 설치하여 주기적으로 동족과 만날뿐 아니라 이스라엘의 뿌리인 토라(경전)를 함께 배우고 풀이했다는 사실이다. 또 하나는 그들의 조상들에 관한 전설이나 말들을 입에서 입으로 전하여 후에 문서화할 수 있는 기초를 다지었다는 것이다. 즉 이러한 내용들이 합쳐져서 마침내 성서를 이루게 했던 것이다. 이것은 저들의 주체성을 이끄는 데 결정적 역할을 했다. 그런 탓에 이스라엘을 '한 책의 민족'이라고 한다. 성서가 대부분 이야기 형식으로 된 것은 그 바탕이 민중에 의해 전승된 것임을 나타낸다. 이 전승이 다윗왕권의 어용사가들에 의해서 왕권사적 색채에 물들었음에도 불구하고 그 바탕에 흐르는 민중의 애환과 희망 그리고 강인한 투지는 간과할 수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