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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 민중운동의 여러 계열

에집트, 바빌론, 페르샤, 그리스, 로마 등 역대의 신흥제국에 의해서 이스라엘 전체가 유린과 착취를 계속 받아오는 동안에 민중운동도 기진했던 탓인지 어쨌든 예수 전 약 200년 동안은 저들의 운동에 대한 아무런 흔적이 없다. 사람들은 이 기간을 예언자의 소리가 그친 때라고 하는데, 예언자란 '도사'같은 유형이 아니고 어디까지나 민중에게 떠받들려, 또는 민중의 열망을 감지하고 일어선 대변인들이었기 때문에 저들의 자취가 보이지 않는다는 것은 곧 민중운동의 상태를 반영하는 것이기도 하다. 그러나 민중은 동토에 묻혀 죽은 듯했으나 봄을 기다려 봉기할 준비를 했음에 틀림없다.

셀류커스왕조 산하에 있을 때 예루살렘 서북부에 위치한 작은 마을 모디엔에서 안티오쿠스를 위한 축제를 준비하려고 지배세력의 관원이 나타나, 이미 예루살렘의 타락상을 거부하고 여기에서 은둔생활을 하고 있는 사제 출신 마따디아(Mattathias)를 내세워 안티오쿠스를 위한 그 제의에 유다인들을 굴복시키려고 했다. 이에 분개한 그는 그 관원을 죽이고 아들 다섯 명과 입산하면서 "우리 조상들의 전통과 하느님을 경외하는 자는 누구라도 나를 따르라"고 외쳤는데, 이것이 잠자는 듯하던 민중이 봉기하는 계기가 되었다. 이로써 치열한 독립전쟁이 전개됐는데, 본격적인 전투는 마따디아의 아들로서 일명 마카베오라는 별명을 가진 유다가 전투를 지휘함으로써 시작되었다. 그것이 B.C 166년인데 다섯 아들들이 뒤이어 순사한 형제들의 지휘봉을 계속 인수받으면서 사두한 결과 B.C. 142년에 비로소 예루살렘을 탈환하여 독립국가임을 선포하게 되었다. 거의 500년간의 망국의 한을 씻은 셈이다. 그런데 그 주역은 물론 마따디아의 가족들이 아니라 민중이었다.

이 독립전쟁에 정신적으로나 전투에 있어서 큰 역할을 한 신앙그룹이 있었는데, 그들을 일러 '하시딤'(Hasidim)이라고 했다. 이 하시딤의 주동은 사제계층이다. 이들은 외세와 타협하여 자기의 혼을 판 예루살렘의 종교귀족을 위시하여 기득권자들의 부패상을 용인할 수 없어서 탈예루살렘하여 내일을 기약하면서 칼을 갈고 있던 집단이었다. 이 하시딤은 민중에게 많은 신뢰와 호응을 받은 것으로 보이며 마따디아도 이 그룹과 연관이 있었을지도 모른다. 이 은둔자들이 독립전쟁의 승리를 가능하게 한 것이다. 저들은 예루살렘을 탈환하자 외세에 의해서 더러워지고 많은 피를 흘린 성도 예루살렘을 정화하는 기간을 정해 8일 동안 축제를 벌였다. 그만큼 저들은 낡은 것을 철저히 없애버리고 새로운 출발을 기약했던 것이다.

그러나 권력은 사람의 손에 들어오면 썩는다. 마카베오 일가도 권력에 맛을 들이면서 변질되기 시작했다. 저들은 판도를 확대하는 전쟁을 계속했고, 마침내는 민중의 뜻을 거슬러 왕권을 수립했는데, 그것이 이른바 하스몬(Hasmon) 왕가다.

이 왕가는 다윗왕권의 재건이라는 것 외에는 다른 이념이 없었다. 그렇다고 해서 다윗왕조와 같은 완전독립의 강대국이 되지도 못한 채 집안에서 권력싸움이 일어났다. 이 꼴을 차마 볼 수 없었던 '하시딤'은 또다시 실망과 비애를 안고 탈예루살렘하여 광야로 나가서 은둔생활을 해야만 했다.

이들의 영향을 받은 집단은 많았다. 그러나 저들은 여러 갈래로 나누어졌다. 그중에 하시딤과 가장 유사한 길을 걷은 집단이 에쎄네(Essene) 파이다. 저들도 예루살렘을 떠나서 광야에서 은둔적 공동체생활(Arkandisziplin)을 했다. 사가들은 저들을 공산주의 공동체의 원조라고도 한다. 그 구성원들은 하시딤의 경우처럼 반체제적 사제계층이었다. 저들도 물론 이스라엘 민중과 시대적 호흡을 같이하고 있었다. 그러나 저들의 은둔 생활양식은 어쩔 수 없는 민중과의 거리를 조성했다. 민중은 생존하기 위한 싸움을 했지만 저들은 지나칠 정도로 미래지향적이면서 보수적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대 로마전쟁 막바지에는 민중의 항전에 합류하여 전원 산화함으로써 민중과 운명을 같이했다.

에쎄네의 은둔생활 주장에 대해서 바리사이파는 다른 길을 걸었다. 저들도 하시딤에게서 무엇보다도 신학적으로 결정적인 영향을 받았으나 에쎄네와는 그 투쟁방법을 달리했다. 그것은 은둔의 길 대신 현장에서 목적을 실현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그러므로 저들은 토라와 예언자들, 나아가서는 저명한 라삐들의 전승까지 망라해서 행동지침을 만들고, 그것들을 통해서 국민운동을 벌이기로 한 것이다. 저들은 자신들을 '구별된 자'(Perrschin)라고 명명했듯이 엘리트의식이 강했다. 저들은 사제계층은 아니었다. 그 대신 저들은 저들의 지도력에 권위를 세우기 위해서, 그리고 운동 자체의 이념을 위해 율법연구를 게을리하지 않았다. 그들의 영향은 당대의 중산층 이상에게는 막대한 것이다. 그러므로 당연히 하스몬왕가와의 충돌을 가져왔는데, 알렉산더 얀나이(Yannai, B.C. 103~76년 재위)왕 때에는 6년간 크고 작은 충돌이 계속 일어났다. 그러나 그가 죽은 다음 왕위를 이은 그의 아내 알렉산드라 때에 그들의 주장이 수용되어 저들은 비판세력에서 여권으로 변신한 뒤부터 체질이 바뀌기 시작했다. 그러나 저들의 영향은 예루살렘 성전이 파괴되고 주권이 완전 박탈된 후에도 계속 강화되어 새로운 민중운동인 예수의 민중과 충돌했다.

정신적으로 같은 뿌리를 가졌다고 볼 수 있는 또 하나의 운동이 있었다. 그것을 일러 젤롯당이라고 한다. 젤롯당은 B.C. 6년 로마제국이 유다 지방에서 증세(增稅)를 위한 인구조사 실시에 항거하는 운동이 발단이 되어 이루어졌다고 하나, 실은 갈릴래아 일대에 그들의 역사와 정치경제적 조건에 의해 거덜난 민중의 원한이 하늘을 찌르던 것이 폭발되었으며 저들이 바로 그때를 자신들의 집단 결성의 계기로 삼은 데 불과하다. 기록으로 남은 것은 로마세력에 밀착되어 권력을 행사하던 '안티파터'의 아들 헤로데 안티파스가 젊은 나이에 갈릴래아 지방의 집정관으로 군림할 때 민중은 거세게 봉기했다는 것이다. 에스키아(Esekia)가 그 선두에 나섰다. 그러나 그는 헤로데에게 생포되어 잔인한 처형을 당했다. 그러나 그 민중운동에 오래 버틸 수 없었던 헤로데는 로마로 망명했다. 이때 에스키아의 뒤를 이어 율사 '욱다스'와 '마타디아'가 조용히 동지를 규합하고 투사를 훈련시킨다.

한편 헤로데는 로마로부터 국토 없는 왕으로 임명되어 팔레스틴 전역의 어용 왕으로 재침입했다. 그러나 그의 군사력과 통치방법이 강력해서 민중봉기가 불가능했는데, 그 헤로데가 죽었다는 뜬소문과 함께 성전 앞에 헤로데가 만들어 단 황금독수리를 쳐부숨으로써 저들은 다시 투쟁의 불길을 일으켰다. 그러나 사실은 살아 있는 헤로데가 군대를 이끌고 저들을 진압하기에 이르고, 그 두 사람과 그의 추종자들은 대거 생매장되는 참변을 당해야만 했다. 그러나 민중은 이에 굴복하지 않았다.

로마가 징세를 위한 인구조사에 착수했을 때(A.D. 6년), 그때의 대사제였던 '여호아살'이 로마의 앞잡이로 국민에게 인구조사에 응할 것을 호소하는 데 반해, 민중은 다시 이에 저항, 봉기했다. 저들은 바리사이파의 좌파에 속했던 가말라(Gamala)의 유다스(일명 갈릴래아 사람)와 사독(Zadok)을 앞장세웠다. 그러나 저들의 소속으로 보아 바리사이파가 주도했다고 보는 견해는 옳지 않다. 바리사이파는 세금납부에 반대하지 않았고, 헤로데가 로마법과 그 통치권에 복종한다는 서약을 강요할 때 에쎄네파 등은 끝내 이를 거부한 데 반해 바리사이파는 벌금으로 서약을 대신하는 등 미온적 태도를 취했기 때문이다.

한편 세금정수의 영역은 유다 지방이었고 저들의 거점은 세금정수의 영역이 아닌 갈릴래아였다는 것은 그 봉기가 납세 반대에 국한한 것이 아니었음을 입증하는데, 오히려 저들은 자신들의 봉기를 통해 납세의 대상으로 인구조사를 받아야 할 유다 지방의 민중의 호응을 기대했다고 보는 것이 옳을 것이다.

그 투쟁이 전투적이었음은 저들이 먼저 갈릴래아의 수도 세포리스를 공략한 데서 엿볼 수 있다. 세포리스는 당시에 병기고가 있었던 곳이었다.

그 구성원으로 한때 이 싸움에 가담했다가 변절한 요세푸스는 저들을 "자기 생존을 위한 강도떼"라고 하고, 어떤 자료는 저들을 비천한 기층민중으로서 직업은 없거나 아니면 옷 만드는 자, 신발 만드는 자, 또는 단순한 심부름꾼이었다고 하는데, 그 중심은 우리나라의 동학혁명의 경우처럼 농민들이었다.

갈릴래아 지방은 비교적 비옥했기에 많은 농민들이 밀집해 있었으나 땅은 대부분 부재지주의 것이고, 저들은 소작인이 되거나 관리자였고, 그것도 극히 제한되었기에 결국 갈릴래아의 농민들은 거덜난 땅 없는 농민이 되어 산으로 몰려들었다. 그리고 거기서 사정이 비슷한 사람들끼리 모여 봉기를 일으킨 것이다. 그러므로 어떤 사상으로 무장했다기보다는 생존을 위해 일어섰다고 보아야 한다. 그러나 저들에게는 한 가지 공통점이 있었다. 그것은 저들은 역대의 폭군들에게 시달려왔기에 어떤 형태의 군주제도 반대한 점이다. 그리고 오직 하느님만이 우리의 주권이어야 된다는 신념을 가졌다. 이것이 바로 '하느님 나라' 대망인데, 그것은 하느님만이 우리의 주인이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 투쟁도 비참한 결말을 가져왔다. 로마의 막강한 무장군인을 당해낼 수는 없었던 것이다. 2천 명 이상이 로마군에 의해 십자가에 처형되었다는 기록이 그 투쟁의 처참성을 잘 말하고 있다. 그러나 민중은 굴복하지 않았다. 저들은 갈릴래아 산악지대에 집결하여 재기를 위해 칼을 갈았다.

그런데 악명 높은 네로 황제 때부터 이 민중의 분노는 고조됐다. 그 첫 계기로서 그리스인들과 유다인 사이에 종족분쟁이 일어났을 때 로마정권은 그리스인들 편에 섰기 때문이다. 이에 반항하는 유다인에게 로마군은 무자비했다. 특히 A.D. 66년 5월에만도 예루살렘에서 천민들이 반로마시위를 계속했다. 결국 봉기운동이 거세지자 로마는 '티투스'를 사령관으로 하여 6만의 군대를 파견했는데, 우선 갈릴래아 지방을 겨냥했다는 것은 여전히 그 지방이 민중봉기의 거점이었음을 말해준다.

한편 갈릴래아의 '의병'들은 로마군의 무력에 밀려서 유다 지방 예루살렘으로 이동했다. 그들이 예루살렘에 입성하자 관청에 있는 채무장부부터 불태워버렸다는 것을 보아 저들은 경제적으로 예루살렘에 예속되었으며, 저들의 봉기의 중요한 동기가 경제적 생존권에 있었음을 나타낸다. 많은 우여곡절 끝에 결국 A.D. 70년 8월 10일에 예루살렘 성전이 불타고 저항자들은 체포되어 사실상 이스라엘은 완전 멸망하는 사태를 맞았다.

젤롯당의 일부는 그래도 굴하지 않고 도처에서 산발적으로 전투를 벌였는데, 그 일부는 저 유명한, 헤로데에 의해 세워진 요새인 마사다에 집결해 싸우다 모두 자결했으며 일부는 에집트로 망명해 계속 싸웠는데, A.D. 132~135년에 바르 코흐바(Bar-Kochba)가 거느리는 한 패가 최후 한 사람까지 장렬하게 전사한 것으로 젤롯당의 이름은 역사 속에서 영영 사라졌다.


List of Articles
바알 (열상 19, 18)
남은 칠천 명 (19, 7-18)
민중의 손으로 통일되는 날 (아모 9, 11-15)
겨울은 가고 (에제 37장)
에제키엘이 무등산에서 절규한다 (에제 24, 6-8)
포로에서의 탈출 (이사 66, 1-8)
위정자와의 대결 (이사 7, 10-14)
   
제5부 새로운 존재
일상성과 비일상성 (루가 10, 38-42)
그래도 다시 낙원에로 환원시키지 않았다 (창세 3, 1-10)
새로운 인간상 (창세 12, 1-9)
믿음의 조상 (창세 22, 17-18)
두 사이 에 손을 얹을 판결자 (욥기 9, 25-35)
하느님으로부터의 도피 (시편 139편)
하느님의 웃음 (시편 2편)
잠과 신앙 (시편 127편)
교회란 무엇인가 (로마 8, 9-30)
인간을 말한다 (마르 12, 28-34)
존재 근거 (시편 42편)
우주의 품으로 (시편 8,3 이하)
   
판권
표지
예수의 민중사건 : 『민중과 성서』를 내면서
   
제1부 복음서와 민중
   
예수와 민중 : 마르코복음을 중심으로
    1. 전제
    2. 마르코복음 안의 오클로스
    3. 마르코복음에 나타난 오클로스의 성격
        1) 오클로스의 성격
        2) 오클로스에 대한 예수의 행태
        3) 종합
    4. 예수를 따른 자들
    5. 마르코복음 안에 있는 어록
    6. 오클로스의 언어학적 의미
        1) 라오스와 오클로스
        2) 오클로스와 암 하 아레츠
    7. 종합
마르코복음에서 본 역사의 주체
    1. 전제
    2. 마르코의 삶의 자리
    3. 마르코의 민중신학의 기조
        1) 세례자 요한이 잡힌 후(14a절)
        2) 갈릴래아로 가다
        3) 하느님 나라의 도래 선포
    4. 민중의 행태
예수사건의 전승 모체
    1. 문제 제기
    2. 케리그마의 성격
        1) 고린토전서 15장 3~8절
        2) 필립비서 2장 6~11절
        3) 사도행전에 나타난 케리그마
    3. 민중언어의 성격
    4. 수난사
    5. 예수의 행태 일반
        1) 기적 이야기와 예수의 행태
        2) 아포프테그마와 예수의 행태
        3) 로기온(Logion, 어록)과 예수의 행태
    6. 결론
가난한 자 : 루가의 민중 이해
    1. 가난한 자
        1) 통계적 고찰
        2) 루가의 특수자료
        3) 예수의 탄생설화와 나자렛 선언
        4) 마르코와 Q자료
    2. 루가복음서의 청중
    3. 결론
마태오의 민중적 민족주의
    1. 문제 제기
        1) 마태오의 신학적 주제에 대한 논의들
        2) 문제 제기
    2. 마태오가 처한 현실
        1) 마태오와 그의 시기
        2) 민족적 와해 위기
    3. 마태오의 현실인식
        1) 이스라엘 : 길 잃은 양들
        2) 길 잃은 양이 놓여 있는 현실
    4. 민족동일성 재확립
        1) 뿌리 찾기
        2) 바리사이파가 주도하는 라삐 유다교와의 대결
    5. 마태오의 민중 이해
        1) 언어적 성격
        2) 의식화된 민중
    6. 맺는 말
민중신학의 성서적 근거 : 마르코복음을 중심으로
    1. 예수사건의 재발견
    2. 마르코복음과 민중
    3. 민중은 수단이 아니다
    4. 민중은 객체일 수 없다
    5. 십자가는 민중수난의 극치다
민중신학의 어제와 오늘
    1. 독재와 대항하므로
    2. 민중을 만나므로
    3. 민중과 더불어
   
제2부 민중운동사
   
민중사건과 언어사건
    1. 성서에서 본 말의 성격
        1) 그 말의 현장은 어떤 것이었나
        2) 예수의 경우
        3) 예수사건에 관한 전승
        4) 오순절의 말 사건
    2. 무엇으로 말하는 것인가
    3. 해야 할 말은 무엇인가
    4. 우리가 해야 할 말
미래는 가난한 자의 것 : 루가 6장 20~26절
    1. 축복과 저주
    2. 가난한 자와 부요한 자
    3. ‘지금’과 ‘장차’
    4. 우리의 선택
나라가 임하옵소서
    1. 예수의 기도
    2. 그의 기도를 전달받은 자들
    3. 하느님의 나라
고향 잃은 민중
    1. 피난민
    2. 성서에서 본 피난민문제
    3. 게르(GER) 문제 해결의 시도
    4. 이방인에 대한 관용의 한계
    5. 당면한 과제
        1 ) 새로운 인식을 위한 운동
        2) 실천에 대한 몇 가지 제언
이스라엘 민중사
    1. 머리말
    2. 출애굽
    3. 고대 이스라엘 종족동맹
    4. 민중을 배반하고 세워진 왕권
    5. 분단시대의 고난
    6. 민중운동의 여러 계열
    7. 예수의 민중운동
    8. 맺는 말
   
제3부 민중과 체제
   
민중사실의 증언
    1. 민중신학의 전제들
    2. 민중사실의 증언
고난과 고백
    1. 수난자와의 일치
    2. 마르코의 민중
    3. 수난사와 고난
    4. 더불어의 고난
    5. 맺는 말
갈릴래아 민중에 항복한 바울로
    1. 바울로의 위치
    2. 사울은 어떤 사람인가
    3. 그리스도교 박해
    4. 예수를 만남
    5. 전향
    6. 맺는 말
소명(召命)
    1. 바울로의 소명
    2. 사도 됨과 소명
    3. 이방인에게로
바울로와 역사의 예수 I
    1. 머리말
    2. 예수에 대한 바울로의 말
    3. 예수냐 바울로냐
    4. 왜 예수가 아니고 케리그마인가
선택받은 민중: 고린토전서 1장 26~31절
    1. 고린토교회 구성원의 사회계층
    2. 공동체원의 가치 판단 기준
    3. 민중을 보는 눈
    4. 택함을 받은 민중
   
제4부 예수의 희망
   
하늘도 땅도 공(公)이다
    1. 낙원 이야기
    2. 아담一인간
    3. 실락원은 공을 사유화함으로
갈릴래아에서 만나자: 마르코 16장 1~8절
    1. 제3의 자리
    2. 갈릴래아
    3. 갈릴래아에서 만나자
예수의 희망
    1. 새 세계에의 희망
    2. 희망과 세계혁명
    3. 바른 인간공동체의 희망
    4. 맺는 말
   
판권
표지
예수는 논하지 않았다
   
제1부 민중의 언어, 이야기
   
1. 성서라는 책의 성격
2. 성서의 서술양식
    1) 구약성서
    2) 신약성서
    3) 민중언어
   
제2부 예수의 이야기(비유)
   
1. 만성병에 걸린 세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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