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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민중신학의 전제들

1) 민중신학은 대학 연구실에서 성립된 것이 아니다. 역사의 현장에서 이루어졌다. 성서학에서 성서가 형성된 장은 '삶의 자리'(Sitz im Leben)라고 하는데, 민중신학은 한국의 '삶의 자리'에서 형성되었다. 그 삶의 자리는 한국사가 제시하고(이 점에서 함석헌 선생의 『성서적 입장에서 본 한국 역사』는 탁월한 선구적 증언서이다), 특히 지난 10년간 경험에서 얻은 것으로서 고난의 장이다. 그러므로 민중신학의 산실은 고난이다. 그러기에 그리스도교인들이 고난의 현장에서 민중을 만난 것과 민중신학 형성은 직접적 관계가 있다.

2) '민중'이 무엇이냐는 질문이 계속되고 있다. 그러나 그런 질문은 '정의'부터 한다는 학문적 관심을 표현하는 것이고 또 대화를 위해서 어떻다고 '정의'를 내리는 것이 필요한 것도 인정하지만, 그런 '정의'를 쉽게 내리는 일은 의식적으로 피한다. 까닭은 정의를 내리게 되면 쉽게 사변에 말려들고 서구적 논리의 틀에 맞출 것을 강요받게 되므로 마침내는 민중을 다른 학문의 대상처럼 객체화하게 되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런 과정을 통해서 민중의 실체가 조작되고, 그것과 상관없는 지성의 사변의 자료로 전락해버리는 것이 거의 필연적이라는 견해를 갖고 있기 때문이다.

민중을 아는 길은 민중과 더불어 사는 길이 가장 첩경이며, 그렇지 못할 경우에는 자신을 민중과 일치시키는 입장에 서서 그의 입과 손이 되려는 노력이 민중을 알려는 자세로서는 가장 바람직하다고 본다. 이러한 자세가 학문적이 될 수 있느냐고 묻는다면, 민중신학은 학문적으로 인정받기 위한 노력보다는 '증인'이 되는 것을 우선의 임무로 하기 때문에 별로 대답할 것이 없다. 이것은 학문일 수 없다면 학문을 포기해도 좋다는 자세이다.

민중은 관조의 대상이 될 수도 없거니와 그래서도 안 된다. 민중은 산 실체이다. 그러므로 민중 스스로 자신을 말하되 그의 표현방법대로 말한다. 따라서 민중을 알려는 자는 바로 그 표현방법(그들의 언어)에 따라 그를 파악하는 길밖에 없다.

3) 민중신학은 신학적으로 어떤 계보에 속하느냐는 물음에 대해서는 '하느님의 선교(missio Dei)의 신학'이라고 한다. 라틴아메리카에는 '해방의 신학'이 있고 서구에는 '정치신학'이 있는데, 그들 사이에는 공통점도 있으나 동시에 근본적 차이가 있다. 그것은 저들의 '삶의 자리'가 각각 다르기 때문에 나타난 결과이다. 자기 역사의 장에 충실하면 비록 같은 방법 아래서도 다른 결론이 나오게 된다. 사람들 중에는 민중신학이 정치신학이나 해방신학을 반복하는 것이 아니냐고하는 사람들이 많으나 우리는 그것을 부정도 긍정도 하지 않는다. 까닭은 그것이 어떤 면에서는 공통점이 있을 수도 있고 또 다른 점도 있을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우리 자체가 정치신학 또는 해방신학을 한다는 전제에서 민중신학을 운위하는 것은 아니라는 것이다. 솔직히 말해서 아직은 그런 것들과 어떤 차이가 있느냐를 물을 겨를도 없었거니와 아직은 그런데 주력할 만한 흥미도 없다. 다만 우리는 우리의 '삶의 자리'에 진실해보자는 첫발을 내디딘 것뿐이다.

그런데 '하느님의 선교의 신학'을 전제로 한다는 것은 민중신학을 기초하는 데 필요불가결하다. '하느님의 선교'에 꼭 신학이라는 이름을 붙이지 않아도 좋다. 요는 '하느님의 선교'라는 새로운 표현은 그리스도교 역사에 줄기차게 나서는 반교권주의, 반제도적 교회주의를 대변하고 있다는 점이다. '교회 밖에 구원이 없다'는 주장은 제도 저 교회를 만드는 데 박차를 가했을 뿐만 아니라, 구원의 사건을 제도적 교회가 독점하는 결과를 가져왔다. 즉 교권자들은 자신들의 권위를 위해 이 신주장을 교리화하였던바 결과적으로는 세계창조의 주, 역사의 주인으로서의 하느님신앙을 사실상 거부한 꼴이 되고 말았다. 이 싸움은 원래 유다교 대 그리스도교의 싸움이었는데, 강대한 사회적 세력이 된 교회 안에서 다시 이 싸움이 재연되었던 것이다.

즉 역사의 신(神) 야훼가 다윗솔로몬 왕조에 의해 세워진 성전에 '감금'됨으로써 결국 다윗왕조의 이데올로기로 전락했기 때문에 예언자들의 분노가 있었으며, 결국 그리스도교에 와서는 그런 성전은 돌 위에 돌 하나 놓이지 않고 다 무너져야 할 것을 절감했다. 그런 입장이 요한복음에 "이 산 위에서도 아니요 예루살렘에서도 아닌데서 너희 아버지께 예배드릴 때가 올 것이다…… 지금이 그때이다"(4, 21~23)라고 뚜렷하게 표현되어 있다.

하느님의 선교의 장은 이 역사요 세계이다. 교회는 그 역사와 세계의 한 부분으로 있을 따름이다. 이것은 구약에서 예수에게 이르는 참 하느님이 활동하는 장이다. 구약의 야훼는 역사의 주이다. 그런데 이미 언급된 대로 예루살렘 성전에 감금되어 제사의 대상이 되며, 라삐 유다교의 교조주의에 포로로 사로잡혀 있었던 것이다. 그러므로 예언자들은 "하느님은 제사를 기뻐하지 않고 자비를"이라는 말을 슬로건처럼 반복한 것이다. 사실상 하느님은 그런 것 안에 갇혀 있을 수 없다. 그런 뜻에서 구약의 하느님은 바로 '하느님 선교'의 그 하느님인 것이다. 그리스도교에 와서 유다교의 그 성전과 제사의식은 깨진다.

그러므로 민중신학은 이른바 '말씀의 신학', 특히 변증신학 이후에 운위되는 케리그마 신학에서 계승된 신학의 주장과는 의식적인 거리를 둔다. '말씀의 신학'은 하느님의 행위를 '말씀'으로 파악하고, 현실적으로는 교회의 설교의 현장만이 하느님의 뜻을 경험하는 장이라는 결론에 머물고 있다. '말씀의 신학'에서 주장하는 "교회의 설교에만 현재한다"는 말은 그 강조점을 교회의 '제도'보다 '말씀'에 둔 듯하지만 여전히 재래의 교회론에 근거를 두고 있다. 그러나 하느님은 '말씀, 설교'에서만 활동하며 현존하는 것이 아니라 역사의 사건으로서 활동한다. 즉 역사적 사건에서 하느님의 활동을 보는 것이 본래적인 성서적 입장이다. 이 점에서 '사건의 신학'은 하느님의 선교를 아는 측면에서 강조한 것이며, 동시에 민중신학의 기초이기도 하다. 나는 필립비 1장에 나오는 바울로의 투옥사건에서 뜻하지 않게도 이 투옥사건을 통해서 '복음의 전진'이라는, 하느님의 선교가 이룩되고 있다는 바울로의 증언에 주목하고 명상적인 몇 편의 글을 썼다.

4) '하느님의 선교의 신학' 그리고 그것을 내 나름으로 재파악한 '사건의 신학'이 자기 게토에서 풀려나와 민중을 만날 수 있는 큰 작용을 하였다. 그리고 한편으로는 그 고난과 애환을 단순히 일차원적으로 경험하고 참예하는 데 그치지 않고 거기서 하느님의 활동, 그의 소리를 들을 수 있는 귀를 마련해주었다. 민중을 만나는 일에서 특수한 교리로 세뇌된 신학도는 많은 장애물을 만날 수 있다. 즉 민중을 만나기도 전에 '교리'라는 렌즈를 통해서 사전에 가치를 판단해버림으로써 민중의 새로운 가능성에 대해 폐쇄적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 이에 대해서 오히려 그런 특수한 도그마적 전제가 없는 사가나 또는 민속학 내지 문학인들에게는 민중을 만나는 일이 쉬울 수 있다. 민중을 발견하고, 민중을 역사의 주체로 파악하고, 민중의 혼이 사장되거나 구전형태로나마 있는 것을 찾아내는 작업이 이미 진행되고 있는데도 신학계가 오히려 뒤처진 것은 바로 그러한 이유 때문이었을 것이다. 아무튼 민중발견은 신학자들의 전유물이 아니고 오히려 다른 계통의 작업에서 많이 배운 것이다. 그러나 그렇게 배운 것을 그대로 반복하거나 그런 작업의 일익을 담당하는 것이 신학의 과제가 아니다. 신학은 민중의 소리에서 하느님의 역사를 보고 설명할 때에야 비로소 제 일을 하는 것이다.

5) 신학한다는 것은 어원상으로는 신을 말하는 것이겠지만, 신은 언어영역에 잡히는 대상이 아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신학하는 것은 현존의 그리스도를 묻는 작업이라고 단정한다. 그것은 바로 역사의 물음과 불가분의 관계에 있다.

여기서 현존의 그리스도란 지금, 여기 어떤 모양으로 그리스도가 현존하는지 그 존재양식을 묻는 일이다. 어제의 그리스도나 예배의 대상인 그리스도가 아니라 현장의 그리스도이다.

그러나 민중신학은 먼저 그리스도가 무엇이냐는 물음에서 출발한 것이 아니라 먼저 '수난의 민중'을 만났고, 그 참모습과 현실을 이해하는 데서 출발했다. 그리고 바로 이 민중의 현장에서 현존의 그리스도를 경험하게 된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현존의 그리스도 경험은 주관적 기호(嗜好)가 아니라는 것은 성서의 강력한 뒷받침에 근거한 것이라고 확신한다. 그중에서 자주 동원된 두 가지만 예거한다.

첫째는 마태오복음 25장의 저 유명한 세계심판의 비유이다. 여기서 심판자는 '인자'라고 이름붙은 메시아이다. 그런데 그는 심판의 기준으로서 교회가 설정한 모든 교리적 조건을 배제하고 뜻밖에도 다른 기준을 내세운다. 즉 주리고, 목마르고, 떠돌이 신세(나그네)가 되고, 헐벗고, 병들고, 감옥에 갇힌 가장 적은 자(민중)들과 자신을 일치시켜 바로 저들에게 행한 행위를 심판기준으로 삼는다. 그리고 바로 그같은 수난자들과 심판자 자신을 일치시킴으로써, 저들이 그때까지 바로 저들의 수난 속에 현존한 그리스도를 모르고 있음을 폭로한다. 이것은 당시의 라삐 유다교는 물론이요 현재의 제도화된 교회의 주장에서도 도무지 소화시킬 수 없는 파격적인 것이며, 현존의 그리스도의 존재양식 또는 그 현장을 구체적으로 제시한 것이다.

둘째는 히브리서 기자의 충직한 현존의 그리스도관이다. 그는 제사제도를 도구로 하여 다음과 같이 말한다.

짐승의 피는 죄를 위한 희생제물로서 대제사장이 지성소에 가지고 들어가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 몸은 영문 밖에서 태워버리는 것입니다. 예수께서도 자기의 피로 백성을 거룩하게 하시려고 성문 밖에서 고난받으셨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도 수치를 걸머지고 영문 밖에 계신 그에게로 나아갑시다(13, 11~13).

히브리서 기자가 내세운 현존의 그리스도론은 충격적인 것이다. 유다교 제사법은 잔인하다. 아무리 짐승이지만 인간의 죽음을 대신하기 위해 제단에 바쳐진다. 그것은 착취의 상징이다. 그런데 그렇게 짐승의 피를 모조리 쏟아 바쳤는데, 그 시체는 그 배설물과 함께 전염균처럼 성밖으로 끌어내어 소각해 없애도록 되어 있다. 바로 이것이 역사에서의 민중상의 상징 아닌가!

그런데 히브리서 기자는 바로 이런 현실을 예수의 수난에서 본 것이다. 예수가 십자가에 처형된 곳은 바로 '예루살렘 성'을 벗어난 곳이었는데 그곳을 바로 착취당한 짐승의 시체가 버려지는 장소와 같이 본 것이다. 그리고 이 기자는 그것을 과거의 사건으로 보지 않고 현재 성문 밖에 있는 그에게로 나아가자는 것이다. 성문 밖은 버려진 자들, 즉 소외된 자들의 현장이다. 그런데 그 현장에 구경하러 나가자는 것이 아니라 수치를 걸머지고 나아가자는 것이다. 이것은 현존의 그리스도를 어떻게 만날 수 있느냐를 너무도 분명하게 나타낸 것으로서 고난과 민중과 현존의 그리스도 그리고 그를 찾는 길까지를 가장 적절한 구상언어로 보여준 것이며, 바로 그 언어를 완고한 '정통'에서 가져왔다는 점은 우리들에게 많은 것을 가르쳐준다.

이처럼 민중신학은 현존의 그리스도를 민중 안에서 찾는 일이다. 그러므로 민중을 만나는 일과 그리스도를 만나는 일은 동시적인 일이다.

6) 민중을 만나는 것은 이미 위에서 간접적으로 언급했듯이 삶의 진리에 충성하는 자에게만 가능하다. 한국의 민중을 만남에 있어서 그들의 '한'(恨)에서 그 참모습을 발견하였다(서남동). '한의 담지자!' 이것이 바로 우리의 삶의 자리에 충실하려는 자가 만난 민중이다.

'한'이 무엇이냐고 물으면 대답하기 어렵다. 우선 다른 나라 말로 번역할 길이 없다. 그것은 '한'이란 우리 사회사에서 경험된 어떤 심리상태를 나타내기 때문이다. '한'이 무엇이냐고 묻는 사람은 사실상 아무리 설명해도 그것을 모른다. '한'을 아는 자지는 한 맺힌 자뿐이다. '한'은 한국인들에게는 자명한 것이지만 그것을 서구식으로 언어화하면 벌써 '한'은 그 실상에서 떠나게 된다.

'한'은 고난과 직결된 것이다. 구약에도 고난과 직결된 소리가 많다. 그런 것을 '한탄의 소리'(Klagelieder)라고 부른다. 그렇듯이 '한의 소리'도 가능하다.

그러나 '한'이 바로 표현되기 이전의 어떤 경지이며, '한'은 탄(嘆)이 되기 전의 어떤 상태를 말한다. 즉 '한'은 아직 고통스런 마음, 애환에 젖은 상태인데 그것을 풀길을 갖지 못한, 한탄으로 풀길도 갖지 못한 어쩔 수 없는 상태이다. 입이 있어도 손이 있어도 그것을 표출시킬 수 없는 힘없는 상태, 그것이 너무 오래 마음을 점유하므로 마침내는 자신도 그게 무엇인지 모르게 된 상태, 그러면서 시들어가면서 이름 모를 병으로 죽어가는 것 같은 그런 상태가 바로 '한'이다.

한탄이나 한의 소리는 이런 '한'을 의식한 다음의 것이다. 그것은 어떤 형태로든지 노출되고 폭발될 것이지만, 그 본질은 그 미발(未發)의 상태에서 찾아야 될 것이다.

한국의 쌍놈(常民)들은 그처럼 오랜 역사 속에 압박만 계속 받아 왔으므로 한의 화신이 되었을 것이지만 그런 상태가 너무 오래 계속되는 동안 그것이 마치 자명적인 듯이 숙명으로 받아들임으로써 별 의식이 없이 시들고 있었다. 그래서 그들은 그들에게 지워지는 모든 짐을 자발적으로 또는 강제로 짊어지고 왔을 것이다. 그들을 현대사 가들이 '역사의 주인'이라고 하지만 저들은 그런 의식을 가져본 적이 없다. 그저 어처구니없이 산 것이다. '목구멍이 포도청이라 산다'가 바로 저들의 현실인 것이다.

이스라엘은 바빌론에서 포로생활을 하며 자신들의 전체가 겪는 민중적 고난 속에서 '수난의 종'이라는 현실을 발견했는데, 이것은 우리의 '한'에 찬 민중과 상통하는 점이 너무 많다(재론).

민중의 고난의 참상은 '민담' 속에서 발견되는데 그중 하나가 귀신이야기다. 주목되는 것은 귀신은 대부분 복수의 화신으로 등장하는데 우리나라의 경우 그 주인공이 대개가 여자라는 사실이다. 여인은 봉건적 가족제도 아래서 가장 수탈당한 고난의 상징이다. 그들은 한의 상징으로 되어 있다. 그들은 유교적 봉건체제 아래의 가족제도에서 제도화된 남존여비율로 짓눌려왔다. 그들은 가족의 또 하나의 기둥이었고, 사실상 가족의 존폐의 열쇠를 한 손에 쥐고 있었지만, 그래도 말없이 순종하는 것을 미덕으로 삼고 살았다. 그런데 귀신으로 등장하는 여인상은 거의 예의없이 증오와 복수의 화신이다. 민담에서의 귀신들은 어김없이 머리를 풀어헤치고, 피 흘리면서, 입에 칼을 물고 나타나 복수를 한다. 그런데 왜 이런 모양으로 나타날까? 그런 이야기는 실은 여인들을 괴롭힌 남자들의 내적 공포심이나 죄책감이 그같은 이야기 형식을 빌려 노출된 것이 아닐까?

하여간 이런 이야기가 한에 찬 민중의 면모를 나타내는 것이다. 그래서 특히 근래에 한에 대해 여러 시인들이 읊었으며 서남동은 그것에 근거하여 민중신학의 중요한 거점으로 신학화를 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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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알 (열상 19, 18)
남은 칠천 명 (19, 7-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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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제키엘이 무등산에서 절규한다 (에제 24, 6-8)
포로에서의 탈출 (이사 66, 1-8)
위정자와의 대결 (이사 7, 10-14)
   
제5부 새로운 존재
일상성과 비일상성 (루가 10, 38-42)
그래도 다시 낙원에로 환원시키지 않았다 (창세 3, 1-10)
새로운 인간상 (창세 12, 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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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을 말한다 (마르 12, 28-34)
존재 근거 (시편 42편)
우주의 품으로 (시편 8,3 이하)
   
판권
표지
예수의 민중사건 : 『민중과 성서』를 내면서
   
제1부 복음서와 민중
   
예수와 민중 : 마르코복음을 중심으로
    1. 전제
    2. 마르코복음 안의 오클로스
    3. 마르코복음에 나타난 오클로스의 성격
        1) 오클로스의 성격
        2) 오클로스에 대한 예수의 행태
        3) 종합
    4. 예수를 따른 자들
    5. 마르코복음 안에 있는 어록
    6. 오클로스의 언어학적 의미
        1) 라오스와 오클로스
        2) 오클로스와 암 하 아레츠
    7. 종합
마르코복음에서 본 역사의 주체
    1. 전제
    2. 마르코의 삶의 자리
    3. 마르코의 민중신학의 기조
        1) 세례자 요한이 잡힌 후(14a절)
        2) 갈릴래아로 가다
        3) 하느님 나라의 도래 선포
    4. 민중의 행태
예수사건의 전승 모체
    1. 문제 제기
    2. 케리그마의 성격
        1) 고린토전서 15장 3~8절
        2) 필립비서 2장 6~11절
        3) 사도행전에 나타난 케리그마
    3. 민중언어의 성격
    4. 수난사
    5. 예수의 행태 일반
        1) 기적 이야기와 예수의 행태
        2) 아포프테그마와 예수의 행태
        3) 로기온(Logion, 어록)과 예수의 행태
    6. 결론
가난한 자 : 루가의 민중 이해
    1. 가난한 자
        1) 통계적 고찰
        2) 루가의 특수자료
        3) 예수의 탄생설화와 나자렛 선언
        4) 마르코와 Q자료
    2. 루가복음서의 청중
    3. 결론
마태오의 민중적 민족주의
    1. 문제 제기
        1) 마태오의 신학적 주제에 대한 논의들
        2) 문제 제기
    2. 마태오가 처한 현실
        1) 마태오와 그의 시기
        2) 민족적 와해 위기
    3. 마태오의 현실인식
        1) 이스라엘 : 길 잃은 양들
        2) 길 잃은 양이 놓여 있는 현실
    4. 민족동일성 재확립
        1) 뿌리 찾기
        2) 바리사이파가 주도하는 라삐 유다교와의 대결
    5. 마태오의 민중 이해
        1) 언어적 성격
        2) 의식화된 민중
    6. 맺는 말
민중신학의 성서적 근거 : 마르코복음을 중심으로
    1. 예수사건의 재발견
    2. 마르코복음과 민중
    3. 민중은 수단이 아니다
    4. 민중은 객체일 수 없다
    5. 십자가는 민중수난의 극치다
민중신학의 어제와 오늘
    1. 독재와 대항하므로
    2. 민중을 만나므로
    3. 민중과 더불어
   
제2부 민중운동사
   
민중사건과 언어사건
    1. 성서에서 본 말의 성격
        1) 그 말의 현장은 어떤 것이었나
        2) 예수의 경우
        3) 예수사건에 관한 전승
        4) 오순절의 말 사건
    2. 무엇으로 말하는 것인가
    3. 해야 할 말은 무엇인가
    4. 우리가 해야 할 말
미래는 가난한 자의 것 : 루가 6장 20~26절
    1. 축복과 저주
    2. 가난한 자와 부요한 자
    3. ‘지금’과 ‘장차’
    4. 우리의 선택
나라가 임하옵소서
    1. 예수의 기도
    2. 그의 기도를 전달받은 자들
    3. 하느님의 나라
고향 잃은 민중
    1. 피난민
    2. 성서에서 본 피난민문제
    3. 게르(GER) 문제 해결의 시도
    4. 이방인에 대한 관용의 한계
    5. 당면한 과제
        1 ) 새로운 인식을 위한 운동
        2) 실천에 대한 몇 가지 제언
이스라엘 민중사
    1. 머리말
    2. 출애굽
    3. 고대 이스라엘 종족동맹
    4. 민중을 배반하고 세워진 왕권
    5. 분단시대의 고난
    6. 민중운동의 여러 계열
    7. 예수의 민중운동
    8. 맺는 말
   
제3부 민중과 체제
   
민중사실의 증언
    1. 민중신학의 전제들
    2. 민중사실의 증언
고난과 고백
    1. 수난자와의 일치
    2. 마르코의 민중
    3. 수난사와 고난
    4. 더불어의 고난
    5. 맺는 말
갈릴래아 민중에 항복한 바울로
    1. 바울로의 위치
    2. 사울은 어떤 사람인가
    3. 그리스도교 박해
    4. 예수를 만남
    5. 전향
    6. 맺는 말
소명(召命)
    1. 바울로의 소명
    2. 사도 됨과 소명
    3. 이방인에게로
바울로와 역사의 예수 I
    1. 머리말
    2. 예수에 대한 바울로의 말
    3. 예수냐 바울로냐
    4. 왜 예수가 아니고 케리그마인가
선택받은 민중: 고린토전서 1장 26~31절
    1. 고린토교회 구성원의 사회계층
    2. 공동체원의 가치 판단 기준
    3. 민중을 보는 눈
    4. 택함을 받은 민중
   
제4부 예수의 희망
   
하늘도 땅도 공(公)이다
    1. 낙원 이야기
    2. 아담一인간
    3. 실락원은 공을 사유화함으로
갈릴래아에서 만나자: 마르코 16장 1~8절
    1. 제3의 자리
    2. 갈릴래아
    3. 갈릴래아에서 만나자
예수의 희망
    1. 새 세계에의 희망
    2. 희망과 세계혁명
    3. 바른 인간공동체의 희망
    4. 맺는 말
   
판권
표지
예수는 논하지 않았다
   
제1부 민중의 언어, 이야기
   
1. 성서라는 책의 성격
2. 성서의 서술양식
    1) 구약성서
    2) 신약성서
    3) 민중언어
   
제2부 예수의 이야기(비유)
   
1. 만성병에 걸린 세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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