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르틴 루터 이래로 여러분은 '복음'의 의미에 대한 분명한 표상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것은 바울로에게 근거를 둔 것으로서 십자가의 해석을 중심에 놓은 것입니다. 그런데 마르코복음은 이 복음에 대해서 다른 입장을 취하고 있습니다. 이 복음서의 시작에 마르코는 "이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의 시작"이라고 했는데, 이것은 복음을 어떤 도그마적인 교리로 내세운 것이 아니고 이 마르코복음이 이제 시작하려는 예수에 대한 모든 것을 포괄한다는 것을 말하려는 것입니다. 이러한 전제 밑에서 마르코복음을 읽으면 복음에 대한 아주 다른 안목을 발견하게 됩니다.
불트만은 공관복음서의 전승은 '확대된 케리그마'라고 정의했습니다. 이것은 부분적으로 옳습니다. 가령 우리가 이 복음서에서 케리그마적인 것이 부분적으로 섞여 있는 것을 발견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놀라운 것은 훨씬 많은 부분이 결코 케리그마적이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특히 마르코복음의 내용은 결코 케리그마라는 개념 밑에 포괄시킬 수 없습니다. 그 예로써 우리는 예수를 둘러싼 군중들에 관해서 볼 수 있습니다.
마르코는 이 군중을 '오클로스'라고 성격지었습니다. 마르코복음은 이 개념을 42회나 사용하고 있습니다. 예수가 아무런 조건 없이 맞아들이고 또 예수를 미친 듯이 쫓아다닌 그 친구들은 오직 갈릴래아의 오클로스들뿐이었습니다. 이 오클로스와의 관계에서 우리는 죄인, 세리, 병자, 눌린 자, 배고픈 자 그리고 가난한 자들과 같은 개념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마르코에서 저들은 모두 오클로스의 상징으로 서술되고 있습니다. 가령 예수가 레위인의 집에 들어갔을 때 바리사이파 사람들은 그를 비난했는데, '세리와 죄인'들과 함께하고 있다는 것이 그 이유였습니다(마르 2, 16). 그런데 바로 그들이 오클로스에 속하는 사람들이라는 것은 이미 마르코 2장 13절에 반영되어 있습니다.
예수는 갈릴래아에서 오직 오클로스들과 더불어 살았습니다. 그는 그들과 더불어 산 것만이 아니라 바로 그들을 위해서 보냄을 받았다고 언명했습니다.
"나는 의인을 위해서가 아니라 죄인을 부르려고 왔다"(마르 2, 17).
또 다른 예를 우리는 마르코 3장 31~35절에서 발견할 수 있습니다. 거기서는 그 상황을 다음과 같이 서술합니다.
"오클로스가 그를 둘러앉았습니다……"(32절). 여기서도 예수가 오클로스에게 둘러싸인 것을 나타냅니다. 예수의 어머니와 그 형제 둘이 그에게 접근할 수 없어서 민중 가운데 어떤 사람이 예수에게 그들이 온 것을 알렸습니다(32절). 이에 대해서 예수는 "누가 나의 어머니이고 누가 나의 형제인가?"하시고 자기를 둘러싼 사람들(오클로스)을 둘러보며 또 말씀하셨습니다. "보라, 여기 내 어머니와 형제들이 있다"(34절)라고 말입니다.
이것은 놀라운 언명입니다. 이 오클로스는 앞에서도 전혀 종교적으로 성격화한 바가 없음에도 불구하고 하느님의 가족, 즉 그의 형제들 둘로 규정되는 것입니다.
슈니빈트는 이 단락에 대한 그의 해석에서 35절에 있는 "하느님의 뜻을 행하는 자"에 중점을 두고 그것을 조건으로 내세웁니다. 그러나 도그마적인 고려를 배제하고 이 텍스트에만 집중하면 34절이 결론임을 인식하게 될 것이고 35절은 추가된 독립된 말임을 알 수 있을 것입니다. 이미 디벨리우스, 클로스데르만 그리고 불트만은, 35절은 이 전체 문맥에서 분리시켜야 한다는 데 의견을 같이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불트만은 35절이 이미 형성되었던 것이라는 견해이고, 디벨리우스는 이와 반대로 35절은 2차적으로 형성된 것이라고 봅니다. 어떤 판단이 옳든지 간에 분명한 것은 이 이야기는 다른 것과의 관련에서 형성된 것이고, 이 둘은, 즉 예수의 가족과 새로운 가족은 평행선을 이루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디벨리우스는 이 이야기를 교회가 형성한 설교언어라고 봅니다. 그러나 여기서 문제는 예수와 더불어 있는 오클로스를 하느님의 가족으로 성격화했다는 사실입니다. 만약 31~34절을 마르코가 전승을 받아들여 기록한 것이라면, 마르코를 자료로 한 마태오는 단순히 케리그마를 확대한 것이라고 볼 수 없습니다(마태 12, 49~50). 그렇다면 오히려 마르코는 마태오와는 반대로 오클로스에 대한 아무런 조건 없는 예수의 자세를 밝히려고 했다고 보아야 될 것입니다. 사실상 무엇보다도 34절을 그리스도교적 케리그마에 예속시키기는 어렵습니다. 그러므로 이러한 난점을 해결하고자 마태오는 이 부분(마르 3, 34)을 수정하여 '오클로스'를 '제자들'로 바꿨습니다(마태 12, 4a). 그리고 루가는 이 구절(마르 3, 34)을 제거하고 이 장면을 직접 34절과 맞물려놓았습니다(루가 8, 21). 이렇게 볼 때, 마르코가 오클로스를 얼마나 중요하게 전면에 내세우고 있는지를 확인할 수 있습니다.
그럼 정말 오클로스는 하느님의 뜻을 이루는 집단인가요? 다른 말로 하면 이 오클로스는 경건한 그룹인가요? 마르코는 단 한 번도 오클로스를 새롭게 정의하려고 하지 않았습니다. 또한 그는 이 계층을 어떻게든 격상하려는 노력도 하지 않습니다. 단지 그는 오클로스에 자신을 일치시키려고 노력한 것뿐입니다.
필로(Philo)가 오클로스를 "문란한 밑바닥 사람들"(Pöbel)이라고 단정하고 또는 일반적으로 희랍의 언어 사용에서 오클로스를 멸시당하는 계층으로서 아무 방향성이 없는 무리들이라고 본 데 대해, 마르코는 오클로스를 사용하면서 구태여 이런 전제를 수정하려고 하지 않습니다.
마르코는 오클로스라는 희랍의 개념을 모름지기 히브리어의 암 하 아레츠(Ám hā´ āres, '땅의 사람들')에서 이끌어낸 것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암 하 아레츠는 당시의 특히 바리사이파들의 시각에서 보는 이해는 범율법적 계층 이상 다른 것이 아닙니다. 유다인들은 바리사이가 중심이 되어서 설정한 질서에 따라 살면서 율법의 의무를 성취하게 되면 의인 또는 하느님의 가족이라고 표시됐습니다. 이에 반해서 일상생활에서 이러한 법적 규율을 성취하지 못하는 사람들은 모두 죄인으로 간주되었습니다. 그런데 이 죄인이란 바로 가난하고 병들고 유다교가 구체적으로 정의한 부정한 직업을 가지거나 또는 율법에 의해서 규정된 의무를 행하지 않으므로 사회적으로 소외된 계층을 말합니다. 따라서 암 하 아레츠, 즉 오클로스는 멸시를 받고 박해를 당하고 소외당했습니다.
고난당한 자에는 바로 율법의 힘에 깔려서 수난당하는 자들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이러한 의미에서 예수가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는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편히 쉬게 하리라"고 한 말씀은 바로 이렇게 눌림받는 오클로스에 대한 것이라고 해석됩니다. 사람들 중에는 바로 그 민중이 예수를 광적으로 환영한 것이 그들의 경건성을 나타낸 것이라고 주장할 수 있습니다. 공관서에도 믿음(pist is)과 이들을 결부시킨 경우가 있기는 합니다. 그러나 그것은 극히 일부에 불과합니다. 더군다나 거기에 나오는 이 믿음의 내용은 결코 케리그마 적이 아닙니다. 그러기에 이 믿음은 그리스도론과 아무런 상관이 없습니다. 그들은 예수가 자신들의 병을 고쳐줄 것이라는 기대를 확실하게 가진 것은 사실입니다. 그러나 그런 장면들에서도 도그마적인 의미에서의 믿음이라고 표시된 곳은 아무데도 없습니다. 단지 버림 받고 소외되므로 아무 희망도 가질 수 없는 상태에 있는 주변적 인간 둘이 예수에게서 어떤 새로운 가능성을 찾은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들의 열광은 그들의 비참한 생활조건과 관계가 있습니다. 이 오클로스를 바로 최후심판의 비유(마태 25장)에서 나오는 심판자가 자신과 일치시킨 사람들과 일치시키는 것은 너무도 당연한 이치입니다.
한국에서는 지금 이 오클로스와의 관계에 있어서 신학작업을 하기 시작했습니다. 물론 그들은 이미 말한 대로 책상 위에서 학문적 분석을 통해서 발견한 것이 아닙니다. 그들을 발견한 것은 고난의 현장에서였습니다. 우리의 신학자와 그리스도인들은 그 많은 버린 자들과 버림받은 자들과 비슷한 운명을 경험한 사람들로서 고난을 함께 나눈 사람들이 많습니다. 따라서 우리는, 신학자들과 그리스도인들은 자신의 고난의 문제에 집착하는 데 그칠 수 없고, 고난받는 '너'를 구체적으로 돕고 그들의 고난에 참여하며, 그들에게 부단한 희망을 주는 노력을 계속해야 합니다. 우리는 수난당하는 자들을 낡은 의미에서의 전도의 대상으로 볼 수 없습니다.
'민중'이라는 언어는 신학자만이 사용하는 것이 아니라 문학작가들 그리고 역사가들도 지금 열심히 이 말을 사용하고 또 그것을 개념화하려는 노력을 계속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저들은 삶과 이해를 함께할 모델을 찾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예수에게서 그 산 모델을 봅니다. 그런데 놀라운 것은 2천 년 전의 예수가 오늘의 우리 민중과 직접 생동하는 관계가 가능하다는 것입니다. 비록 비그리스도인이라도 민중과 더불어 수난의 현장에 있다면 예수는 수난당하는 저들과 쉽게 친밀해지며 아무런 거리감을 느끼지 않습니다. 저들은 쉽게 그러한 예수에게 자신을 개방하고 받아들입니다. 그들의 행태는 갈릴래아의 민중이 예수를 대하는 그것을 재현하는 것 같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마태오의 34절이 우리에게는 참복음입니다. 우리가 만일 34절 대신 35절에 비중을 둔다면 도그마화된 예수에게로 되돌아가자는 것이고, 또 그것은 복음의 축소를 뜻할 것입니다.
이와 관련해서 큰 잔치의 비유(루가 14, 15)는 중요한 의미가 있습니다. 그것은 하느님 나라의 비유입니다. 우선권을 부여한 초청받은 자들은 모두 그들의 소유 때문에 이를 거부했습니다. 이에 대해서 가난한 자, 절룩발이, 소경 같은 병신들이 거리를 헤매던 상태에서 초대되었습니다. 그 초대에는 아무런 조건이 없었습니다.
일반적으로 처음 초대받은 자들은 '유다인'이라고풀이합니다. 그러나 초대받은 자들은 한 가지 공통점이 있습니다. 그것은 '재산'을 가진 사람들이라는 것입니다. 이 비유에는 어떤 민족적인 차별 같은 것은 전혀 표시되지 않고 오직 사회계급적 차이만 반영되었을 뿐입니다. 그리고 이 비유에서는 거리에서 온 일군(一群)의 사람들은 어떤 의미로나 종교적으로 성격화되어 있지 않습니다. 단지 이들을 굳이 성격 짓자면 어떤 도움 또는 구원의 굶주림으로 어떤 새로운 세계를 기다리는 자들이라고 했습니다. 그렇다고 그들이 바로 그렇기 때문에 수난당하고 있다는 암시도 없습니다. 한마디로 이 비유에서는 두 번째로 초청을 받은 사람들에게 어떤 의미로나 종교적인 자세를 암시한 것은 없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이 비유에서 선교의 근거를 찾기 위해서 그런 어떤 종교적 존재를 함께 설정해놓고 읽으려고 해왔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이 비유가 서술된 바로 그대로를 보고 읽고 승인하려는 것입니다.
바로 이 두 번째 그룹이 이처럼 비종교적으로 서술됐다는 것은 한국의 고난의 현장에 사는 우리에게 특별한 의미를 주었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정말 '은총'이 무엇인지를 배울 수도 있었습니다. 만일 은총이 복음의 핵심이라면 우리는 진정한 복음을 여기서 배운 셈입니다. 우리가 이러한 사회적 계층에 속한 사람들을 어떤 방법으로나 신학적으로 특성화하려고 한다면, 우리가 고난 속에 살고 있는 비그리스도인들과 더불어 살고, 더불어 고난받는 데 큰 거리낌이 될 것입니다. 거기에 대한 한 구체적인 예를 우리는 마태오복음에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거기서도 마르코복음에서와 마찬가지로 처음에는 아무런 조건 없이 거리의 사람들을 초대합니다. 그러나 마르코와는 달리 마태오에서는, 만찬 이후에 초청한 주인은 저들에게 예복을 입지 않았다는 이유로 처벌합니다(마태 22, 12). 이것은 벌써 이 텍스트 안에서 자기 모순에 빠져 있습니다. 이 구절(마태 22, 12)은 너무도 현실을 무시한 채 사족처럼 첨가한 구절입니다. 이같은 마태오의 편집은 교회의 질서를 위한 강압에서 이루어진 까닭입니다.
사실상 우리도 한국에서 마태오가 겪는 이와 같은 마찰을 겪습니다. 까닭은 우리는 언제나 비그리스도인들과 타종교에 속한 사람들과 더불어 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보수주의자들은 이 마태오의 텍스트를 강력한 방패로 하여 '더불어' 살려는 현상에 저항합니다. 그것은 바로 저들이 그리스도인이기 위한 어떤 조건을 수호하려는 저들의 소원 때문입니다. 그러나 이런 조건은 예수의 근본자세와 아주 모순됩니다. 우리가 고난받는 자들의 처지를 엄숙하게 받아들이려면 결코 그 주인이 요구한 것 같은 예복을 요구할 수는 없습니다.
이와 관련해서 우리는 루가복음 6장 20~6절에 있는 축복의 말들을 시위적인 선언으로 내세웁니다.
"가난한 자는 복이 있다. 하느님 나라가 너희의 것이다."
그들은 가난합니다. 그리고 지금 배가 고픕니다. 그리고 비통해서 울고 있습니다. 그래도 그들은 '지금' 미움을 받고 소외되고 조소를 당하고 있습니다. 루가복음에는 '영에 있어서'라든지 '의 때문에'란 단서가 없습니다. 마태오복음에서처럼(마태 5, 3~11) "영에 있어서 가난하다"든지 "의 때문에 미움받는다"고 하지 않습니다. 루가에서는 마태오에서와는 달리 단순히 가난하고 배가 고프고 우는 것입니다. 그런데 바로 이런 자들이 하느님 나라의 상속자의 약속을 받습니다. 한걸음 더 나아가서 루가는 이것을 단순히 미래적인 약속으로 내세우지 않고, 예수의 현존과 더불어 '지금' 실현되는 사건으로 이해합니다. 그런 의미에서 그는 예수의 메시아적인 선언을 그의 복음서 안에 수용하고 있습니다(루가 4, 18~19). 바로 이 말은 우리에게 지난 몇 년 동안 가장 중요한 텍스트로 계속 원용되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