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난 속에서 기도를 통하여 하느님에 대한 물음이 언제나 고조되었습니다. 그리고 수난이 깊어질수록 그것은 마침내 하느님에 대한 구체적인 원망으로까지 변했습니다. "그 신은 우리 위에서 내려다보면서 어쩌다 자신의 필요에 따라서만 간섭하는 실재인지?" 이러한 물음과 관련해서 마르코복음의 수난사는 새롭게 우리에게 의미를 부여했습니다. 무엇보다 놀란 것은 마르코의 수난사에는 예수나 하느님의 초자연적인 현상은 털끝만치도 흔적이 없다는 사실입니다.
이 수난사는 예수의 예루살렘행, 게쎄마니에서의 그의 기도, 체포, 심문, 그리고 골고타 십자가상에서의 그의 마지막 절규로서 끝납니다. 바로 예수의 수난사에서도 한국에서 우리가 경험하는 것과 꼭 같이 적나라한 현실만이 지배하고 있습니다. "도대체 그런 '현재' 속에서 하느님이 존재하느냐?"는 물음이 우선적으로 제기됩니다. 그러나 마르코복음에서나 우리의 경험에서 신은 단지 이 세계에서 하나의 무(無)와 같은 것으로 존재할 뿐입니다. 거기에는 침묵만이 지배합니다. 이 침묵 밑에서 불의가 홀로 그의 독무대 위에서 춤추고 있을 따름입니다. 그래도 신은 침묵합니다.
강자가 약자를 억누르고 부자가 가난한 자를 약탈하는 현실은 '주먹'이 유일한 진리라는 사실을 입증했습니다. 이러한 상황에서 우리는 예수를 승리자로서 권좌에 앉은 이로서가 아니라, 전능한 자로서가 아니라, 초인적인 존재로서가 아니라 그 자신이 고난당하는 자로서, 버림받은 자로서, 무능한 자로서 이해하기 시작했습니다. 예수는 그를 처형하는 데 하수인이 된 대제사장이나 서기관들이 "그는 스스로 자기를 돕지 못한다"고 말한 것처럼, 우리를 도울 수 없다는 판단에 도달했습니다. 그런데 놀리운- 사실은 바로 이러한 예수의 고난의 현장이 그리스도인들에게뿐만 아니라 비그리스도인들에게도 위로가 된다는 사실이었습니다. 평소에 우리는 십자가의 고난을 말할 때는 언제나 부활의 선포와 연관시켰습니다. 그러나 고난의 현장에서는 우리가 그들에게 참성취를 말하려고 하면, 고난을 받되 철저히 고난받는 예수를 그대로 말하는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이 고난받는 예수에게 저들이 비그리스도인인데도 그들의 마음을 여는 것을 느꼈습니다. 아마도 저들은 예수와 자신들의 처지를 일치시킴으로써 거기서 어떤 새로운 의미의 위로를 받는가봅니다. "하느님이 어디에 있느냐?"는 물음 앞에 직접 십자가의 사건에 현존한다고 대답합니다. 우리는 고난당한 자를 제시합니다. 즉 십자가에 달린 하느님을.
이와 관련해서 우리는 사마리아 사람의 비유(루가 10, 5~37)를 평소에 일반적으로 이해하는 것과는 전혀 다르게 해석합니다. 일반적으로 사람들은 바로 그 선한 사마리아 사람을 예수라고 보고 있습니다. 그러나 몇 년 사이에 우리는 그 사마리아 사람과 예수를 일치시키는 것이 아니라 바로 반 죽어서 고통으로 신음하고 있으나 아무런 도움도 없이 쓰러져 있는 강도를 만난 그 사람과 예수를 일치시킵니다. 그리고 우리는 아주 조심스럽게 산 예수, 하느님은 고난중에 현존한다고 말합니다. 고난의 현장이 바로 예수의 현존의 장입니다.
이러한 시각에서 다시 읽은 히브리서 13장 10~13절은 우리를 위한 예수의 고난과 더불어 그 고난 속에서의 그의 현존을 증거한 것이 큰 의미로 부각되고 있습니다.
히브리서 13장 10~13절에서 예수의 십자가처형의 의미는 하나의 종교의식의 틀로 표현되었습니다. 이런 이해의 배후에는 속죄양으로 희생된 짐승의 잔해를 제거하는 의식이 깔려 있습니다(레위 16, 27). 즉 양을 제물로 바친 후 그의 가죽과 살 그리고 배설물은 성문 밖으로 내버리는 것입니다. 이런 의식을 바탕으로 하여 히브리서 저자는 십자가의 고난에 특별한 의미를 부과합니다. 그것은 수난자는 제거되되 성문 밖에 버려진다는 것입니다. 바로 희생된 짐승의 가죽과 살과 배설물은 마치 전염균처럼 사람들로부터 격리시키기 위해 성문으로 내던져진다는 것입니다. 이 저자는 산 자가 바로 이처럼 처리되고 버림받고 배제되는 그런 현장을 발견합니다. 그리고 13절에서 "그러므로 우리도 그가 당한 수치를 걸머지고 영문 밖에 계신 그에게로 나아갑시다"라고 합니다. 이같은 독려는 우리에게 충격이요 큰 위로가 아닐 수 없습니다.
성안에는 이른바 의로운 자들이 살고 있고 성문 밖에는 민중이 살고 있습니다. 그리고 우리에게는 이처럼 성문 밖으로 쫓겨난 민중이 들끓고 있습니다. 또 예수를 비유하여, 사람이 자신들의 죄를 짊어지게 하는 상징으로 또 제단에 바친 양의 피를 온몸에 흠뻑 발린 다음 광야로 멀리 멀리 버려져서 야수들에게 먹히게 되는 양과도 같다고 합니다. 오늘도 바로 이렇게 많은 젊은이들이 배울 길도 없고 직업도 없이 범죄의 거리에서 헤매고 있습니다. 저들은 내버림받은 것입니다. 젊은 여자들은 사창굴에 버려집니다. 그래서 결국 야수에게 뜯기듯 희생되어갑니다. 이런 사람들에게 히브리서의 예수 이해는 끝없는 위로가 됩니다. 까닭은 거기에서 그들과 예수와의 일치성을 발견하기 때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