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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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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더불어의 고난

나는 지금까지 여러 성서의 텍스트들을 '일치'의 개념 밑에 함께 나열했습니다. 예수는 수난자들과 자신을 일치시켰습니다. 이것은 서술(lanokatfir)입니다. 그러나 이 서술은 언제나 명령(Imperativ)을 내포합니다. 그리고 그것은 동시에 우리에게 향한 명령입니다. 누구에게, 어디서, 언제라는 이론적인 대답 대신에 우선 젊은 수난자들의 시 몇 편을 읽겠습니다.

1974년 1월은 죽음이라 부르자.
오후의 거리, 방송을 듣고 사라지면
네 눈 속의 빛을 죽음이라 부르자.
좁고 추운 네 가슴에 얼어붙은 피가 터져
따스하게 이제 막 흐르기 시작하던 그 시간
다시 쳐온 눈보라를 죽음이라 부르자.
모두들 끌려가고 서투른 너 홀로 뒤에 남긴 채,
……
아아!
1974년 1월의 죽음을 두고
우리 그것을 배신이라 부르자.
온몸을 흔들어

1974년은 박정희가 첫 비상조치법을 공포한 때입니다. 이 시에는 그리스도교적인 냄새는 없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죽음과 부활의 희망이라는 같은 도식을 내포하고 있습니다.

김지하는 죽음 앞에 서 있습니다. 겨울입니다. 그러나 그 자리에서 그는 오고 있는 봄을 기다립니다. 그러므로 이 기다림을 가지고 이 동사(凍死)의 추위를 깨려고 합니다. 이렇게 해서 봄에 대한 희망은 바로 그로 하여금 부활을 꿈꾸게 합니다. 그는 이 부활을 민중의 봉기에서 보고 있습니다.

다음은 두 아들을 감옥에 보낸 한 어머니의 기도의 일부입니다.

밖에서 바람이 불고 비가 오면 저는 잘 수 없습니다. 까닭은 그럴 때마다 내 두 아들이 더 생각나기 때문입니다. 나는 거리에서 학생들을 볼 적마다 목아 메어 말을 할 수 없습니다. 날이면 날마다 밥상에 앉아 먹을 것을 볼 때마다 제가 아직 자식생각을 않고 그 자리에 앉아 있을 수 있으리까! 나의 하느님, 나의 주님, 저는 어떤 말로도 제 가슴속의 이 아픔을 표현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나의 하느님, 나의 주님, 우리는 당신 앞에서 회개해야 하겠습니다. 과거에 저는 그저 나의 자식들만 생각했습니다. 그저 그들을 잘 먹이고 좋은 의복을 장만하는데 몰두했던 것을 용서하소서. 그리고 십자가에 달린 그리스도의 고난의 의미를 생각지 않고, 단순히 두 아이의 영광스러운 미래만을 소원해 온 것을 용서하소서. 나는 비록 내 이웃의 수난당하는 사람들을 보았어도 그들을 나의 이웃으로 받아들이지 못한 것을 용서하소서. 얼마나 많은 과부와 고아들이 이 땅에 널려 있는데 그들을 전혀 생각지 않고 단지 자신의 편리만을 추구해왔습니다. 그러나 지금은 나의 두 아들의 수난을 통해서 우리에게 무엇을 원하셨는지 이해했습니다. 그것은 우리가 자기 자식들을 사랑하듯 다른 이의 자식들도 그렇게 사랑하라는 것을 알았습니다.

우리가 수난자를 위한 공동의 기도회를 매주 목요일마다할 때에 이 어머니는 이에 참여하는 데 주저하다가 점차로 가담했습니다. 물론 여기에 참여하는 것은 정부에게 미움을 사는 행위였습니다. 바로 그랬기에 우리는 함께 경찰과 대결도 하고 끌려가기도 했습니다. 그러는 과정에서 우리는 그녀의 고난에 동참하게 됐습니다. 그렇게 지내온 어느 날 그녀의 마음에 예수를 느끼게 된 것입니다. 그렇지 않으면 이러한 기도는 불가능합니다. 우리는 이 기도에서 그의 마음에서 우러나오는 회개의 절규를 봅니다. 여기서 그것이 위에서 열거한 성서의 호소와 상통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1973년 5월에 한 떼의 젊은 목사들로 이루어진 한 그룹이 참여자의 이름을 밝히지 않은 성명서를 발표했습니다. 그것은 1972년 10월의 독재체제인 유신선포 후 일곱 달째 되는 때입니다. 이 독재체제는 비상계엄 선포상태에서 한 것입니다. 그랬기에 누구도 이 선포에 대해 어떤 항거를 나타낼 수 없었습니다. 그러나 이 그리스도인들의 선언이 바로 서슬이 시퍼렇던, 그래서 모두 눈을 땅으로 내리깔고 입을 봉한 채 '나는 벙어리, 장님, 귀머거리'라고 할 때 공개적으로 한 것이기에 우리 시대의 기념비와도 같은 것입니다. 영국의 한 신문 지상에서 이들의 성명을 독일의 바르멘선언과 비교한 일이 있습니다. 그 내용은 하나의 고백(Confessio)입니다. 이런 점에서 그 비교는 정당합니다.

나는 그 성명에서 몇 가지 중요한 점을 말하겠습니다.

우리는 하느님 계명에 복종하며, 우리의 구체적인 상황에서 그의 말씀에 따라 행동한다. 우리는 현재 결코 승리감에서 의기양양하는 것이 아니고, 오히려 우리는 하느님 앞에 죄를 짓고 있다는 느낌에서 떤다. 그럼에도 하느님은 우리에게 진실을 고백하고, 주어진 상황에 합당하게 행동하라고 명한다.

무엇에 대해서 회개한다는 것인가? 이 물음은 한국에서의 그리스도인의 실재(實在) 이해와 연관이 있습니다.

우리는 하느님이 종말에는 박해받고 약하고 가난한 자를 해방할 것을 믿는다. 우리는 역사의 주인이요 심판자인 하느님으로부터 민족 전체를 대신하여 억압에서 자유하게 하고, 죄없는 수난을 위해 기도하라고 지명받았음을 믿는다.

우리는 우리 주님의 뒤를 따라 박해당하고, 가난한 자와 더불어 살며, 정치적 박해에 저항하며, 역사적 책임을 질 것을 결단했다. 까닭은 이것이 하느님 나라 선포의 유일한 길이기 때문이다.

여기서 분명해진 것은 '너를 위해 산다'는 그리스도인의 존재는 특히 '눌린 자와 가난한 자들을 위해 산다'는 것! 이 길을 그리스도를 따르는 자는 피할 수 없다.

1974년 9월에 한국신학대학 학생회가 행한 기도문입니다.

하느님, 우리 눈앞에는 불가능한 일들이 연속됩니다. 당신의 진리를 세상의 재판정에서 심판받고 있습니다. 많은 당신의 진실한 종들이 감옥에 수감되어 고통하고 있습니다. 그 이유는 저들이 당신의 말씀을 지키고 성실히 선포했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당신의 뜻과 역사의 가는 길을 가로막는 것이 아닙니까? 지금에 와서 우리는 우리가 했어야 할 말을 안 한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여러 날을 단식했습니다. 우리는 밤을 새우면서 당신께 절규했습니다. 우리는 회개하는 마음으로 당신의 응답을 들으려고 했습니다……우리는 그리스도의 수난을 고백하며 우리가 고난 중에 있는 이웃을 우리의 이웃으로 보지 않은 것을 회개합니다. 지금 고난 속에서 매질을 당하면서 십자가에 달린 그리스도가 우리를 부릅니다. 이제 우리는 수난당하는 자들의 고난이 바로 우리의 수난임을 고백합니다.

이 학생들은 기도와 단식을 여러 주야를 계속하다가 마침내 예수의 수난의 새로운 인식에 다다랐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고난당하는 자들의 고난은 우리들의 고난"이라는 고백에 뒤이어 "지금 고난 안에서, 채찍 밑에서 십자가에 달린 그리스도가 우리를 부르십니다"라는 말로써 이 절대명령 앞에 무릎을 꿇고 있습니다.

나는 위에서 비그리스도인들과 그리고 의식을 가진 그리스도인들의 생각을 몇 가지 소개했습니다. 저들은 같은 현장, 같은 시각 그리고 같은 상황에 있습니다. 그러나 나는 아무래도 또 한 가지 다른 예를 들어야겠습니다. 그것은 본회퍼(D. Bonhöeffer)의 경우입니다. 그는 전혀 다른 처지에 있었지만 다음과 같은 신앙을 고백합니다.

예수와의 만남으로 인간 전체에게 하나의 전환(회개)이 주어졌는데, 그것은 예수가 오직 '남을 위해서 있는 존재'(für andere da ist, das Fürandere―da―seis Jesu), 초월의 경험, 자기 자산으로부터의 자유, 죽는 순간까지 남을 위한 존재가 됨으로써 비로소 전능과 전지와 무소부재의 현실이 열렸기 때문입니다. 믿음이란 이러한 존재에의 참여를 말하는 것입니다.

본회퍼는 남을 위해 현존하는 예수를 경험합니다. 이 경험은 일차원적인, 즉 지평적인 경험입니다. 그러나 이 경험은 그에게 동시에 초월적인 것입니다. 그는 이렇게 말합니다.

하느님과 우리의 관계는 예수의 존재에 참여하므로 '남을 위한 현존' 안에서의 하나의 새로운 생명이 됩니다. 그것은 무한한 불가능한 과제가 아니며 또 언제나 주어진 내 손이 닿을 수 있는 이웃 이 바로 초월적인 대상입니다.

하느님은 우리의 삶 한가운데서 피안적입니다.

이것은 1944년에 독일에 있는 감옥에서 이루어진 고백입니다. 1970년대 한국에서 된 것이 아닙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본회퍼의 이 고백은 오늘 우리가 하는 것처럼 들립니다. 왜 그럴 수 있을까요?

우리는 비그리스도인들과 함께 고난받는 속에서 그렇게도 많은 경이로운 경험을 하고 있습니다. 한국에서 비그리스도인들과 그리스도인들은 본회퍼와 더불어 같은 상황에 있기 때문에 이런 시간과 공간을 초월한 경험을 하게 됩니다. 우리는 미래를 향한 희망 속에서 고난을 경험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초월'을 향해서 문을 열고 있습니다. 본회퍼는 이렇게 말합니다.

우리는 신 없이 고난당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무의식 속에서 우리는 하느님 앞에 존재하고 있습니다.


List of Articles
바알 (열상 19, 18)
남은 칠천 명 (19, 7-18)
민중의 손으로 통일되는 날 (아모 9, 11-15)
겨울은 가고 (에제 37장)
에제키엘이 무등산에서 절규한다 (에제 24, 6-8)
포로에서의 탈출 (이사 66, 1-8)
위정자와의 대결 (이사 7, 10-14)
   
제5부 새로운 존재
일상성과 비일상성 (루가 10, 38-42)
그래도 다시 낙원에로 환원시키지 않았다 (창세 3, 1-10)
새로운 인간상 (창세 12, 1-9)
믿음의 조상 (창세 22, 17-18)
두 사이 에 손을 얹을 판결자 (욥기 9, 25-35)
하느님으로부터의 도피 (시편 139편)
하느님의 웃음 (시편 2편)
잠과 신앙 (시편 127편)
교회란 무엇인가 (로마 8, 9-30)
인간을 말한다 (마르 12, 28-34)
존재 근거 (시편 42편)
우주의 품으로 (시편 8,3 이하)
   
판권
표지
예수의 민중사건 : 『민중과 성서』를 내면서
   
제1부 복음서와 민중
   
예수와 민중 : 마르코복음을 중심으로
    1. 전제
    2. 마르코복음 안의 오클로스
    3. 마르코복음에 나타난 오클로스의 성격
        1) 오클로스의 성격
        2) 오클로스에 대한 예수의 행태
        3) 종합
    4. 예수를 따른 자들
    5. 마르코복음 안에 있는 어록
    6. 오클로스의 언어학적 의미
        1) 라오스와 오클로스
        2) 오클로스와 암 하 아레츠
    7. 종합
마르코복음에서 본 역사의 주체
    1. 전제
    2. 마르코의 삶의 자리
    3. 마르코의 민중신학의 기조
        1) 세례자 요한이 잡힌 후(14a절)
        2) 갈릴래아로 가다
        3) 하느님 나라의 도래 선포
    4. 민중의 행태
예수사건의 전승 모체
    1. 문제 제기
    2. 케리그마의 성격
        1) 고린토전서 15장 3~8절
        2) 필립비서 2장 6~11절
        3) 사도행전에 나타난 케리그마
    3. 민중언어의 성격
    4. 수난사
    5. 예수의 행태 일반
        1) 기적 이야기와 예수의 행태
        2) 아포프테그마와 예수의 행태
        3) 로기온(Logion, 어록)과 예수의 행태
    6. 결론
가난한 자 : 루가의 민중 이해
    1. 가난한 자
        1) 통계적 고찰
        2) 루가의 특수자료
        3) 예수의 탄생설화와 나자렛 선언
        4) 마르코와 Q자료
    2. 루가복음서의 청중
    3. 결론
마태오의 민중적 민족주의
    1. 문제 제기
        1) 마태오의 신학적 주제에 대한 논의들
        2) 문제 제기
    2. 마태오가 처한 현실
        1) 마태오와 그의 시기
        2) 민족적 와해 위기
    3. 마태오의 현실인식
        1) 이스라엘 : 길 잃은 양들
        2) 길 잃은 양이 놓여 있는 현실
    4. 민족동일성 재확립
        1) 뿌리 찾기
        2) 바리사이파가 주도하는 라삐 유다교와의 대결
    5. 마태오의 민중 이해
        1) 언어적 성격
        2) 의식화된 민중
    6. 맺는 말
민중신학의 성서적 근거 : 마르코복음을 중심으로
    1. 예수사건의 재발견
    2. 마르코복음과 민중
    3. 민중은 수단이 아니다
    4. 민중은 객체일 수 없다
    5. 십자가는 민중수난의 극치다
민중신학의 어제와 오늘
    1. 독재와 대항하므로
    2. 민중을 만나므로
    3. 민중과 더불어
   
제2부 민중운동사
   
민중사건과 언어사건
    1. 성서에서 본 말의 성격
        1) 그 말의 현장은 어떤 것이었나
        2) 예수의 경우
        3) 예수사건에 관한 전승
        4) 오순절의 말 사건
    2. 무엇으로 말하는 것인가
    3. 해야 할 말은 무엇인가
    4. 우리가 해야 할 말
미래는 가난한 자의 것 : 루가 6장 20~26절
    1. 축복과 저주
    2. 가난한 자와 부요한 자
    3. ‘지금’과 ‘장차’
    4. 우리의 선택
나라가 임하옵소서
    1. 예수의 기도
    2. 그의 기도를 전달받은 자들
    3. 하느님의 나라
고향 잃은 민중
    1. 피난민
    2. 성서에서 본 피난민문제
    3. 게르(GER) 문제 해결의 시도
    4. 이방인에 대한 관용의 한계
    5. 당면한 과제
        1 ) 새로운 인식을 위한 운동
        2) 실천에 대한 몇 가지 제언
이스라엘 민중사
    1. 머리말
    2. 출애굽
    3. 고대 이스라엘 종족동맹
    4. 민중을 배반하고 세워진 왕권
    5. 분단시대의 고난
    6. 민중운동의 여러 계열
    7. 예수의 민중운동
    8. 맺는 말
   
제3부 민중과 체제
   
민중사실의 증언
    1. 민중신학의 전제들
    2. 민중사실의 증언
고난과 고백
    1. 수난자와의 일치
    2. 마르코의 민중
    3. 수난사와 고난
    4. 더불어의 고난
    5. 맺는 말
갈릴래아 민중에 항복한 바울로
    1. 바울로의 위치
    2. 사울은 어떤 사람인가
    3. 그리스도교 박해
    4. 예수를 만남
    5. 전향
    6. 맺는 말
소명(召命)
    1. 바울로의 소명
    2. 사도 됨과 소명
    3. 이방인에게로
바울로와 역사의 예수 I
    1. 머리말
    2. 예수에 대한 바울로의 말
    3. 예수냐 바울로냐
    4. 왜 예수가 아니고 케리그마인가
선택받은 민중: 고린토전서 1장 26~31절
    1. 고린토교회 구성원의 사회계층
    2. 공동체원의 가치 판단 기준
    3. 민중을 보는 눈
    4. 택함을 받은 민중
   
제4부 예수의 희망
   
하늘도 땅도 공(公)이다
    1. 낙원 이야기
    2. 아담一인간
    3. 실락원은 공을 사유화함으로
갈릴래아에서 만나자: 마르코 16장 1~8절
    1. 제3의 자리
    2. 갈릴래아
    3. 갈릴래아에서 만나자
예수의 희망
    1. 새 세계에의 희망
    2. 희망과 세계혁명
    3. 바른 인간공동체의 희망
    4. 맺는 말
   
판권
표지
예수는 논하지 않았다
   
제1부 민중의 언어, 이야기
   
1. 성서라는 책의 성격
2. 성서의 서술양식
    1) 구약성서
    2) 신약성서
    3) 민중언어
   
제2부 예수의 이야기(비유)
   
1. 만성병에 걸린 세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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