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위에서 제시한 텍스트들에서 예수의 행태를 고난당하는 자들과의 일치로서 성격화했습니다. 그리고 바로 그러한 그의 행태는 어떤 규율이나 조건들, 여러 형태의 게토나 담과 같은 장애물들을 철저하게 제거하고 있음을 봅니다. 그리고 나는 고난당하는 자들의 일부의 절규들을 보고 했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이 모두가 자기 개인의 고난의 경험으로부터 '너'의 고난으로 그 시선을 바꾼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이와 같은 경향을 우리는 본회퍼에게서도 발견합니다. 오늘날 우리를 위한 그리스도가 누구냐고 묻는다면, '너'를 위한 존재로서의 화육한 사람, 즉 '너'를 위한 사람이란 결론에 도달합니다. 우리는 '너'와 일치시키는 것과 '타자'를 위한 존재들 사이에 어떤 구별도 하지 않습니다.
이와 관련해서 그리스도론에 대한 물음을 제기하게 됩니다. 신약에는 그리스도에 대한 여러 가지 이해가 있습니다. 그것을 다음 두 가지로 성격화할 수 있을 것입니다. 하나는 "높임을 받다" "영광스럽다" "전능" "승리자" "완성자" 등등의 표현에서 볼 수 있는데 이것은 그리스도를 전능한 자로 표시한 것입니다. 이에 대해서 우리는 "버림받다" "무능하다" "낮추다" 등등의 전혀 다른 면을 보는데 그것은 그리스도를 수난당하는 종으로서 고백하는 것입니다.
첫번째 경우를 우리는 '충만'(plesoma)이라는 개념으로 파악할 수 있습니다. 가령 요한 1장 14절 후반과 루가 2장 40절 등이 그런 예입니다.
이에 반해서 자기를 비우는 두 번째의 그리스도상은 무엇보다도 필립비서 2장의 '그리스도 찬가'에서 볼 수 있습니다. '자기를 비운다'는 것은 '자기를 낮춘다' 또는 '종의 모습을 갖는다'는 말들과 같은 뜻으로 수난당하는 종으로서의 그리스도를 나타낸 전형적인 표현이라고 하겠습니다. 저는 자기 자신을 비운다는 것을 철저한 복종으로 성격화합니다. 즉 남을 위한 고난은 자신을 철저히 비움으로써만 가능하고, '비운다'는 것은 글자 그대로 자기 자신을 공동화(空洞化)하고 남의 뜻을 완전히 받아들일 수 있는 상태를 의미합니다. 다른 말로 하면 '자기를 비운다'는 것은 곧 '너로 채운다'는 뜻입니다. 십자가란 결국 '자기를 완전히 내맡긴다', 즉 '자기를 비운다'라는 뜻 외에 다른 것일 수 없습니다. 바로 이 선에까지 사람은 스스로 행동할 수 있습니다. 그 결과 무엇이 따르는지하는 문제는 더 이상 사람에게 속한 문제가 아닙니다.
우리가 만일 '충만'을 고난 뒤에 오는 부활로 이해한다면 그것은 인간에게 속한 사항이 아니고 인간이 결정할 어떠한 것도 아님에도 불구하고 마치 인간 스스로가 북 치고 장구 치고 하는 꼴입니다. 그런데 그리스도교는 언제나 '충만'이라는 것을 핵심으로 내세움으로써 인간의 독점본능을 악용했습니다. 이렇게 만일에 그리스도인들이 자기 자신의 욕구로 가득 차 있으면 '너'를 위한 공간은 있을 수 없습니다.
아시아 종교들, 가령 불교나 도교 등에서는 공(空) 또는 무(無)를 목표로 삼고 있습니다. 이것은 바로 자기 자신에게서 해방되는 '비움의 존재'임을 말합니다. 사람들은, 특히 그리스도교 입장에서는 이러한 기본방향을 무시하거나 소극적으로 보아왔습니다. 분명히 불교나 도교에 있어서는 부정적인 면이 있습니다. 그러나 사실에 있어서는 아주 적극적인 것이 내포되어 있습니다. 거기에는 남을 위한 총체적인 투신의 자세, '너'로 '나'를 채우려는 철저한 소원과 자기 개방의 염원이 깔려 있습니다. 이러한 사고는 '나'(ego)를 강조하는 서구적인 사고로는 이해하기 어렵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서구인들은 '나와 너' 또는 '주객'의 사고 밑에서 해방될 수 없어 몸부림치고 있습니다.
나는 여기서 지금까지의 그리스도론이 지나치게 일방적으로 '충만의 그리스도론'으로 기울어졌다는 사실을 몇 마디로 제시할 뿐입니다. 바로 그렇기 때문에 십자가의 의미나 그리스도의 이론은 추상화되고 예수와 우리의 고난의 현실에서 멀어지고 있습니다. 이에 대해서 우리에게는 바로 그 다른 면, 즉 '비움의 그리스도론'이 새롭게 큰 의미를 가지게 된 것은 우연이 아닙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