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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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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전향

바울로는 무엇에서 무엇으로 전향했는가? 우리는 이미 그가 '율법에 의한 구원'이라는 유다교의 도그마에서 예수에게로 전향했다는 사실을 언급했다. 그것을 좀 더 구체화하면 무엇인가? 다시 한번 바울로 자신의 진술을 읽어보자.

나는 육에 있어서도 신뢰할 만한 것을 가지고 있습니다. 다른 어떤 사람이 육에 있어서 신뢰할 것이 있다고 생각한다면 나는 더욱 그러합니다. 나는 난 지 팔 일 만에 할례를 받았고 이스라엘 민족으로서 베냐민 지파에 태어났고 히브리 사람 중의 히브리 사람이며 율법에 있어서는 바리사이파 사람이었고 열심에 있어서는 교회를 박해한 자며 율법의 의에 있어서는 흠 없는 사람입니다(필립 3, 4~6).

이상에서 보아 그를 어떤 부류의 인간이라고 성격화할 수 있겠는가? 그의 마지막 말이 그 성격을 잘 드러내고 있다. 즉 '흠이 없는 자'이다. 갖출 것을 다 갖춘 사람, 빠진 것이 없는 사람이라는 말이다. 사실상 그의 말대로 신분상으로나 교육 그리고 그의 노력에 있어서 이른바 1급의 인간이다. 그는 신분과 재능과 노력을 겸비한 사람이다. 여기서 "율법의 의에 있어서"라는 말은 그 민족사회의 모든 것을 포괄한다는 말이다. 중국에서는 학문을 하며 덕을 쌓는 것은 사서삼경을 통달하는 것이었다. 즉 그것은 중국 사회 전체를 규정하는 규범이다. 율법은 이보다도 더 권위를 가진 그 사회의 도덕적 기준이며, 윤리인 동시에 법이다. 그뿐만 아니라 율법을 안다는 것이 유다 사회에서는 지식의 전부인 것이다. 따라서 율법에 있어서 흠이 없다면 유다인으로서는 정점에 도달한 사람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이런 사람은 유교의 군자나 힌두교 사회의 브라만에 해당될 것이다. 바로 이러한 경지를 향해 최대의 노력을 경주한 것이 사울이다. 그것을 그는 "육에 있어서 신뢰할 것이 있다"는 말로 표현한다(필립 3, 4). 어떤 사람과도 겨누어 뒤지지 않을 만큼 자신이 있다는 말이다. 그는 지금의 개념으로 말하면 최고의 엘리트인 것이다. 이런 표현들을 통해 바울로는 그가 자신이 속한 사회체제에서 가장 성공한 인간임을 말한다. 그는 그 체제를 대전제로 하고, 그 체제에서 규정된 가치관에 의해서 자기를 갈고닦은 것이다.

이런 그에게 예수의 사건과 그 민중의 주장이 어떻게 수용될 수 있었을까? 어떤 면으로 보든지 예수를 그와 견줄 수는 없다. 신분으로나 교육 수준 또는 그 체제에서 '완전'이라는 시각에서 볼 때 예수는 바울로에게 비교도 되지 않는다. 예수는 유다 사회에서 이방인의 땅이라고 멸시받는 갈릴래아 출신이다. 그는 어떤 정규교육도 받은 일이 없다. 그런데 그는 바리사이 체제에서 볼 때 무능하고 약하며, 바로 그렇기 때문에 사회에서의 책임과 의무를 다하지 못하는 그 사회의 낙오자들과 한패가 되었다. 한마디로 말하면 그는 죄인들의 친구이다. "세리와 죄인의 친구", 그것이 예수의 별명이라면 그것은 바울로가 지향하던 목표와는 너무나 상반된다.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은 예수 자신이 율법을 파괴했다는 사실이다. 그는 이런 죄인들과 더불어 그 사회에 불안감을 주며, 마침내 예루살렘에 돌진하여 예루살렘 자체를 모독하고 성전의 권위를 거부했다. 이러한 모든 사실이 이유가 되어 유다교 지배체제에 의해 정죄되었고 로마제국과의 야합 밑에서 가장 극악무도한 죄인으로 처형된 것이다. 이 사실 하나만으로도 예수가 어떤 부류의 사람이라는 것이 입증되는 것이다.

그런데 예수의 민중은 이렇게 처형된 범죄자를 '메시아'라고 선포했으며, 그 운동은 전염병같이 퍼져나갔다. 그뿐만 아니라 더 나아가서 그들은 사울이 온 삶을 바쳐서 지켜왔으며 자신의 존재근거로 알고 있는 율법에 대해 무효를 선언하고, 동시에 바로 그 범죄자인 예수의 죽음은 인류를 위한 속죄적인 죽음이며 구원의 유일한 길임을 믿으라고 선포했다. 이것을 엘리트 의식에 젖은 사울이 용납할 수 있었겠는가! 바로 그렇기 때문에 그는 사력을 다해 그것을 근절하려고 나섰던 것이다. 그것은 자기가 최대의 자랑으로 알고 있는 자기 민족에 대한 정면도전인 동시에 자기가 구축한 삶 전체를 정면으로 부정하는 일이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가 바로 이 예수와 그의 민중운동과 그 주장에 굴복한 것이다.

굴복함에 있어서 바울로는 지금까지 자기가 자랑으로 내세웠던 모든 것을 오물같이 포기해야만 했다. 까닭은 바로 그런 것들이 그의 새로운 삶에 도움이 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해롭다고 판단되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내게 유익했던 이런 것들을 나는 그리스도를 위하여 해로 여겼습니다. 그뿐만 아니라 내 주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이 무엇보다도 존귀한 것이기 때문에 나는 그 밖의 모든 것을 해로 여겼습니다. 나는 그리스도를 위하여 모든 것을 잃고도 그 모든 것을 오물같이 여겼습니다(필립 3, 7~8).

이것은 코페르니쿠스적 전환이다. 완벽한 엘리트인 사울이 세상의 찌꺼기 같은 민중에게 항복한 것이다. 그는 모범적인 엘리트의 대열에 서서 세상의 찌꺼기 같고 전염병 같은 예수의 민중의 대열과 정면으로 대립했던 것인데, 그것에 굴복하고 바로 그가 대립했던 그 대열에 참여한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그는 "나는 그리스도를 위해 모든 것을 잃고도 그 모든 것을 오물같이 여겼습니다. 그것은 내가 그리스도를 얻고 그리스도 안에서 내가 발견되려는 것입니다"라고 한다. 제 힘으로 자신을 구축해나감으로 자신으로 살 수 있다고 믿었던 그가 그러한 자신을 통째로 비우고 그리스도를 받아들임으로 살 수 있는 자신을 발견한 것이 바로 그의 전향이다.

여기에서 그의 가치관이 전적으로 바뀐 것을 볼 수 있다. 사람들은 바울로의 전향은 무신론자가 유신론자로 바뀌었거나, 죄인이 죄를 청산함으로 하느님께 돌아왔거나 또는 낡은 신앙에서 새로운 신앙에 도달한 것이 아니라고 한다. 그것은 일면 맞는 말이다. 물론 그는 결코 죄에서 고민하다가 예수에게로 돌아온 것이 아니며, 야훼신을 믿지 않다가 신을 믿게 된 것이 아니다. 전이나 지금이나 그는 똑같은 야훼 안에 있다. 그러나 이제 야훼에 대한 시각이 달라졌다. 전에는 강자의 하느님, 그러므로 하느님의 뜻인 율법에 있어서 완전무결할 것을 요구하는 하느님으로 믿어왔기 때문에 그의 메시아사상도 유다교에서와 마찬가지로 심판과 승리를 이룩하는 존재로 생각해왔다. 그런데 예수를 만남으로 그 야훼, 그 하느님은 약자의 하느님, 잃어버린 자, 죄인의 편에 선 하느님, 모든 것을 차지할 힘을 가진 자가 아닌, 어린애같이 믿는 자의 하느님일 뿐 아니라 그 하느님 자신도 약함 속에 존재하는 하느님이라는 엄청난 새 사실을 바울로는 발견한 것이다.

그가 예수를 말하되 전능한 이로서가 아니라 십자가에 처형된 자로, 예수의 사건을 말하되 단순히 '십자가'라는 상징을 통해 말하는 것은 유다 메시아사상에서는 있을 수 없는 일이다. 어떻게 신이 처형 될 수 있나! 그런데 바울로는 다음과 같은 놀라운 말을 한다. "예수는 약하셔서, 십자가에 달려 죽으셨습니다"(고후 13, 4). 이것은 예수의 민중을 만나지 않고서는 생각할 수 없는 폭언에 가까운 말이다. 율법에 있어 흠 없는 자의 눈에는 약한 것은 패배요 치욕이다. 하느님이 십자가의 사건에 관여하고 그 편에 선 것이 부활사건으로 상징되었다면, 그 하느님은 강자의 하느님이 아니라 약자의 하느님이라는 말이 된다. 약하므로 폭력에 꼼짝 못 하고 처형된 이를 그리스도로 높인 하느님!

이러한 새 사실을 발견한 바울로였기에 그는 비로소 "내 권능은 약한 데서 완전해진다"(고후 12, 9)라는 말을 할 수 있었으며 그는 자신의 약함을 오히려 자랑할 수 있었다. 그것은 그가 "약할 그때가 곧 내가 강한 때"라는 사실을 깨달았기 때문이다. "누가 약해지면 내가 약해지지 않겠습니까? 누가 넘어지면 내가 애타지 않겠습니까?"(고후 11, 29) 이것은 전향한 바울로만이 할 수 있는 말이다. 만일 그가 전향하기 이전이었다면 바울로는 바로 약자와 더불어 약해지는 것이 아니라 그 약자를 저주하고 죄인으로 심판함으로 자기의 정체성을 찾았을 것이다.

이로써 그에게는 동시에 이방인 선교에 결정적인 장벽이 제거되는 적극적인 일을 경험했음에 틀림없다. 그가 사울이었을 때 유다교를 이방인에게 전하는데 가장 큰 장애는 할례 문제였다. 그 사실이 갈라디아서 5장 11절에 반영되어 있다.

"내가 아직도 할례를 전한다면 어찌하여 박해를 받겠습니까?"

내가 아직도 '할례를 전한다면'을 전제한 것으로 보아 그가 할례를 요구한 때가 있었으며, 그것은 그가 유다교 라삐시대에 할례를 전제조건으로 선교했었음을 말한다. 유다인의 눈으로 볼 때 할례받지 않은 자는 모두 죄인이다. 그런데 예수를 만남으로 이런 문제가 모두 간단히 제거되고 이방인, 즉 죄인과 유다인 사이의 담이 헐린 것이다.


List of Articles
바알 (열상 19, 18)
남은 칠천 명 (19, 7-18)
민중의 손으로 통일되는 날 (아모 9, 11-15)
겨울은 가고 (에제 37장)
에제키엘이 무등산에서 절규한다 (에제 24, 6-8)
포로에서의 탈출 (이사 66, 1-8)
위정자와의 대결 (이사 7, 10-14)
   
제5부 새로운 존재
일상성과 비일상성 (루가 10, 38-42)
그래도 다시 낙원에로 환원시키지 않았다 (창세 3, 1-10)
새로운 인간상 (창세 12, 1-9)
믿음의 조상 (창세 22, 17-18)
두 사이 에 손을 얹을 판결자 (욥기 9, 25-35)
하느님으로부터의 도피 (시편 139편)
하느님의 웃음 (시편 2편)
잠과 신앙 (시편 127편)
교회란 무엇인가 (로마 8, 9-30)
인간을 말한다 (마르 12, 28-34)
존재 근거 (시편 42편)
우주의 품으로 (시편 8,3 이하)
   
판권
표지
예수의 민중사건 : 『민중과 성서』를 내면서
   
제1부 복음서와 민중
   
예수와 민중 : 마르코복음을 중심으로
    1. 전제
    2. 마르코복음 안의 오클로스
    3. 마르코복음에 나타난 오클로스의 성격
        1) 오클로스의 성격
        2) 오클로스에 대한 예수의 행태
        3) 종합
    4. 예수를 따른 자들
    5. 마르코복음 안에 있는 어록
    6. 오클로스의 언어학적 의미
        1) 라오스와 오클로스
        2) 오클로스와 암 하 아레츠
    7. 종합
마르코복음에서 본 역사의 주체
    1. 전제
    2. 마르코의 삶의 자리
    3. 마르코의 민중신학의 기조
        1) 세례자 요한이 잡힌 후(14a절)
        2) 갈릴래아로 가다
        3) 하느님 나라의 도래 선포
    4. 민중의 행태
예수사건의 전승 모체
    1. 문제 제기
    2. 케리그마의 성격
        1) 고린토전서 15장 3~8절
        2) 필립비서 2장 6~11절
        3) 사도행전에 나타난 케리그마
    3. 민중언어의 성격
    4. 수난사
    5. 예수의 행태 일반
        1) 기적 이야기와 예수의 행태
        2) 아포프테그마와 예수의 행태
        3) 로기온(Logion, 어록)과 예수의 행태
    6. 결론
가난한 자 : 루가의 민중 이해
    1. 가난한 자
        1) 통계적 고찰
        2) 루가의 특수자료
        3) 예수의 탄생설화와 나자렛 선언
        4) 마르코와 Q자료
    2. 루가복음서의 청중
    3. 결론
마태오의 민중적 민족주의
    1. 문제 제기
        1) 마태오의 신학적 주제에 대한 논의들
        2) 문제 제기
    2. 마태오가 처한 현실
        1) 마태오와 그의 시기
        2) 민족적 와해 위기
    3. 마태오의 현실인식
        1) 이스라엘 : 길 잃은 양들
        2) 길 잃은 양이 놓여 있는 현실
    4. 민족동일성 재확립
        1) 뿌리 찾기
        2) 바리사이파가 주도하는 라삐 유다교와의 대결
    5. 마태오의 민중 이해
        1) 언어적 성격
        2) 의식화된 민중
    6. 맺는 말
민중신학의 성서적 근거 : 마르코복음을 중심으로
    1. 예수사건의 재발견
    2. 마르코복음과 민중
    3. 민중은 수단이 아니다
    4. 민중은 객체일 수 없다
    5. 십자가는 민중수난의 극치다
민중신학의 어제와 오늘
    1. 독재와 대항하므로
    2. 민중을 만나므로
    3. 민중과 더불어
   
제2부 민중운동사
   
민중사건과 언어사건
    1. 성서에서 본 말의 성격
        1) 그 말의 현장은 어떤 것이었나
        2) 예수의 경우
        3) 예수사건에 관한 전승
        4) 오순절의 말 사건
    2. 무엇으로 말하는 것인가
    3. 해야 할 말은 무엇인가
    4. 우리가 해야 할 말
미래는 가난한 자의 것 : 루가 6장 20~26절
    1. 축복과 저주
    2. 가난한 자와 부요한 자
    3. ‘지금’과 ‘장차’
    4. 우리의 선택
나라가 임하옵소서
    1. 예수의 기도
    2. 그의 기도를 전달받은 자들
    3. 하느님의 나라
고향 잃은 민중
    1. 피난민
    2. 성서에서 본 피난민문제
    3. 게르(GER) 문제 해결의 시도
    4. 이방인에 대한 관용의 한계
    5. 당면한 과제
        1 ) 새로운 인식을 위한 운동
        2) 실천에 대한 몇 가지 제언
이스라엘 민중사
    1. 머리말
    2. 출애굽
    3. 고대 이스라엘 종족동맹
    4. 민중을 배반하고 세워진 왕권
    5. 분단시대의 고난
    6. 민중운동의 여러 계열
    7. 예수의 민중운동
    8. 맺는 말
   
제3부 민중과 체제
   
민중사실의 증언
    1. 민중신학의 전제들
    2. 민중사실의 증언
고난과 고백
    1. 수난자와의 일치
    2. 마르코의 민중
    3. 수난사와 고난
    4. 더불어의 고난
    5. 맺는 말
갈릴래아 민중에 항복한 바울로
    1. 바울로의 위치
    2. 사울은 어떤 사람인가
    3. 그리스도교 박해
    4. 예수를 만남
    5. 전향
    6. 맺는 말
소명(召命)
    1. 바울로의 소명
    2. 사도 됨과 소명
    3. 이방인에게로
바울로와 역사의 예수 I
    1. 머리말
    2. 예수에 대한 바울로의 말
    3. 예수냐 바울로냐
    4. 왜 예수가 아니고 케리그마인가
선택받은 민중: 고린토전서 1장 26~31절
    1. 고린토교회 구성원의 사회계층
    2. 공동체원의 가치 판단 기준
    3. 민중을 보는 눈
    4. 택함을 받은 민중
   
제4부 예수의 희망
   
하늘도 땅도 공(公)이다
    1. 낙원 이야기
    2. 아담一인간
    3. 실락원은 공을 사유화함으로
갈릴래아에서 만나자: 마르코 16장 1~8절
    1. 제3의 자리
    2. 갈릴래아
    3. 갈릴래아에서 만나자
예수의 희망
    1. 새 세계에의 희망
    2. 희망과 세계혁명
    3. 바른 인간공동체의 희망
    4. 맺는 말
   
판권
표지
예수는 논하지 않았다
   
제1부 민중의 언어, 이야기
   
1. 성서라는 책의 성격
2. 성서의 서술양식
    1) 구약성서
    2) 신약성서
    3) 민중언어
   
제2부 예수의 이야기(비유)
   
1. 만성병에 걸린 세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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