첫째, 이미 거듭 말한 대로 바울로는 역사의 예수를 직접적으로 알지 못했으며 예수를 메시아로 믿는 그리스도 공동체의 고백을 통해서 그를 알았다.
그런데 우리는 흔히 '예수'와 '그리스도'라는 말을 별 생각 없이 같은 뜻으로 쓰고 있지만, 실상은 '예수'란 역사를 살았던 한 사람의 이름이며 '그리스도', 즉 '메시아'는 이미 예배의 대상이 된, 다른 말로 하면 이미 신격화된 존재를 일컫는다. 메시아란 말은 '기름 부음을 받은 자'란 뜻인데 일반적으로 왕으로 임명될 때 그 머리에 기름을 붓는 이스라엘의 관습에서 나온 것이다. 그런데 메시아는 왕 중의 왕이라는 뜻으로 일반 왕과 구별하여 '그'(the)라는 관사를 붙여 사용되었다. 그것은 세상에 종말을 가져오는 심판자라는 표상을 가지고 있었다.
이 메시아를 희랍 말로 번역한 것이 '그리스도'(christos)이다. 처음에는 이 말에 관사를 붙여서 그(the) 메시아를 가리켰는데, 이방인들은 그 의미가 생소하여 이해하기 어려웠으므로 점차로 '그'란 관사가 제거되고, 예수의 이름에 덧붙여진 또 하나의 고유명사로 되고 말았다.
그러나 예수가 '바로 그' 메시아라는 신념은 부활사건 이후 상당히 빨리 확립되었다. 이에 따라 하느님의 나라를 선포한 그 예수를 따르고 그를 모방한 것이 아니라, 오히려 하느님의 나라를 선포했던 '그 예수'가 바로 '그 메시아'라고 증거하게 됨으로써 역사의 예수의 현실과 저들의 증거 사이에 일단의 단절이 생겨났다.
예수 자신은 스스로를 메시아라고 한 일이 없고 오히려 자신이 아닌 제삼의 존재인 '인자'라는 메시아가 올 것을 전제했다는 것이 연구가들의 정론(定論)이다. 그런데 그의 민중은 예수를 바로 그 메시아라고 믿었기 때문에 예수의 말을 밝히고, 그의 삶을 추적하여 그것을 반복하고, 모방하기보다는 바로 '그가 누구인가' 하는 것을 증거하는 데 관심을 집중했다. 가령 십자가의 사건도 '그것이 어떻게 진행되었는가?' 하는 관심보다 '그것이 우리에게 무엇을 가져왔느냐?' 또는 어떤 의미가 있느냐에 관심을 쏟은 것이다. 이런 현상은 특별히 팔레스틴 밖에 사는 디아스포라 유다인들이나 이방인들에게서 뚜렷이 드러난다.
바울로는 바로 이러한 케리그마를 통해서 그리스도교를 배웠기 때문에 출발부터 역사의 예수보다 그 메시아(그리스도)에 관심을 집중했을 뿐 아니라, 그 바탕 위에서 그리스도에 대한 자신의 이해를 체계화하고 심화시켰다.
둘째, 팔레스틴 안에 있는 예수공동체(그것을 우리는 보통 '예루살렘 교회'라고 한다)는 이방 그리스도인들과 입장을 달리했다. 저들은 무엇보다도 역사의 예수의 목격자라는 사실을 그들의 특권으로 알고 있었다. 그것은 일면 당연한 일이다. 역사의 예수와 함께 살았고, 그의 수난사건을 경험했으며, 예수와의 관계에서 실패하기도 하고 배신하기도 했던 그들이 그만큼 생생한 역사적 경험에 집착하여 거기에서 의미를 찾으려고 한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다.
그런데 저들은 그리스도교를 인정하지 않는 유다교, 아니 예수를 처형하는 데 가담했던 유다교가 절대권을 행사하는 팔레스틴 안에, 특히 예루살렘에 뿌리를 내려야만 했다. 그러기 위해서는 그들과 공존(共存)하는 길을 모색할 수밖에 없었다. 바로 그 점 때문에 저들은 예수가 반유다적인 새로운 종파를 세운 것이 아니라 유다교 안에서 있었고, 유다교에서 말하는 약속(희망)을 성취한 자이며 그 일을 증거하는 자로서의 자신들의 위상(位相)을 정립해야만 했다. 가령 마태오 5장 17~18절에 예수가 말한 것으로 되어 있는 "내가 율법을 폐하러 온 것이 아니라 완성하러 왔다……"라는 말은 이러한 상황에서 나온 것이다. 따라서 저들은 성전도 부정하지 않고, 안식일도 그대로 지키고, 유다인 일반에게 요구되는 율법을 그대로 지켰으며, 예수를 풀이하면서도 그가 모세의 율법을 반대하거나 철폐하려 한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 본래의 뜻을 분명하게 밝히고 완성하려 한 것이라고 했던 것이다.
이러한 엉거주춤한 태도는 여러 가지 보도에서 드러난다. 그 가운데 가장 구체적인 것은 예루살렘 교회 지도자인 베드로가 안티오키아에 가서 이방인들과 함께 식사를 하다가 예루살렘 교회의 사람들 이 오자 그 태도가 돌변한 사실에서 볼 수 있다(갈라 2, 11 이하). 그것이 바로 예루살렘 교회의 입장을 반영하는 것이다. 또 예루살렘 교회에서 실권을 잡은 자는 예수의 형제라는 야고보였는데, 그를 중심으로 한 예루살렘 교회 지도층은 이방에 살던 그리스도교인들이 반 율법적인 자들이라고 박해를 받고 추방될 때에도 아무런 어려움 없이 예루살렘에서 건재할 수 있었는데, 이것은 그들이 유다교와 우호적인 관계를 가지고 있었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이에 대해서 이방 그리스도교 공동체의 전통을 이은 바울로는 그 입장이 달랐다. 그것은 그가 유다교 지배권 아래 있지 않았다는 이유도 있었겠지만, 적극적으로는 도그마화된 율법을 철폐해야 된다는 필요성을 절감했기 때문이다.
이미 첫 강론에서 언급한 대로 바울로는 유다교를 이방인에게 전 한 경험이 있는 라삐로서 그 유다교의 폐쇄성이 이방인과의 사이에 얼마나 큰 장벽으로 자리하고 있는가를 경험했다. 그런데 바울로는 예수 그리스도의 사건이 바로 이유다교에서 그리고 그들이 풀이한 율법에서 사람들을 해방시키고 그 장벽을 헐 수 있는 중요한 근거라고 보았을 것이다. 그러므로 저들이 풀이한 교조적인 율법에 대해서만이 아니라, 예수의 삶이나 가르침을 생활의 규범으로 받아들이려고 하는 율법적 예수상에 대해서도 저항하지 않을 수 없었다. 따라서 바울로가 '지킴'(율법을 지킴)에 반해서 '믿음'을 크게 내세운 것이다. 율법의 노예가 됨으로써, 율법을 지키는 사람과 안 지키는 사람으로 사회의 계급을 형성하고, 다른 문화권에 사는 민족들과의 단절을 가져온 데 대해 어떤 계율적 조건도 붙이지 않는, 믿음만으로 구원을 얻을 수 있다는 주장은 그러한 장벽을 깨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으며, 율법을 지킬 수 없는 사람들에게는 해방의 복음이 되었음에 틀림없다.
그러므로 바울로는 역사의 예수의 삶과 가르침을 배워 또다시 생활을 규정하는 조건으로 삼으려는 입장을 거부하고 믿음을 강조하게 된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이제는 우리가 후견인을 필요로 하는 어린 아이도 아니며, 주인에게 예속된 종도 아니라는 주장(갈라 4, 1~3)과 더불어 "여러분은 이제 종이 아니라 아들입니다. 아들이라면 하느님께서 세워주신 상속자입니다"(갈라 4, 7)라고 선언하고, "그리스도께서는 우리를 위하여 저주받은 자가 되어 율법의 저주에서 우리를 속량하셨습니다"(갈라 3, 13), "그것은 아브라함에게 주신 복을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이방사람(민족)들에게 미치게 하려는 것"(갈라 3, 14)이라고 한다.
셋째, 예수의 출현과 그의 십자가처형사건에 대한 이해가 바울로와 '예수'의 단절을 가져온 중요한 이유이다. 바울로는 예수의 십자가사건을 '종말사건'으로 인식했다. 바울로에게 '부활'은 바로 '십자가사건'이 '종말사건'임을 입증하는 사건이었다. 여기서 '종말'은 기존의 모든 것과의 단절을 의미한다. 다른 말로 하면 과거와의 단절이다. 따라서 율법은 물론이오 역사의 예수와 그를 중심으로 해서 일어난 일들마저도 이미 과거사가 되는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바울로는 "전에는 우리가 육에 따라 그리스도를 알았지만 이제는 그렇지 않습니다.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그는 새로운 피조물입니다. 보시오, 옛것은 지나가고 새것이 되었습니다"(고후 5, 16~17)라고 한다.
그런데 문제는 바울로가 십자가사건을 '궁극적인' 종말의 실현이라고 보는가 하는 것이다. 그렇지 않다. 그는 지금을 밤이 지난(종말) 낮이라 하지 않고 낮이 가까이 왔다(미래)고 하며(로마 13, 12) 결혼의 문제를 다루면서도 가능하면 결혼하지 말기를 권하면서 "때가 얼마 남지 않았다"(고후 7, 29)는 이유를 돈다. 부활문제를 논하면서도(데전 4, 13 이하) "주께서 오실 때까지"(새번역과 공동번역에서는 "다시"라는 말을 썼으나 원문에는 그것이 없다. 단 개역성경은 원문대로 번역했다) 또는 "주의 날이 마치 밤중의 도둑같이 온다는 것을 여러분이 잘 알고 있다"(데전 5, 2)고 하며, 자신이 선 현재에 대해서 "나는 이 모든 것을 이미 얻었다는 것도 아니오, 또 이미 완전해졌다는 것도 아닙니다. 다만 그것을 잡으려고 달려가는 것뿐"(필립 3, 2)이라고 한다. 이런 말들은 모두 궁극적인 종말은 아직 오지 않았다는 것으로, 옛것은 '완전히' 지나가고 '모두' 새것이 되었다는 말을 상대화시키고 있다.
이상에서 바울로와 '예수'의 단절의 이유를 찾아보려고 했다. 그러나 이것으로 '예수냐, 바울로냐?'라는 극단론에 정착할 수는 없다. 우리는 다른 시각에서 그 연속성이 없는지 물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