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음서 중 마르코복음에서는 민중을 단순히 소외되고 억압받고 있다는 측면―그것이 정치적이든 경제적이든 윤리적이든―에서 한 계층으로 보고, 예수는 이 계층을 무조건 자기편으로 인정하고 옹호한 것으로 되어 있는데 대해, 마태오는 교회질서에 큰 비중을 둠으로써 그 질서에 적응할 수 있는 조건을 갖추는 것을 조건으로 하고 민중을 평가하고 있다. 한편 루가는 민중(죄인)을 '회개한다'는 전제를 가지고, 즉 회개한 민중이라는 눈으로 민중에 대한 가치평가를 하고 있다. 그런데 이들의 가치평가라고 할 때 기존질서에 비추어 재는 것이 아니다(마태오는 교회질서를 전제하나 그의 입장으로는 그것을 새 질서로 보고 있다). 도래하고 있는 새 세계(하느님의 나라)의 빛에 비추어 평가하고 있다. 이에 대해서 바울로에게는 다른 면이 더 강조되어 있다.
바울로는 구속사적 과정에서 이 현상을 평가한다. 그의 구속사관에 종말사상이 기조를 이루고 있는 것은 부인할 수 없다. 그러나 정론처럼 된 사실은 바울로에게서 '하느님의 나라'가 아주 퇴색해버리고 그 대신 '하느님의 의(義)'가 등장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그런데 이 의(dikaiosune)란 고정된 원칙 따위가 아니라, '과정적 개념'이다. 즉 역사를 한 목적을 향해 이끌어가는 과정에서 구동축의 역할을 하는 신(神)의 뜻을 나타낸다. 그러므로 바울로는 민중을 그대로 또는 어떤 조건에 따라서 하느님의 나라와 직결시키는 것이 아니라 이 미련하고 권력 없는 쌍놈들, 즉 배웠다고 남을 멸시하고, 권력이 있다고 남을 억누르고, 세도가의 족벌에서 났다고 쌍놈들을 소외시키는 현장에서 바로 멸시당하고, 억눌림을 받고, 소외당한 계층을 하느님이 선택했다는 것이다. 저들을 선택한 것은 그들을 '구원' 또는 '하느님 나라'로 직행 또는 직결(直結)시키기 위함이 아니라, 지혜 있는 자를 부끄럽게 만들고 권력자를 권좌에서 몰아내는, 말하자면 혁명을 일으키기 위해서라고 한다.
세상이 뒤집혀지지 않고서야 이런 일이 있을 수 없다. 가치관의 전도란 바로 혁명이 아니겠는가! 이것은 공관복음서에 두 차례나 나오는 "앞선 자가 뒤서고 뒤선 자가 앞선다"는 현실과 같은 것이다.
바울로는 혁명의 과정이 이미 시작되었다고 한다. 그것이 바로 십자가의 사건이다. 그는 "십자가의 말씀이 멸망할 사람들에게는 어리석은 것이 되지만 구원받은 우리에게는 하느님의 능력이 됩니다"라고 하고, "지혜 있는 자가 어디 있고 학자가 어디 있습니까? 이 세대의 변론자가 어디 있습니까? 하느님께서 이 세상의 지혜를 어리석게 만드시지 않았습니까?"(고전 1, 18 이하)는 등의 선언을 하는데, 이것은 그의 그러한 신념의 토로이다.
그런데 바울로는 이 십자가사건의 '어떻게' '왜'라는 사회적 까닭을 일체 묻지 않고, 제시하지도 않는다. 이것은 바울로에게서 계속 물어야 할 수수께끼이다. 예수의 십자가사건이 불과 수년 전에 일어났는데 어떻게 사실(史實)에 대해서 전혀 침묵할까? 그래서 사실상 관념화로 뛰어넘게 하는 것일까?
이와 함께 새로운 공동체 구성원에 대한 그의 평가나 해석은 혁명적인데도 불구하고, 현실적으로 '어떻게'라는 것을 전혀 언급하지 않고 있다. 어리석은 자들에 의해서 어떻게 지혜있는 계층이 수치를 당하며, 약한 자들에 의해서 어떻게 권력자가 무력해지며, 쌍놈들과 존재 없는 자들에 의해서 어떻게 출세한 가문의 씨들이 몰락한다는 것인가? 이런 질문은 바로 초창기 그리스도교인들의 성분을 알기 위해서하는 것이다.
그들은 억눌림으로 인해 분노에 차 있는 민중인가? 가난하기 때문에 경제분배의 균형을 요구하는 프롤레타리아들인가? 아니면 배우지 못했기에 야성적이 되어서 현체제도 뒤엎을 수 있는 소질을 안고 있는 민중인가? 이러한 요소들을 배제할 수는 없을 것이다. 그러나 바울로는 그렇게 추측할 수 있는 어떤 단서도 보여주지 않는다. 그것은 그가 선 자리와 그것과 관련이 있는 그의 신학적 관점 때문이다.